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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말 그대로 '발트의 길'이니만큼 세 나라의 공조가 아주 중요했다. 7월 8일 에스토니아 남부도시에서 열린 2차 인민전선 총회에서는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인들과의 공조방식에 대해서 더 자세한 논의가 벌어졌다. 리투아니아의 인민전선 격인 사유디스의 대표 비타우타스 란스베르기스(Vytautas Landsbergis), 라트비아 인민전선 대표 다이니스 이반스 (Dainis Ivans) 등도 함께 자리를 하였다.

사람들을 동원할 수 없다면 띠로라도 연결해야 한다

이 회의에 참석하였던 헤인즈 발크씨는 이 당시만 해도 발트의 길 조직에 대한 확신이 없던 상태였다고 전해주었다. 우선 그 많은 사람들을 모으는 것 자체에 회의적이었다. 행사까지 두달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마치 모래로 집을 집는 것과 같은 형국이었다. 그러나 아직 포기하는 것은 일렀다. 

사람들을 촘촘하게 세우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 최선의 대안으로서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10미터로 하고 그 간격은 각국의 국기 색깔의 리본으로 마주 잡아 연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발트의 길 당일, 투르틑 점검하는 헤인즈 발크 씨 (맨 앞쪽)
 발트의 길 당일, 투르틑 점검하는 헤인즈 발크 씨 (맨 앞쪽)
ⓒ Jaan El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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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동원과 교통편 섭외를 위하여 각 국마다 자원봉사단이 조직되었다. 실례로 에스토니아에는 주로 젊은 이들로 구성된 안전요원(에스토니아어로 turvateenistus)이라 불리던 조직이 있었다. KGB나 모스크바에서의 방해가 있을 것을 대비하여 수상한 행동이나 행위를 가려내거나 러시아로부터의 프락치를 색출하는 등 발트의 길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말 그래도 독립적인 군대 같은 조력직과 애국심으로 뭉쳐 있었으며 가라테 등 호신술을 연마하기도 했다.

각국의 인민전선은 1939년 독소불가침 조약 이후 강제적으로 결성된 1940년 인민에스토니아공화국 설립을 무효화하고 에스토니아의 자주적 주권을 되찾는 것에 대한 대국민 설문조사를 실시했으며 에스토니아에서만 32만 명이 찬성에 서명하였다. 이 서명의 수를 바탕으로 대략적인 참가인원수를 결정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 계획대로라면 탈린에서  해안도시 패르누를 지나 라트비아 국경해안도시 이클라까지 20만 명의 인원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탈린에서 서부 해안도시 구간 내에서 인간띠를 구성하는 것이 적절치 않았다. 바다 옆으로 인간띠가 이어지는 모습이 사진으로는 절경이 될지 몰라도 그 구간에는 울창한 숲들이 많이 있었고 길이 너무 좁아서 차량을 동원하기에도 난점이 많을 듯 했다. 자동차들은 차도 오른쪽에 주차하고 사람들은 자동차에서 2미터 이상 떨어져 중앙선에 맞춰 줄을 맞고 서있어야 차량의 원만한 수송과 현지 이동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초기 구간은 길이 좁은 2차선 구간이라서 자동차들이 서있을 경우 다른 곳으로 사람들을 동원하기 위해 차를 돌리거나 우회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수 있었다. 

패르누에서 라트비아로 넘어가는 구간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도 더 적어 사람들을 모으는 데 어려움이 더 많았으며 이는 라트비아로 넘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어쩔 수 없이 사람 동원이 어려운 구간에는 10미터마다 한사람씩 서있고 그 사이를 사람들이 검은 띠를 손에 잡고 서있기로 했다. 

하지만 해안구간을 포기하고 약간만 더 내륙으로 들어가면 도로도 4차선으로 넓어지고 비교적 큰 도시도 적당히 자리잡고 있어 굳이 탈린이나 인근 대도시에서 사람들을 보내지 않고 현지에서도 인력 조달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띠를 잡고 서있는 것보다 말 그래도 가능한한 손에 손을 잡고 서있는 것이 더 의미가 크므로 사람 사이 간격을 띠로 연결해야 하는 10미터 안을 취소하여 노선을 변경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발트의 길을 불과 19일 앞둔 8월 4일에 해안구간이 아닌  내륙지역으로 잇는 노선으로 변경되었다.  

자원봉사자들의 실측과 정밀 연구

그 후 각국의 자원봉사자들은 직접 차를 몰아 그 구간에 대한 실측을 시작했다. 에스토니아 안전요원들은 정류소 위치. 건물, 자연표식,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211.5 km 거리를 작은 구간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해당 지역 인민전선 사무실에서 일정 구간씩 담당하기로 했다. 그래도 적어도 14만 명을 동원해야했다.  

안전요원들은 탈린에서 리가까지 거리를 재고 사람들의 수를 정했다. 예를 들어 탈린 시내에서 탈린공대까지 500명의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계산을 했다. 사람들이 서야할 장소를 정확히 분석하여 나누었다. 에스토니아 내 구획 내 아스팔트 위에 주요 지점의 위치도 표시했다. 노선을 바꾸고 구간을 정리하니 사람들 사이의 정확한 거리가 측정되었다. 탈린을 제외한 구간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거리도 5m로 조정되었다. 

탈린 사람들은 인구가 많고 교통도 편하므로 라트비아 국경으로 가는 길목 등 사람들 동원이 어려운 곳에 집중 배치하기로 했다. 인구도 제일 많고 교통편도 가장 잘 발달된 탈린의 인구를 지방으로 운송하는 것이 가장 쉬울 것은 뻔했다.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 시내에 마련된 발트의 길 조형물
▲ 발트의 길 조형물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 시내에 마련된 발트의 길 조형물
ⓒ Common 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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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에는 독소불가침조약 무효서명에 찬성을 한 사람들의 수가 110만 명에 달했다. 리투아니아 지역에서는 50구간으로 나뉘었는데 독소불가침조약 이후 50년 동안 이어진 수난의 역사를 의미한다. 각 구간마다 십자가, 바위 등으로 표식을 세우기로 했다. 

행사 10일 전부터 모든 행사준비가 폭발적으로 진행되었다. 모든 기관, 단체, 콜호츠, 학회, 병원 관계자들이 8월 23일 무료 교통수단을 제공해 줄 것이라 약속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도 생방송을 해주기로 협의되어 방송을 통해 사람들의 참여를 독려할 수 있었다. 합창단. 오케스트라 등도 자발적으로 참여하겠다 지원했고 에스토니아의 구석진 마을에 있는 기관들도 모두 모여서 합의를 이루어 냈다.

대부분의 차량은 군인이나 경찰들, 공산당 관련 단체들에게만 소속되어있었다는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어찌 보면 그들의 취지와 목적에 반하는 기관들에서 그 위대한 행사를 위한 일에 기적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KGB의 공이 컸다. (다음 기사로 이어집니다).

태그:#발트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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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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