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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총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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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은 상하이를 떠나 다시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겼다.

고국을 떠날 때에 못지않는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임시정부의 분열상에 국무위원의 일원으로서 책임감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회영ㆍ신채호ㆍ박용만 등이 임시정부 최고수반에 이승만은 안된다는 주장이 선견지명이었음을 알았다. 임시정부가 헌법을 국무령 중심의 내각제로 바꾸면서 입각제안이 있었으나 맡지 않았다. 결과에 대한 책임의식에서였다.

27세 때인 1895년 상배(喪配)를 당하고 몇해 뒤 재혼하였으나 1911년 유하현 망명지에서 재취 부인 박씨도 세상을 떠났다. 두 번째 상배를 당한 이후 독신으로 지내왔다. 한때 주위에서 배우자를 소개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평생 일 복은 많았으나 처 복은 없었다.

이시영이 임시정부를 떠났다는 정보는 밀정들에 의해 샅샅이 조선총독부에 보고되었다. 

'독립운동의 두목' 중의 하나로 인식해온 총독부는 그를 '귀환'시키려는 논의를 벌였다. 1926년 가을 어느날 총독 데라우치를 중심으로 이른바 귀족회의가 열렸다. 을사5적ㆍ경술7적 등 매국노 30여 명이 참석했다. 개중에는 이시영과 소싯적부터 우의를 갖고 있는 자도 끼어 있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자가 선생을 화제로 삼았다.

"이시영은 아니 될 일을 가지고 공연히 광음(光陰)만 소비하며 헛된 노력을 하고 있으니 어찌 가석하다 아니하겠소. 무슨 방법을 쓰든지 서울로 데려왔으면 좋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것은 심히 중대한 일이라 자기들 의사만 가지고는 불가능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자리에 동석한 데라우치에게 이 말을 하고 의견을 물었다. 데라우치가 말했다.

"그 사람이 오기만 한다면 그 신변을 보장할 것임은 물론, 만족스러울 만한 조치를 취해 주겠소."

그러자 좌중의 한 사람이 말했다.

"그 사람은 총중고골(塚中枯骨)이니 무슨 일을 족히 하겠소."

이 말을 들은 이완용은 반대 의견을 말했다.

"세상일은 알 수 없는 것이오. 우리가 오늘 한 이 소리를 그 사람은 곧 들을 수가 있으나 그 사람의 동작은 우리로서 조금도 파악을 못 하니, 그렇게 속단해서 말할 것은 아니오."

앞서 말한 사람은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주석 1)


총독부의 논의는 여러 단계를 거쳐 몇 달 뒤 베이징의 이시영 측근에게 전해지고, 그가 말했다.

"어느 곳으로 유람하면 위험 없이 한성(漢城)에 온전히 갈 수 있을 것이며, 여생은 행복할 것입니다."

선생은 그 말을 듣는 즉석에서 꾸짖어 말했다고 한다.

"가려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나를 구축해서 보낸 것이 아니다. 내 진퇴는 내가 결정한 것이니, 여러 사람들에게 다시는 이런 말을 말라고 일러라." (주석 2)

 
개벽 대표 언론잡지였던 개벽. 호랑이가 울부짖는 표지가 인상 깊다. 당시에는 일제 침략으로 한국인들이 풀이죽어있는 상태라 호랑이 그림을 많이 써서 기상을 살리려고 했다.
▲ 개벽 대표 언론잡지였던 개벽. 호랑이가 울부짖는 표지가 인상 깊다. 당시에는 일제 침략으로 한국인들이 풀이죽어있는 상태라 호랑이 그림을 많이 써서 기상을 살리려고 했다.
ⓒ 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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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일치인지, 귀환공작을 캐취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국내에서 발행되는 『개벽』 1925년 8월호에 이시영 관련 기사가 크게 보도되었다.

"밧게 있는 이 생각, 이역풍상에 기체 안녕하신가"라는 제목의 특집이다. '밧게'는 밖에 즉 해외에 있는 망명자를 뜻한다. 특집에는 조규수라는 이가 「명문(名門) 형아(馨兒) 이시영씨」라는 글이 돋보였다.

이 기사는 서두에 이시영 일가의 빛나는 사력을 유려한 필치로 기술하면서 1910년대 이시영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경술의 합병이 되자 그때 조동(棗洞) 곧 지금의 황금정 1정목에 있는 자택을 방매하야 가지고 창의문 밖 세검정으로 이사를 하기에 우리는 그 선생이 이제부터는 홍진(紅塵)을 하직하고 석천(石泉)의 주인이 되려는가 하였더니 그해 겨울에 별안간, 그 선생의 5형제가 모두 이 반도 안에서 종적이 묘연하다고 모든 세인이 떠들어대다가 그 이듬해 봄에야 만주 성경성 통화현 합니하라 하는 지방에 가서 새로 전접하고 신흥학교를 설립하여 청년을 인도한다. 경학사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교육과 산업의 병진책을 여러 동지로 더불어 연구한다 합디다. (주석 3)

다음으로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관련 내용이다.

중국의 혁명 풍운이 일어서 원세개의 공화정부가 새로 성립되자 구주의 대전이 발발하여 온 세계가 기름 냄비와 같이 끓으니까 무슨 선후책이나 얻어 볼까 하고 북경으로 갔다, 봉천으로 왔다 이리저리 분주왕래하야 갖은 풍상을 다 지나다가 기미의 삼일운동이 반도 8성에 세차게 넘쳐흐름을 따라 여러 동지가 임시정부를 상해에 설립하고 재정총장이라는 중대한 사명으로 부르니까 의무상에 사피할 수 없다는 결심으로 분연히 가서 성심으로 천신만고를 무릅쓰고 나아가는 것이 7년의 성상을 일일과 같이 지나온 것이지요. (주석 4)

이 잡지는 출간되면서 곧 총독부에 의해 압수되었다.

주석
1> 박창화, 앞의 책, 67~68쪽.
2> 앞의 책, 68쪽.
3> 『개벽』, 1925년 8월호.
4> 앞과 같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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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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