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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자환 감독은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레드툼>을 제작해 28일 저녁 창원축구센터 관리동 3층 강당에서 시사회를 갖는다.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레드툼> 스틸컷
ⓒ <레드툼> 자료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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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7월이면 전국 곳곳이 울음바다가 된다. 수십년 전 국가의 민간인 학살로 억울하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곡소리다.

이승만 정부는 6.25 한국전쟁이 터지자마자 제일 먼저 국민보도연맹(아래 보도연맹) 가입자에 대한 처형명령을 내렸다. 북한군에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보도연맹은 과거 좌익에 몸담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가입시켜 만든 단체인데, 건수를 올리려는 실적주의 때문에 좌익활동과 관련 없는 사람들도 많이 포함됐다. 어찌됐든 정부는 가입하면 '국민'으로 받아들여준다고 했지만, 실상은 요시찰대상 또는 죄 없는 민간인들의 살생부가 된 것이다.

7월 보도연맹 사건 등 민간인 희생자 추모제가 열리는 곳마다 불리는 노래로는 '여수부르스', '산동애가', '부용산 노래' 등이 있다. 모두 민간인 희생자들의 한을 위로하고 있다. 하지만 60년 전 전국 유가족들이 공식 채택한 추모가 '맹서하는 깃빨'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유가족 내에서도 많지 않다. 

국가에 가족 빼앗긴 이들이 부르는 노래
 
무덤도 흔적도 없는 원혼들이여
천년을 두고 울어주리라
조국의 산천도 고발하고
푸른 별도 증언한다
가자 서로가 아는 것이 큰 힘
우리는 피학살자의 아들딸이다
   
1960년 10월 20일 전국피학살자유족회결성대회에서 전국피학살자유족회 노래로 채택한 '맹서하는 깃빨'의 가사 중 일부다. 이 노래의 작사자는 몽재(夢齋) 이원식(1917~1977)이다.
 
 이원식, 권태호 작곡의 ' 맹서하는 깃빨' 악보
 이원식, 권태호 작곡의 " 맹서하는 깃빨" 악보
ⓒ 이광달(이원식 아들)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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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제강점기 일경에 '갑종 요시찰'로 지목돼 5차례나 수감돼 고문으로 생사를 넘나들어야 했다. 대구사범사회과학연구회, 경북교육노동자동맹 비밀결사 활동, 문맹퇴치운동, 계몽운동, 노동운동을 벌이며 항일·반제 투쟁으로 일제와 맞섰다. 그는 한국 최초의 서지학자로 알려져 있다. 본래 직업은 의사 겸 한의사였다.

해방 후에는 1946월 10월, 대구항쟁을 주도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에 가입한 이원식을 '인민군에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예비검속 대상자로 지목했다. 이씨가 피신하자 이승만 정부는 이씨 대신 그의 부인인 정정희(29)를 붙잡아 대구 달성군 가창 골짜기에서 학살했다. 전국 곳곳에서 이씨의 부인과 같은 '무덤도 흔적도 없는 원혼들'이 늘어났다.

전쟁이 끝났지만, 누구도 억울한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했다. 그해 10월 피학살자유족회가 결성됐다. 전국 각지에서 유해 발굴도 줄을 이었다. 유족들은 "조국의 산천도 고발하고 푸른 별도 증언"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이원식은 억울한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고 진상조사를 위해 대구경북피학살자유족회 회장(전국 피학살자유족회 사정위원장)을 맡았다. 유족들은 '맹서하는 깃빨'이 선보이자 몸부림치며 목 놓아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아닌 절규였다. 지역사회는 물론 국회도 진상조사에 나섰다.

남은 자들의 증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60년 6월, 경북지구피학살유족회결성대회 모습. '산천도 고발하고 푸른별도 증언한다'는 노랫말이 새겨있다.
 1960년 6월, 경북지구피학살유족회결성대회 모습. "산천도 고발하고 푸른별도 증언한다"는 노랫말이 새겨있다.
ⓒ 이광달(이원식 아들)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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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듬해 박정희 군사정부가 들어서자 상황이 반전됐다. 전국유족회가 해산됐다. 피학살자의 합동 무덤은 파헤쳐졌다. 유족회 간부들은 체포 검거됐다. '유족회 결성이 북한의 활동을 고무, 찬양, 동조한 행위'(반국가행위)라는 게 당시 군사정부의 판단이었다.

정부는 '특수범죄 처벌법'이라는 소급법을 만들어 유족회 간부들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이원식에게는 사형이 선고(1962년)됐다. 그는 10년의 옥고를 치른 뒤 1970년 3월 출옥했지만 1975년 사회안전법으로 2년간 또 갇혔다. 그는 출소 직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1977년 사망했다.

2010년 재판부는 유족회 활동 관련 재심에서 이씨 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50년 만이었다. 판결 당시 대법관은 '국가를 대신해 피해 유족에게 사과한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전국의 민간인희생자유가족들은 '맹서하는 깃빨'을 부르며 정부에 진상조사를 요구해야 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지난 5월, 인권침해 사건의 진상규명을 골자로 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개정안은 2010년 활동이 끝난 과거사정리위원회를 재가동해 이전 과거사위 활동에서 마무리하지 못한 과거사를 다시 조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형제복지원 사건뿐만 아니라 6.25 민간인 학살사건 등도 포함된다. 피해 신고 기간은 2년, 조사 기간은 4년으로 했다. 

'맹서하는 깃빨'은 이제 이원식의 아들 이광달(80, 조각가)이 부르고 있다. 노래 악보에는 "보통 박자로 비장하게" 부르라고 표기돼 있다. 과거사위의 재조사로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이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될 날이 곧 오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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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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