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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성립기념 사진 (1919. 10. 11)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성립기념 사진 (1919. 10. 11)
ⓒ 도산안창호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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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의정원은 밤을 새워 토의를 거듭한 끝에 전문 10조로 된 임시헌장을 심의ㆍ통과시켰다.

국호제정과 관련하여 대한민국ㆍ조선민국ㆍ고려공화국 등이 제안되어 역시 토론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확정하였다.

'대한'이라는 국호를 둘러싸고 일부 의정원의원이 망한 대한제국의 국호를 다시 쓸 이유가 있는가를 따지고, 다수 의원들은 망한 대한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의미와 함께 '한(韓)'이라는 명칭은 삼한 이래 우리 민족의 고유한 이름이라는 사적(史的)고찰이 전개되어 결국 '대한제국'에서 '제(帝)' 자 대신 '민(民)'의 시대를 연다는 뜻에서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임시의정원은 의장 이동녕, 부의장 손정도, 서기 이광수ㆍ백남철을 뽑았다. 임시의정원은 정부조직의 법제를 제정하고 4월 11일 이를 공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태어난 순간이다.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때문에 이때가 대한민국 건국 원년이 된다.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일을 대한민국 건국절로 삼으려던 이명박ㆍ박근혜 정부의 시도는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외면한 처사였다.

임시정부의정원은 국무총리로 이승만을 선출한데 이어 정부각료를 선임하였다. 초기 내각 명단이다.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법무총장 이시영
 교통총장 문창범

임시정부는 국무총리에 선출된 이승만이 미국에 체류 중이어서 내무총장 안창호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시영은 한성정부 재무총장에 이어 이번에는 법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건물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구지'(노만구 마당로 304호). 1926-1932년 까지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한 곳으로 상해시 정부와 독립기념관 등 한중 양국의 협조로 유적지로 단장됐다.
 당시 건물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구지"(노만구 마당로 304호). 1926-1932년 까지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한 곳으로 상해시 정부와 독립기념관 등 한중 양국의 협조로 유적지로 단장됐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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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4월에 국내외에서 도합 8개의 임시정부가 수립 선포되었다. 조선민국임시정부, 신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간정부, 고려공화정부, 간도임시정부 등은 수립 과정이 분명하지 않은 채 전단으로만 발표되었다. 실제적인 조직과 기반을 갖추고 수립된 것은 러시아 연해주, 상하이, 한성의 임시정부였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채택한 임시헌장의 10개 조항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제1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함"(제2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ㆍ빈부 및 계급 없이 일체 평등으로 함"(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ㆍ언론ㆍ저작ㆍ출판ㆍ결사ㆍ집회ㆍ거주이전ㆍ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 (제4조) 등 근대적 민주공화제의 헌법 내용을 담았다.

비록 임시정부일 망정 유사 이래 처음으로 민주공화제 정치체제를 채택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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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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