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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집의 귓속말>
 책 <집의 귓속말>
ⓒ 아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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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40대의 무주택자이다. 사회 초년생 시절, 동료들의 대화에서 얻어들은 정보로 '집'에 투자하여 '재테크'라는 것을 해야 하나 고민했던 적도 있었지만, 결국은 성공하지 못했다. 초기 투자금도 터무니없이 부족했고, 버는 것보다 집값이 더 빨리 오르니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내 집 마련의 '때'를 놓치고 났더니 나도 모르던 사이, 내 소유의 주택이 없는 비혼의 40대 여자가 되어 있었다.

한참 아이들 키울 때는 '혼자라서 속 편하겠다'던 친구들은 '그렇게 혼자 늙어가면 어쩌냐'면서 걱정을 대신하는 중인데, 나는 그저 서로가 겪어내지 않은 삶에 대한 손쉬운 판단이겠거니 넘기고 있다. '혼자라서 속이 편했던' 적도 없고 '혼자 늙어가는 것'이 그리 걱정되지도 않으니 말이다.

다만, 미래의 내 삶을 그려볼 때, 그 시작은 항상 정해져 있다. 바로 일터에서 내어 준 숙소의 사용 기한이 다한 후, 나의 집을 마련하는 '그날'이다. 오늘은 책 <집의 귓속말>을 통해 내가 갖고 싶은 집에 대해 상상해보고 싶다. 

내가 살고 싶은 집은 아파트가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 물건, 장소, 취향이 뭔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봤다. 그리고 내 생활에서 중요한 것들을 순위 매겨 재배치해봤다. 그랬더니 실은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내 삶의 중심에서 자리한 채 피로감 주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씩 무심하게 그것들을 지워나갔다. 아마, 그날부터였을 거다. 내 인생이 어떤 형태인지, 어떤 방향으로, 어디쯤 흘러가고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조금씩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한 날이.아마, 그날부터였을 거다. 더 늦기 전에 내 집을 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날이. - 15쪽

<집의 귓속말>은 건축사인 저자가 가족과 함께 살아갈 집을 짓겠다고 결심한 이후, 집을 짓고 입주한 후의 생각들을 정리한 책이다. 저자는 아파트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가족들과 함께 살아야 할 '집'을 지어야겠다고 결심한 날을 이렇게 기억했다.

집이라는 것은 단순히 '예산'에 맞춰 평면을 그린 후, 건물을 올려 만드는 게 아니다. 저자에게 집 짓기는 가족이 추구하는 삶의 형태를 구현하는 작업이었다. 이 결심은 내가 처음으로 '아파트를 사지 않겠다'라고 결심했던 순간을 떠올리게 했고, 고향에 내려가서 원하는 공간을 만들어야겠다고 상상하기 시작한 날을 되짚어보게 했다.

2000년대 초반이었다. 사회 초년생 시절, 나는 일터 5분 거리의 원룸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식당과 거실, 침실을 구분하는 문도 없이 통으로 트여 있던 작은 원룸은, 집이라기보다는 지친 일과를 끝낸 후 잠시 잠을 자고 나가는 숙소일 뿐이었다.

기숙사에서 10년도 넘게 살아왔던 나에겐 부족할 것 없는 방이었지만, 편하게 쉴 수 있는 나의 공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벌써 사회생활 20년 차에 가까워지고 있고, 몇 개의 도시를 거쳐서 지금 살고 있는 포항까지 옮겨왔지만, 내가 거쳤던 몇 채의 원룸들이나 전세 아파트들도 '내 집'이 되지는 않았다.

내가 여전히 어느 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한 이유도, 내가 살아갈 '나의 집'을 갖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재테크로서의 집을 포기한 이후로, 내게 집은 '재산'으로써 가치를 불려야 하는 투자처가 아니라, 내가 살아야 하는 공간이 되었다. '집'을 자산의 가치로써 판단하지 않겠다 결심했더니, '아파트'라는 허공에 떠 있는 육면체의 공간에 애착을 갖는 건 불가능해졌다.

그때부터였다. 내가 살고 싶은 공간을 그리면, 고향 집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나는 언젠가 고향에 '나의 집'을 지을 생각이다. 가족들의 삶의 모습과 닮아 있고, 부모님의 인생을 품고 있는 그런 '우리 가족의 집' 말이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아내는 밴드 '언니네 이발관'의 리더였던 작가 이석원의 에세이를 빗대어 '보통의 집'을 만들어보라고 농담을 던졌다. 내가 물었다.
"보통의 집은 어떤 집인데?"
"음…… 그냥 따뜻하고 시원하고 튼튼하고 안전하고 밝은 집. 무섭지 않은 집, 밖에서 봤을 땐 누구라도 괜찮은 집이구나 느낄 만한 집. 으스대거나 폼 잡는 허세가 없는 집, 집 안이 집 바깥보다 더 기분 좋은 집, 계절과 날씨를 담을 수 있는 집, 저녁에는 멋진 노을을 보고 밤에는 별과 달을 볼 수 있는 집, 비 새는 집, 아이들이 자라면서 자신의 속도로 천천히 일상의 즐거움을 배울 수 있는 집."
"……"
"……"
"너무 어려운 집이네." - 31쪽

저자가 가족들과 함께하고 싶은 집을 결정하며 나누는 대화들은, 가족들과 함께 살고 싶은 공간에 대한 나의 고민으로 이어진다. '보통의 집'에 대한 나의 고민도 이미 2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2년 전부터 엄마와 동생네 가족들과 함께 매달 가족의 소식을 담은 신문을 만들고 있다. 가족으로부터 기사를 받아서 편집한 후, A3 한 장을 반으로 접은 형태로 출력하여 각 집에 우편으로 보낸다. 이 신문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내가 제안했던 기획 아이템 중 하나가, 바로 '우리 가족의 집'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기사였다.
 
매달 전국 각지에 흩어진 동생들과 엄마의 이야기들을 신문으로 만들어서 나누고 있습니다. 이 신문에 제가 짓고 싶은 집에 대한 이야기를 벌써 5회에 걸쳐 공유해 보았네요. 점점 더 우리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 가족소식지를 통해 집에 대한 생각을 나눕니다.  매달 전국 각지에 흩어진 동생들과 엄마의 이야기들을 신문으로 만들어서 나누고 있습니다. 이 신문에 제가 짓고 싶은 집에 대한 이야기를 벌써 5회에 걸쳐 공유해 보았네요. 점점 더 우리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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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모두 21호가 발행된 가족신문의 기사들 중, 5회에 걸쳐서 내가 짓고 싶은 '고향의 우리 집'에 대한 상상을 펼쳐 보았다. 코로나19로 집에 머무른 시간이 많았던 지난 6월에는 인터넷에서 찾아낸 평면 설계 프로그램의 힘을 빌려서, 지금까지 그려보았던 다양한 설계도들을 좀 더 근사하게 그려보기도 했다.

엄마는 딸내미가 고향에 내려와서 엄마랑 무얼 하며 살겠다는 것인지 여전히 걱정하고 계시고, 동생들은 엄마가 익숙했던 공간이 망가질까 봐 걱정이라지만, 이런 얘기들을 나눠가다 보면 좀 더 만족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우리가 불가능한 답에 매달리지 않는다면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삐걱거리고, 집값 폭락에 대한 걱정으로 정권에 대한 지지도가 흔들릴 때마다, 나는 솔직히 혼란스럽다. 1970년대에 시작된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함께, 지난 50년간 국가의 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대되었다. 국가의 가치를 반영한 가장 큰 자산 중 하나가 '국토'였을 것이고, '부동산 불패' 신화도 이러한 기류에 힘입어 만들어졌을 테다.

이런 흐름을 타고 수요가 몰리는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부동산에 투자해 재산을 한몫 잡는 것이 가능했다. 동시에 집값이 폭등해 세대 간, 지역 간 극심한 불평등이 생겨났다. 집값이 떨어지면 불평등이나 '내 집 마련'에 대한 기회 불균형은 해소될 수 있겠지만, 반대로 집에 모든 것을 투자한 사람들은 좌절할 것이다.

만약, 내가 서울 어딘가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는 당사자였다면, 나 역시 어쩔 줄 몰라 하며 기득권 언론이 이끄는 대로 정부의 실정을 비난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흔이 넘은 비혼의 무주택자로 지금 상황을 바라보면 모든 게 명확해진다. 집값은 더 이상 올라선 안 된다. 노동 없이 없는 이득은 사회가 제대로 회수해야만 한다.

재분배된 부는 국가의 미래와 미래 세대를 위해서만 사용해야만 한다. 인공의 건축물이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시스템에 우리의 미래를 걸어야 한다. 집값을 떨어트리지 않으면서 세대 간 불평등까지 해결하라는 건 불가능한 답을 써내라는 억지일 뿐이다. 억지에 닻을 내리고 있는 배는, 더 이상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다.
 
길을 잃고 헤매는 기분이 들 때가 실제로는 길을 찾기 직전일 수도 있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어지는 그 순간 결정적 퍼즐 하나가 딱 맞아떨어지면서 헤매던 원인들이 저절로 자리를 찾아간다. 조금만 더하면 그 순간이 올 것이다. 기대하며 조금 더 힘을 내는 것. 그래서 그런 작은 성공을 징검다리 삼아 다음 단계를 바라보는 것. 좋은 삶을 사는 유일한 방법은 '계속한다', 그것뿐이다. - 308쪽

나는 결국 '아파트'를 통한 재테크에 실패했다. 월급을 꼬박꼬박 모은 돈을 털어서 고향에 집을 짓고 나면 빈털터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재테크를 포기하며 기대하던 미래의 모습에는 조금쯤 가까워진 느낌이다. 그때의 나는 동료들과 함께 그런 얘기를 했다. '사는 곳이 안정적이고, 교통이나 의료, 교육에 대한 비용을 국가가 보장해 줄 수 있는 세상이라면, 돈 버는 것에 이렇게까지 애를 쓰지는 않을 것' 같다고.

어쩌면 우리가 불가능한 답안지에 매달리지 않는다면, 그리 불가능한 일도 아닌 것 같다. 집은 '사는 (buy)'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족들과 함게 '사는 (live)' 곳이어야 한다.

태그:#오늘날의 책읽기, #집의 귓속말, #재테크, #부동산, #나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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