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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서울 롯데월드타워 전망대 '서울스카이'에서 바라본 송파구 일대 아파트 단지.
 사진은 서울 롯데월드타워 전망대 "서울스카이"에서 바라본 송파구 일대 아파트 단지.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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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는 베이비부머 세대다. 집집마다 많은 아이가 태어났고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는 초등학교를 거쳐 직장인이 될 때까지,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고 직장을 잡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특별한 재주가 없어도 취직은 수월했다. 직장을 잡음과 동시에 결혼하는 것이 그 시절의 풍속도였다.

성인이 된 여자가 만 나이로 스물넷이 지나면 부모님들은 결혼을 걱정했다. 선자리를 마련하고 빨리 짝을 만들어 주려고 이곳저곳에 말을 건넸고, 그렇게 치우는 것이 부모님 세대가 자식을 위해 하는 마지막 역할로 생각하셨던 것 같다.

남편과 나는 한 살 차이였다. 어른들의 기준으로, 나는 좀 늦은 시기에 남편은 좀 이른 시기에 결혼했다. 직장을 잡을 수 있으니 살림은 차차 마련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집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셋방에서 시작해서 키워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열한 번째 이사 

정말 작은 월세방에서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해서 10년간 열 번의 이사를 했다. 열 번째 집에서 3년을 살았고 열한 번째의 이사에서 지금의 집으로 이사와 정착한 것이 20년이 되어간다.

10년간 열 번. 매년 규칙적으로 이사한 것은 아니었다. 월세를 내지 못해서 월세 보증금을 까먹고 3개월 만에 이사하기도 했고, 근근이 마련했던 돈으로 계약한 전세의 꿈은 이중계약이라는 사기의 피해자가 되어 어이없이 쫓겨나기도 했다. 보증금은 적게 월세도 숨넘어가지 않을 만큼 내며 살았던 일곱 번째인가 여덟 번째의 집에서는, 주인이 사업에 실패해서 살던 집이 경매로 넘어가는 일도 있었다. 경매에서 낙찰받은 주인은 곧바로 이사를 나가 줄 것을 강하게 요구하기도 했다.

당장 가진 보증금으로 갈 수 있는 곳도 없었지만, 보증금을 보장해 주는 것도 담보할 수 없었다. 월세 보증금치고는 금액이 커서 월세가 비교적 싼 집이었다. 이사 오고 일 년도 안 지난 시점에 다시 이사해야 한다는 사실이 진저리가 쳐졌다. 그곳에서 집을 마련할 때까지 어떡하든 버텨보려고 애를 썼지만 쫓겨나다시피 그곳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경매라는 세상을 그때 처음 알게 됐다. 사는 사람에게는 우편으로 '경매가 이루어진다'는 통보가 왔을 뿐, 싸게 낙찰받은 사람은 우리가 들어왔을 때의 보증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법적으로 보장된 세대당 얼마간의 금액을 제외하고는 추가 비용 없이 세입자를 내보내는 것이 목표였다. 그들의 집요함과 지독함을 원망했다.

확정일자를 받아야 하는 것이나, 전세 등기는 몰라도 월세 보증금에 대해 등기를 해놓는 것은 있었던가? 당시에는 아마도 월세 보증금 등기는 법적으로도 보장된 것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전세금에 대한 등기도 집주인들이 기피하던 시절이었다. 그 모든 걸 차치하고라도 우리는 부동산 관련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맥없이 쫓겨나지 않으려고, 적어도 우리가 맡긴 보증금은 받으려고 버티는 시간 동안 집 없는 사람의 설움이 폭발했다. 힘든 시간을 남몰래 삭이기도 했다. 내쫓으려는 사람과 버티는 사람의 팽팽한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고 버텨보려고 목소리를 키울수록 마음은 쪼그라들었던 시절이었다. 그들과 대치해야 하는 내일이 두려운데 나가 달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영락없이 찾아왔다. 목소리에 협박과 여유가 같이 묻어 나왔다.

집을 장만한다는 것이 꿈같던 시절이었다. 내 집이 어딘가에 있기는 할까 생각했다. 두 아이를 데리고 갑작스러운 이사 걱정 없이 살 수만 있어도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사연 많은 10년을 보냈다.

집이라는 둥지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축 덕분이었다. 가난한 살림에도 저축은 희망을 쌓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조금씩 불어나는 통장은 기쁨이었다. 만 원씩이든 천 원씩이든 은행에서 출시한 상품별로 저축을 했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통장 개수가 많아지는 것이 부자라도 된 듯한 느낌이었고 미래를 보장해 준다고 믿었다.

그렇게 모은 돈에 대출금을 합쳐 서울을 벗어난 곳에 15평 빌라를 장만했다. 처음에 흡족하게 한눈에 들어왔던 것과는 달리 장마철을 넘기며 낡고 허름한 모퉁이 틈새로 빗방울이 서너 군데에서 똑똑 떨어졌고 비가 그치면 그대로 얼룩이 되었다. 지붕에 방수액을 바르고 군데군데 새 벽지를 바르고 하는 것을 매년 했다. 

겨울엔 한파에 보일러가 터지기도 했고, 웃풍이 세서 어린아이들 목욕 때마다 따로 난방기구를 틀어야 했다. 집안 전체가 훈훈한 친척의 집에 가면, 우리 가족들은 모두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추위에 단련된 얼굴이 더운 기운에 반응하는 것이었다. 외에도 이런저런 자잘하게 손 가는 것들이 많았지만, 내 집이라는 생각에 할 수 있었던 수고였다.

그곳에서 3년을 살며 다시 비어있던 통장의 수와 금액을 키웠고 신도시의 오래된 아파트를 다시 대출을 껴서 살 수 있었다. 당시 아파트를 사게 된 것은 국가에는 불운이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행운이 따라서였다. IMF를 겪으며 집값이 폭락한 후 반등하기 직전이었다. 부동산 투자라는 것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지만 결혼하고 나서의 긴 고생에 비하면 비교적 많이 늦지 않게 장만한 아파트였다.

그렇게 오래된 신도시의 아파트를 장만했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 삶의 굴곡이 있어서 여전히 대출금은 남았지만 누가 뭐래도 지금 이 집은 우리 가족의 든든한 둥지다.

여러 집을 거치며 부동산 관련 법이 내게 도움이 된 기억은 없다. 보증금 얼마에 월세방은 법에서 크게 중요한 것 같지 않았다. 집을 사고팔 때 비로소 법이 나와 관련이 있었다. 그것도 중개 거래하는 분의 도움과 지인들이 건네는 한 마디가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부동산 관련 사항은 사안마다 모두 개별적이라고 생각한다. 법안은 공통분모를 담고 있지만, 개개의 사연은 각각 다르다. 상황이 다르고 집을 매개로 만나는 사람들도 다르다. 정작 필요한 순간에 법은 너무 멀었고, 법의 범위를 교묘하게 피하는 사람들에게는 법의 잣대를 적용할 수 없었다. 혹 있었다 하더라도 법은 어렵고 법 앞에 마음은 무거웠다.

종부세도 이중 주택에 대한 과세도 우리에겐 다른 세상의 일이다. 양도세나 보유세도 우리와는 크게 관련이 없다. 경기도 부천의 대출을 낀 소박한 아파트 한 채는 논란이 되는 법에 예민할 필요가 없다. 내가 사는 아파트도 20년간 3배가 좀 넘게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이 아파트를 팔고 다른 곳에 간다면 서울에서는 전세금도 마련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오른 아파트값은 의미가 없다.

부동산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럽다. 주택 보급률은 100%를 넘었다고 한다. 누구나 있어야 하는 집이 그렇지 못한 것은 누군가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법은 그들을 제재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태그:#부동산, #월세, #보증금, #경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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