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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바이러스가 세상을 침탈하기 이전 시절. 우리는 해마다 벚꽃 휘날리는 봄을 기다렸다. 그 봄이 올해는 사라졌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세상을 침탈하기 이전 시절. 우리는 해마다 벚꽃 휘날리는 봄을 기다렸다. 그 봄이 올해는 사라졌다.
ⓒ 조경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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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참담하고 막막한 날들이 또 있었던가? 오십이면 많지는 않지만 적지도 않은 나이다. 그 50년 세월 동안 '2020년' 같은 건 겪어보지 못했던 것 같다.

개인의 문제가 아닌 느닷없이 이 땅, 아니 인간이 사는 지구 전체에 밀어닥친 '코로나19'라는 병원균 탓이다. 초대받지 않은 공포스럽고 몰인정한 바이러스.

벌써 몇 개월째 거리엔 우울한 눈빛 아래로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이 멀찌감치 서로를 피해 다니고, 평소 점심과 저녁을 먹던 식당엔 손님이 드물다. 가게 주인들은 "전기요금도 못 낼 지경"이라고 한다.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던 3~4월엔 택시기사들 역시 "이대로라면 병으로 죽는 게 아니라 굶어 죽을 판"이라는 하소연을 했고.

매서운 추위에 이어 봄이 오고 여름이 한창이건만, 여전히 한국만이 아닌 세계 대부분의 도시가 디스토피아를 다룬 SF영화 속 장면처럼 어둡고 눅눅해 보인다. 앞으로도 내내 이 '수난'이 끝나지 않는 건 아닐까 의심하는 이들까지 생겼다. 비관과 불안이 사회를 야금야금 파먹고 있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서 봄을 빼앗아 갔다. 세월이 오래 지나 돌아봐도 2020년의 봄을 기억하지 못할 듯하다. 봉오리를 터뜨린 매화 아래 사람들이 몰리고, 난분분 꽃잎 휘날리는 벚나무의 개화를 해마다 기다렸건만, 올해는 그런 빛나는 날이 타의에 의해 생략됐다.

일상은 무너지고, 웃음은 사라졌으며, 사람들간의 어울림의 즐거움은 자취를 감췄다. 꽃과 꽃을 피우는 나무에 대한 찬사와 동경이 사라진 것. 그런 상황이 7월 현재까지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영화 <희생>을 보던 날 밤이 떠오르고...

19세기를 대표하는 표상주의 작가 로트레아몽(1846~1870)이 쓴 시 중에 '나무'라는 게 있다. 너무나 짧아서 역설적으로 길고 강렬한 울림을 주는 작품. 단 한 줄의 노래다.

'나무는 자신의 위대함을 모른다.'

겨우 하나를 알면서 열을 아는 것처럼 목소리 높이던 문학청년들을 한없는 자기반성 속으로 이끌었던 시. 그들에게 의문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나무가 왜 위대한가?" 많은 이들이 대답을 찾고자 골몰했다.

나 역시 궁금했다. 그때 만난 영화가 러시아의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1932~1986)의 <희생>이었다. 거기엔 고사목(枯死木)에서 꽃이 필 것임을 믿는 아버지와 아들이 등장한다. 아들은 언어 상실증에 걸려있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 그러나, 너는 침묵하는구나. 마치 말 없는 철갑상어와 같이…"라는 아버지의 독백으로 시작해 마침내 입을 연 아들의 "태초에 말이 있었다죠. 그런데 그 말이 무엇이었을까요?"라는 질문으로 끝나는 영화.

여기서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불어오는 바람과 떠가는 구름, 흐릿한 햇살과 강물의 흐름까지를 미세하게 포착해 영상에 담아낸다. 특히 말라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부자(父子)의 모습은 감동과 눈물을 부른다.

영화라기보다는 연극에 가까운 롱 테이크 화면, 오차 하나 없는 밀도 높은 카메라의 섬세한 움직임, 시나리오 속에 내포된 강렬한 메시지는 <희생>을 빼어난 문학작품으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실에서 맛본 좌절감으로 인해 삶에서 희망을 찾기 힘들었던 20세기 말의 청년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함께 그들을 위로한 건 이성부(1942~2012)였다. 아니, 그의 시 '봄'이었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그래도 놓치지 말아야 할 희망과 생명을 향한 경외

영화 <희생>의 마지막 시퀀스는 이렇다. 언어를 잃었던 아이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죽은 나무에 물을 주던 아버지를 떠올린다.

어떤 극악한 상황에서도 놓치지 않았던 목숨과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 메말랐던 가지 가득 푸른 잎사귀를 단 나무 아래 평화롭게 누워있는 나른한 꿈. 너와 내가 잊었지만 엄연한 청사진. 포기할 수 없는 미래의 꿈.

맞다. 그랬다. 곧 멸망할 것이라던 위기의 세상과 아들을 구한 건 죽은 나무의 생명조차도 구원과 부활의 대상으로 믿었던 아버지의 꿈이었다. 절망과 비탄, 눈물과 원망을 반복하는 생일지라도 포기할 수 없는 희망. 이것이 인류를 오늘의 삶으로 이끌어 왔다. 누가 그 엄연한 사실을 부정하겠는가?

그래서다. 타르코프스키가 영상을 통해 전한 것과 거의 같은 메시지를 시인 이성부의 문장에서도 읽는다. '꽃'과 '나무'가 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이성부는 바이러스 횡행하는 2020년을 마치 예언이나 한 듯 시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한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고. 그리고 연이어 그 고통과 수난을 이렇게 진단한다. 어느 순간 인간이 살아간다는 건 "뻘밭 구석이거나/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라고.

하지만 시는 '절망의 진단'만에서 끝나지 않는다. 전망을 향해 나아간다. 이런 대목이다.

"너를 보면 눈부셔/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지금으로부터 한 세대 이전을 살아온 문인들은 말했다. "시는 추락하는 것의 슬픔이 아닌, 추락을 거부하는 이들의 전망을 노래해야 한다"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올해는 봄이 없었다. 습기 가득한 침침한 거리,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불신의 시간을 견디는 시민들, 갑갑한 마스크 속에서 말을 잃은 이들의 두려움, 격리된 코로나19 환자들을 보며 정부조차 믿기 힘들었던 연약해진 마음.

그러나, 사람이 '희망'과 '생명'에 대한 외경을 잃어버린다면… 그건 앞서 언급한 모든 비극적 인식보다 더 위험할 터. 그래서다. 아직은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이성부의 시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읽고 보며 얻은 깨달음을 버리지 않길 바란다. 아무리 짙은 어둠 속에서 꽃은 피고, 빛나는 시간은 다시 온다. 그 믿음이 우리를 살아있게 했다."

이 깊어진 여름에 절 멀리 떠나간 봄을 떠올리게 되다니.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무섭긴 무서운 녀석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에 게재된 것을 일부 보완한 것입니다.


태그:#봄, #안트레이 타르코프스키, #희생, #코로나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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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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