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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치하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선 김일성장군 만세 선전아치.
 인공치하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선 김일성장군 만세 선전아치.
ⓒ NARA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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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국군은 수도 서울을 사흘 만에 내줬을까? 

나는 그저 평범한 교사였다. 그렇게 30여 년을 살아왔다. 그런 중 1999년 여름방학 때에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중국 대륙에 흩어진 항일유적지를 2주간 답사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와 동행한 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 후손 이항증(전 광복회 경북지부장) 선생과 무장투쟁론자인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 선생 후손인 김중생 선생이었다.

그때 독립운동사에 까막눈이었던 나는 두 분의 알뜰한 안내로 베이징, 상하이 그리고 동북 삼성의 여러 항일유적지를 샅샅이 돌았다. 그제까지 몰랐던 독립운동사에 비로소 눈을 뜨게 됐다.

경북 구미 태생인 나는 고향 선배 만주군 장교 박정희만 알았지 박정희 생가 앞 동네 구미 임은동의 왕산 허위 13도 군사장은 까마득히 모른 채 그동안 교사네, 작가네 하면서 살아왔다.

그런 가운데 하얼빈 동북열사 기념관에서 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겸 총참모총장 허형식 장군을 고향사람으로 알게 된 이후 그 부끄러움에 독립운동사 문헌을 들췄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을 만나던 가운데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까지 가게 되고 거기서 6.25전쟁 사진을 발견해 이를 수집해 국내에 알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어려서 겪은 6.25전쟁을 주제로 한 장편소설을 쓰고자 전쟁사 공부를 본격적으로 했다. 그때 내가 모은 자료는 수십 권에 이르는데 <정일권회고록>, 박태균의 <한국전쟁>, 백선엽의 <군과 나> <나를 쏴라>, 정명복의 <6.25전쟁사>,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 등의 6.25전쟁 관련 문헌을 읽은 뒤 장편소설 <약속>을 집필했다. 

내 의문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군 수뇌부가 시민들에게 걸핏하면 "우리는 3일 내로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라고 큰소리쳤는데 왜 전쟁 발발 사흘만에 수도 서울을 고스란히 적에게 내줬는가였다. 

전방 사단장, 서울에 살림집을 두다

그 답을 두 권의 책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한 권은 <조선의용군의 밀입북과 6.25전쟁>(김중생 지음)이요, 또다른 한 권은 <군과 나>(백선엽 지음)였다.

먼저 김중생 선생은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 선생 손자로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에서 태어나 취원장에서 자랐다. 주하현(현 상지현) 조선중학교를 다닌 후 1950년 북한 인민군에 입대해 제6사단에서 간부로 참전, 1989년에 영주 귀국했다. 

그분은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할아버지 고향은 경북 안동이다. 그래서 그분의 저서는 6.25전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분이 복무했던 인민군 제6사단(사단장 방호산)은 6.25전쟁 당시 서울 주공격 부대였다. 그에 맞선 국군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은 서부전선을 지켰고, 수도 서울 방어 최전선을 맡고 있었다. 
 
6.25전쟁 당시 백선엽 소장
 6.25전쟁 당시 백선엽 소장
ⓒ NARA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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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경, 사단 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으로부터 숨이 넘어갈 듯한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받은 6.25전쟁의 1보였다. 당시 나는 육군대령으로 1사단을 맡고 있었다. 1사단은 38선에 배치된 4개 사단 중 좌익사단으로 황해도 청단, 연안, 배천을 거쳐 경기도 개성, 장단, 고량포, 적성에 이르기까지 90킬로미터의 광범위한 정면을 수비하고 있었다. ... 6.25 발발 당시, 나는 (서울) 신당동에서 처와 두 돌 지난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 백선엽 <군과 나> 32~33쪽
 
 
 
인민군 제6사단장 방호산
 인민군 제6사단장 방호산
ⓒ 김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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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조선의용군)은 간고한 항일전쟁을 거쳤고, 국민당군과 대결한 국공 내전에도 참가하여 산악전, 평야전, 도서전, 가도전 등에 능숙한 전쟁 고참들이었다. 그들에 비해 전혀 전쟁도 해보지 않았고, 총대도 제대로 쥐어보지 못한 남한국군으로서는 게임이 되지 않았으니 자연 밀릴 수밖에 없었다." - 김중생 <조선의용군의 밀입북과 6.25전쟁> 19쪽
 
 
"방호산(方虎山) : 일명 이천부, 1913년 함경도 출생. 만주사변 후 흑룡강성 밀산 지역에서 공산당 항일유격대에 참가 … 1949년 7월 166사를 인솔하여 밀입북, 6사단장으로 6.25전쟁 참전(공화국 영웅칭호와 제6사단의 근위 사단 칭호를 받음). 황해도 각지로 분산 배치된 6사단은 1950년 6월 38선으로 이동하게 된다." - 김중생 <조선의용군의 밀입북과 6.25전쟁> 175쪽

이 문헌을 비교 검토하면, 38선을 경계로 국군 제1사단과 인민군 제6사단이 맞서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사단장의 출신을 보면 한편은 일제 간도특설대 장교요, 다른 한 편은 항일유격대 출신이다. 둘이 전선에서 맞붙었을 때 사단 휘하 병사들의 사기는 어땠을까?

더욱이 수도 서울의 방어를 책임진 일선 사단장이 전선이 아닌, 서울 안쪽 살림집에서 살고 있었다. 현대전에서 전쟁 발발 3시간 뒤에야 급보를 받았는데, 이런 부대가 어찌 수도를 방위할 수 있었을까. 더 이상 무슨 변명이 있을 수 있으랴.

군에서 전역을 한 백선엽과 그의 동생 백인엽은 사학재단을 세웠다. 선인학원이다. 이 재단의 부정부패와 횡포가 오죽했으면 박정희 대통령이 대노해 선인학원을 헌납케 했을까.
  
저승에서 불편할 독립지사 선열들
 
국립묘지 독립지사 묘역.
 국립묘지 독립지사 묘역.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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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흘렀고, 숱한 논란의 가운데 있었던 백선엽은 지난 15일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다. 그곳에는 수많은 독립지사들의 묘지도 있다. 그 선열들은 지난날 자신에게 총부리를 겨눴던 백선엽을 곁에 두게 된 셈이다. 

'좋은 게 좋다'고 어물쩡 넘어가는 것이 후손의 도리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민족정기'와 국립묘지의 '품위'를 위한 정부의 적절한 대응책이 필요하다.

정부가 국립묘지를 하나로 정리·정화시킬 자신이 딱히 없다면, 국립묘지를 따로 만들라고 주문하고 싶다. 친일 이력이 있지만 다른 공적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있는 이들의 묘지와 독립지사를 위한 묘지를 구분하자는 이야기다. 그게 선열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 아닐까. '대한민국 국립묘지'의 품위를 위한 정부의 현명한 결단을 촉구하는 바다.
 
고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 안장식이 15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렸다.
 고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 안장식이 15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렸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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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국립묘지, #백선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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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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