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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일, 한국전쟁 전후 공권력에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 과거사법 입법을 촉구하며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의 지역구 사무실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열었다.
 지난 2019년 8월 17일 한국전쟁 전후 공권력에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 과거사법 입법을 촉구하며 당시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의 지역구 사무실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열었다.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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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종(당시 30세, 경북 월성군 서면 화천리)은 이유 불문으로 총살됨.
정위생(44세, 서면 송선리)은 1950년 8월 9일 묘소에 참배 갔다가 사살됨.
공성윤(나이 미상, 서면 화천리)은 한국전쟁 직후 보도연맹 관계로 피살됨.
이종화(25세, 서면 송선리)는 산촌에 거주한 관계로 피살됨.

2014년 초. 서류를 보던 경주유족회 김하종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경주경찰서에서 1982년 작성한 <신원기록 편람>에는 경북 경주시와 월성군에서 한국전쟁 당시 학살당한 215명의 사연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었다. 현재는 통합 경주시가 되었지만 1982년 당시에는 경주시와 월성군이 별도의 행정 조직이었고, 경주경찰서가 두 개 시군을 관할했다.

경주경찰서 자료에 따르면, 김이종은 당시 30세로 이유 불문하고 총살됐다. 정위생은 묘소에 참배 갔다가 죽었고, 이종화는 산 밑 마을에 살았다는 이유로 학살당했다. 이런 황당한 일이 있는가?

경주경찰서가 작성한 이 서류는 국가가 저지른 불법적인 국가폭력의 증거물이었다. 신원기록편람은 가족이나 친지가 저지른 범죄로 연대책임을 묻는 연좌제(신원조회)에 활용하기 위해 만든 문서였다.
 
 '신원기록편람' 내용
 "신원기록편람" 내용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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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거꾸로 솟은 김하종은 경주경찰서에 갔다. 그는 정보과 책임자에게 신원기록편람을 들이대며 "경주의 피학살자 나머지 기록도 내놓으시오"라고 했다. 1960년 4.19 혁명 후 유족회에 접수된 경주시와 월성군 피해자가 860명이었다. 미신고된 사람까지 감안하면 한국전쟁기 경주군(현재의 경주시) 피해자는 1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김하종의 추궁에 정보과 형사는 얼굴이 벌게지며 "그런 서류는 없습니다"라고 변명했다. "무슨 소리고?" 김하종은 목소리를 높이며 "내가 교직에 있을 때도 학교 졸업대장은 영구보존인데, 처형자 명단이 없다는 게 말이 되노?"라며 항의했다.

"있긴 있는데, 워낙 오래된 서류라 지하에 있어서 못 찾습니다." 이렇게 정보과 책임자가 버티니 김하종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집으로 발길을 향하는 김하종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는 발걸음을 떼며 이를 악물었다. '언젠간 밝히고 말 테야'라고 결심하면서....

2년 동안 집으로 출근한 형사

"김형 계시오~"라는 목소리가 들리니 김하종은 '이제 10시인가 보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경주경찰서 정보과 임 경사였다. 1963년 12월 16일 민복기 법무장관에 의해 김하종이 잔형 집행면제로 석방된 후 임 경사는 매일 김씨의 집으로 출근했다. 임 경사는 가택연금 상태였던 김하종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 오전 10시에 출근해 오후 3시에 경찰서로 돌아가는 일을 반복했다.

임 경사는 김하종에게 "김형, 전국 140명 요시찰인에 대한 감시가 정부의 방침이오. 그 가운데 김형도 끼어 있으니 나도 어쩔 수 없소.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테니, 김형도 나를 친구라고 하시오"라고 말했다. 김하종은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불안해 할까봐 임 경사의 신분을 숨겼다. 하지만 아들 친구라는 사람이 매일 찾아와 점심까지 먹어대니 어머니 최일순은 역정이 났다.

"니 친구는 우찌 된 놈이고?"
"와요? 어무이."
"어떻게 된 놈이 매일 와서 점심을 얻어 쳐묵냐. 시골 살림 빤한데 신세를 져도 유분수지!"


2년만에 감시자가 바뀌었다. 이번에는 최성기였다. 그는 월성군 내남면 노곡동 출신으로 내남면 민보단 반장이었다. 민보단 활동 공적(?)을 인정받은 그는 경사로 특채됐는데, 마을 사람들에게 김하종을 감시한다고 공공연하게 떠들어댔다. "이놈아는 빨갱이라 취직도 몬하고, 장개도 못 갈 거래이." 최성기의 말을 들은 모친 최일순은 집에 와서 대성통곡했다. 그렇게 김하종은 석방 후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4년간이나 했다.

하루에 100 짐을 져나르다

당시 김하종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자본금이 없으니 장사를 할 수는 없고, 결국 야산 2천 평을 개간하기로 했다. 산비탈은 돌 반 나무 반이었다. 지게에 돌을 담아 밭 옆에 쌓았다. 하루에 100 짐을 날랐다. 동네 사람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쟈는 농사도 안 져본 아가 우찌 저리 일을 잘하노?"

개간한 밭에 수박, 참외, 무, 배추를 심었다. 농사는 풍작이었다. 마을 사람들 입이 다시 벌어졌고 소문은 인근에도 퍼졌다. 풍문을 듣고 이채우 전 경주시장(1960.7.13.~1960.12.1. 경주시장 재직)이 김하종을 찾아왔다.

"젊은 사람이 개간한다는 소문을 듣고 왔더니 김 선생이었구먼. 일도 안 해본 사람이 어떻게 이런 장한 일을 했는교?"
"시장님! 경찰이 옴짝달싹 못하게 하니 어쩔 수 없는 일 아인교. 시장님도 잘 아시겠지만 제가 지난 합동위령제 때 법을 위반했는교?"


김하종이 말한 합동위령제는 경주유족회가 4.19 혁명 후인 1960년 11월 13일 계림국민학교에서 연 위령제를 말한다. 그 위령제는 경주경찰서의 집회허가를 받아 합법적으로 치렀다. 김하종의 하소연이 이어졌다.

"교직에 자리가 나 경북교육청엘 갔더니만 중앙정보부 조정관하고 특무대 파견대장이 있더라요. 결국 신원조회에 걸려 교직은 물 건너갔습니데이. 요번에 선생 자리가 또 났는데, 말 좀 해주이소."
"군인도 아닌데, 왜 특무대에서 신원조회를 하노?"


김하종이 이채우 전 경주시장에게 읍소한 지 열흘 후에 최성기 형사가 찾아왔다. "학교 가도 좋소." 김하종은 1964년 12월 19일 동방고등공민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고등공민학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중학교 교육을 하는 학교였다. 당시 고등공민학교는 3년제로, 교육을 이수한 후 국어, 영어, 수학, 국사 시험을 치렀다. 이 시험에 합격해야 정규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동방고등공민학교는 이후 불국사고등공민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경주 황성공원에 세워진 위령탑 앞에 선 김하종.
 경주 황성공원에 세워진 위령탑 앞에 선 김하종.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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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김하종은 1970년 11월 4일 불국사실업학교를 설립, 교장으로 취임했다. 불국사실업학교는 한 학년에 2학급(공예반, 상과반)으로 전교 학생이 300명이있는데, 정식 인가를 받은 학교였다.

시간이 흘러 김하종은 새로운 도전을 했다. 중등학교 정식 교장을 할 수 있는 교원자격증 시험을 치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시험에 합격해 1978년 9월 15일 자격증을 받았다. 하지만 합격 20일이 지나도 고등학교 교장 발령이 나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그가 대구에 있던 경북교육청 문을 두드렸다.

"신청서가 낸 지가 언젠데 왜 발령이 안 나노?" 담당자가 우물쭈물 하다가 대답했다. "교장 선생님요. 경북경찰국과 치안국 지문날인과, 중앙정보부에서는 신원조회가 통과됐는데요, 특무대에서 '신원특이자'로 분류해, 승인이 안 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김하종은 수십년간 가슴에 쌓인 분노가 폭발했다.

"내가 군인도 아닌데 왜 특무대에서 신원조회를 하노! 만약에 고등학교 교장 발령을 내주지 않으면 행정소송을 낼끼구만."

그가 따발총처럼 말을 던지고 집으로 온 지 며칠 만에 경북교육청으로부터 경주여자정보고등학교 교장으로 정식 발령이 났다. 이전에는 교장 직무대리로 있었다.

1987년 김하종은 경주여자정보고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23년 교직생활을 마무리했다. 교직생활 내내 마음 편한 날이 하루도 없었다. 툭하면 신원조회네, 감시네 하며 정보과 형사들이 교장실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교장 선생님. 예전에 함께 했던 유족들을 만나면 안 됩니다"라며 겁박을 했다. 김하종은 "학부모 만나기도 바쁜데 유족들을 언제 만나노?"라고 대꾸했다.

아니, 만날 시간이 없다기보다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 집안 일가 22명이 학살당하고, 아버지도 민보단원의 매에 숨지고, 경주유족회를 결성한 자신도 무기징역을 구형당하고 만 28개월 감옥 생활을 한 그로서는 과거를 보고 싶지도 않았고, 생각하기도 싫었던 것이다.

2006년 진실규명신청서를 내다
 
 김하종의 진실규명신청서
 김하종의 진실규명신청서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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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버님, 대구시청에 나오이소." "야, 이놈아야. 네가 볼 일이 있으면 나를 찾아올 일이지, 어디 장인 보고 오라마라 하노!" "시청에 오셔야 볼일을 봅니데이."

그렇게 사위 차에 몸을 싣은 김하종은 대구시청에 갔다. 사위는 "과거사법이 통과돼 '진실규명신청서'를 받고 있으니, 신청하이소"라고 했다. 김하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하이고마 됐다. 내가 교장했으면 됐지 이제 와서 뭐하러 하노"라고 거절했다. 하지만 사위의 끈질긴 설득과 도움으로 2006년 4월 10일 김하종은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신청서를 제출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5.16쿠데타 직후 인권침해 사건'과 '경주지역 민간인학살사건'을 각각 2009년 하반기와 2010년 상반기에 '진실 규명' 결정했다. 김하종과 경주유족들의 한 서린 60년 과제가 풀린 것이다.

진실화해위원회가 두 사건을 진실규명하는 데에는 김하종의 증언과 소장 자료가 절대적이었다. 김하종은 1960년 4.19 혁명 직후 경주유족회 활동자료와 혁명재판소의 판결문 등을 보관하고 있었다. 또 그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기억력이 탁월해, 1949년부터 1960년대의 사건들을 줄줄이 외우다시피 증언했다.

"선생님이 총대를 메주세요."

2014년 이윤숙(가명)씨가 찾아왔다. "선생님, 저는 미신고자인데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노무현 대통령 때인 2005년 과거사법이 제정돼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사건을 진실 규명했고,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해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경주를 포함한 전국에 이윤숙씨처럼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신청서를 제출하지 못한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다. 유가족들이 과거사법 자체를 몰랐거나, 알았다손 치더라도 피해의식 때문에 신청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결국 과거사법을 개정해 추가 신청을 받아 조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미신고유족회'를 결성하고 전국의 단일한 목소리로 과거사법 개정을 요구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던 참이었다.

경주 민간인학살 유족들은 김하종이 앞장서기를 이구동성으로 원했다. 김하종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가 "팔십이 넘은 몸이오. 젊은 분들이 할 일이요"라고 사양했지만 다른 이들은 막무가내였다. 미신청인들은 무엇을 어디서부터 일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데 김하종이 누구인가? 60여 년 전인 1960년도에 서울대 법학과를 나와 법무부 형정국에서 일하다가 경주유족회 회장을 맡지 않았는가. 이후 감옥 생활과 교직 생활을 거쳐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명예회복된 전설적인 인물이 아니던가.

미신고 유족들은 김하종에게 매달렸다. 결국 그는 제2기 경주유족회장 요청을 수락하고 2015년 3월 6일 경주시 보훈회관에서 창립총회를 했다. '제2기 경주유족회'를 창립한 후에 김하종은 매년 합동위령제를 지냈고, 2016년에는 경주시 황성공원에 위령탑을 건립했다. 또 전국유족회 '과거사법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2020년 5월 20일 국회에서의 과거사법 개정에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5.16 쿠데타 세력에 빼앗긴 진실
 
 한국전쟁유족회의 14일 국회앞 1인시위 사진. 오는 6월 20일이면 1인시위 500일이 된다.
 지난 2019년 6월 14일 한국전쟁유족회의 국회앞 1인시위 모습.
ⓒ 한국전쟁유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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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중에 김하종은 제4대 국회에서 1960년에 작성한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보고서를 입수할 수 있었다. 보고서에는 경주지역 피해자 550명의 서류가 있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학살되었는가를 1960년의 시각에서 작성한 것이다. 진실규명에 이보다 더 좋은 자료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4.19 혁명 직후 경주유족회에 신고된 피해자는 860명으로 국회 보고서에 실린 550명과는 300명 넘게 차이가 난다. 이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하종은 경주유족회가 접수한 860명이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고 본다.

그런데 경주유족회가 보관하고 있던 860건의 서류가 5.16 군사 쿠데타 직후 혁명검찰부에 탈취 당했다. 현재 그 서류는 국방부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하종의 남은 과제 중 하나는 5.16 쿠데타 세력에 빼앗긴 1960년 경주유족회 서류를 되찾는 것이다.

집단학살된 860명의 삶을 복원할 그 서류를 되찾는 것이 김하종만의 꿈인지 국가는 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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