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피렌체 삐딱하게 보기'는 피렌체와 르네상스를 건축, 종교, 정치권력 등 다양한 각도로 조명해 보려는 연재입니다. 이번에는 '르네상스의 라이벌'을 몇 편을 통해 다룹니다.[기자말]
이전 기사 '황당한 이유 때문에 실패한 쿠데타'(http://omn.kr/1oa0w)에서 이어집니다.

추기경의 수행원으로 변장한 무장병력들이 피렌체 안으로 무사히 들어왔을 때만 해도 계획은 성공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작은 오류가 쌓여 결국 실패하고 만다. 메디치 입장에서는 다행이었겠지만, 음모자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한스러웠을까?

줄리아노가 별장의 만찬에 참석했다면? 칼을 휘둘러 본 적 없는 수도사가 아니라 몬테세코와 그의 병사들이 칼을 잡았다면 어땠을까? 만약 줄리아노가 로렌초와 함께 대성당에 도착해 가까이 앉았다면? 그랬다면 공격이 분산되지 않아 둘을 한 번에 처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뿐인가. 프란체스코는 자신의 허벅지를 찌르지 않고 살비아티의 멍청한 병사들도 스스로 갇히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도 아니면 성벽 밖에 준비해 두었던 두 개의 용병 부대가 계획대로 피렌체로 진격했어야 했다. 그러면 전세를 역전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경보가 울리자 일찌감치 돌아가 버렸다.

무엇보다 피렌체 시민들의 정서를 제대로 판단했어야 했다. 음모자들은 시민들이 자신들에게 동조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인민과 자유'라는 구호에 '아바소 레 팔레(Abasso le palle, 팔레 타도)'로 화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는 '비바노 레 팔레(Vivano le Palle, 팔레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쿠데타 실패의 원인, 시민들의 기회주의
 
 팔레는 구(球)라는 뜻으로 메디치 가문을 가리킨다. 이 공 모양의 상징과 메디치(Medici)라는 이름 때문에 이 가문의 조상이 약재상(Medicine)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이건 훗날 프랑스 왕비가 된 카트린 데 메디치를 폄하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만든 얘기다.
▲ 메디치 가문의 상징  팔레는 구(球)라는 뜻으로 메디치 가문을 가리킨다. 이 공 모양의 상징과 메디치(Medici)라는 이름 때문에 이 가문의 조상이 약재상(Medicine)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이건 훗날 프랑스 왕비가 된 카트린 데 메디치를 폄하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만든 얘기다.
ⓒ 박기철

관련사진보기

   
당시 시민들이 파치에 동조하지 않았던 이유를 메디치에 대한 존경과 신뢰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는 승리한 메디치의 관점에서만 해석하는 것일 수 있다.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외국보다 우리나라의 자료는 유독 메디치 가문의 좋은 점만을 부각하는 시각이 강한 것 같다.

코시모 때부터 정부 요직에 메디치 사람들을 배치하여 피렌체를 허울뿐인 공화국으로 만든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전통 귀족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반메디치 정서가 꽤 퍼져 있었다.
 
쿠데타가 일어난 처음 두어 시간 동안 메디치파 무장세력이 길거리에 나가서 반란자들을 격퇴하거나 저지하려 한 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로렌초와 메디치를 좋아한다는 도시에서 어째서 그랬을까?
- (라우로 마르티네스 지음, <메디치가 살인사건의 재구성>, 김기협 옮김, 푸른역사, 207쪽)
 
이 사건과 관련된 자료들을 보다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그것은 당시 치안을 담당하던 공권력, 즉 경찰 병력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건 직후 등장하는 공권력은 청사 방어를 위한 위병들 뿐이다.

국가 비상사태를 알리는 경보가 울리면 사법 기관을 관장하는 행정장관(Podesta)은 즉시 병력을 이끌고 시뇨리아 광장으로 와야 했다. 하지만 야코포가 위병들의 저항에 막혀 도망칠 때까지 그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당시 6개월 임기의 행정장관은 외국인을 임명했다. 가문들 간의 다툼이 극심하던 시절, 어떤 가문과도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 사법부를 관장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쿠데타가 터졌을 때 행정장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6개월 임기의 외국인이 굳이 사건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지원 병력을 기다렸다는 주장도 있지만, 어쨌든 위병들이 힘겹게 적을 막아내고 있을 때 행장장관과 경찰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대세가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 관찰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파치에 동조하지 않은 것은 누가 승자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위에서 인용한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이기는 편이 내 편'이었다. 물론 이런 혼란 속에서 몸을 사리는 건 당연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음모자들이 피렌체인들의 이런 특성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몇 시간이 지나서 쿠데타 실패로 대세가 기울자 시민들도 입장을 정하고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절대 악이 된 파치에 대한 응징을 빌미로 숨겨뒀던 폭력성을 마음껏 내뿜었다. 피의 4월이라 불리는 잔혹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1478년 4월 26일 오후

야코포의 병력이 시뇨리아 광장에서 패퇴하자 정부 수반 페트루치는 팔인회를 소집했다. 팔인회는 범죄를 수사하고 처단하는 위원회였다. 문서 보관소에 갇혔던 페루자 출신의 용병들은 모두 살해당해 팔라초 베키오 창밖으로 던져졌고 광장은 피바다가 되었다.

곧이어 자신의 저택에서 허벅지 상처 치료를 위해 발가벗고 있던 프란체스코가 그 모습 그대로 체포되어 끌려왔다. 팔인회는 그와 살비아티 대주교를 비롯한 죄수들을 심문했다. 곧 사형 판결이 났고 즉시 집행되었다.

동쪽 성벽 밖에 공식적인 처형장이 있었지만, 죄수들은 목에 밧줄이 감겨 시청사 창문 밖으로 내던져졌다. 프란체스코는 발가벗겨진 채였고 살비아티는 매달린 채 한참 동안 고통스럽게 발버둥 치다 숨을 거두었다.
  
  공식 처형장이 있었지만 죄수들은 저 창문에서 목매달렸다. 이를 본 시민들은 더욱 흥분했는데 이는 정부가 의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살비아티가 목매달린 모습을 스케치로 남기기도 했다.
▲ 팔라초 베키오의 창문  공식 처형장이 있었지만 죄수들은 저 창문에서 목매달렸다. 이를 본 시민들은 더욱 흥분했는데 이는 정부가 의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살비아티가 목매달린 모습을 스케치로 남기기도 했다.
ⓒ 박기철

관련사진보기

 
도망쳤던 병사와 다른 죄수들도 잡히자마자 사형 판결을 받았고 속전속결로 형이 집행되었다. 이는 법 절차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죄수들은 경찰 본부였던 바르젤로 창문에 목을 매달았다.

목매 달린 죄수들의 모습에 시민들은 더욱 흥분했고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그들은 정의를 구현한다며 파치의 모든 것을 부수고 약탈했으며 파치와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내 살해했다. 이때 파치와 상관없이 이 기회를 틈탄 개인적인 복수도 자행되었다.

군중들은 시체에 밧줄을 걸거나 창을 꽂아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 버렸다. 개들은 버려진 시체를 뜯었다. 며칠 뒤에 붙잡힌 야코포도 똑같은 일을 당했다. 여기에 정부나 경찰의 제지는 없었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일이 4월 26일 하루 만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날에만 60~80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광란은 이후로도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중심에는 로렌초 데 메디치가 있었다. 그가 직접 지시는 하지 않았더라도 최소한 묵인한 것은 사실이다.

단테가 그토록 사랑했고 레오나르도 브루니가 가장 영광스러운 도시라고 찬양했던 피렌체였지만 이날 만큼은 완벽하게 미친 야만의 도시였다.
 
  과거에는 지금과 달리 두 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었고 치안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지금은 조각 전문 미술관으로 훌륭한 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 바르젤로 미술관  과거에는 지금과 달리 두 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었고 치안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지금은 조각 전문 미술관으로 훌륭한 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 박기철

관련사진보기

 
관용과 포용 대신 공포와 복수, 저무는 르네상스

라파엘레 추기경은 교황의 가족이었기에 몇 주 뒤에 풀려났다. 하지만 교황은 대주교를 처형한 것에 분노해 피렌체 시 전체를 파문해 버린다. 이 와중에도 로렌초는 복수를 멈추지 않았다.

이몰라의 군주였던 지롤라모 리아리오는 사건 현장에 직접 참여하지 않아서 화를 면했다. 하지만 사건이 벌어지고 10년이 지난 1488년 4월에 정적들에게 살해당한다. 그들은 이 소식을 로렌초에게 선물로 주며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자 한다. 로렌초 역시 꾸준히 첩자를 보내는 등 암살 기회를 노려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파치 가문은 그야말로 멸족을 당했고 파치의 모든 흔적은 도시에서 지워졌다. 그만큼 로렌초의 복수는 집요했다.

이제 메디치는 옛날과 달라졌다. 과거의 메디치는 시민들의 편이었고, 적에게도 관용을 베풀었다. 사람들은 길에서 메디치를 만나면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고 자신들의 어려움을 하소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 로렌초는 항상 무장 호위병을 거느리고 다녔다. 시민들에게 메디치는 법 위에 존재하며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공포의 대상이자 군주로 인식되어 갔다. 겉으로나마 유지되던 공화정은 끝났다.

물론 로렌초는 예술과 철학에 대한 지원을 계속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메디치의 비위를 거슬러서는 안 되고 메디치의 위대함을 찬양해야 했다. 자연히 르네상스의 핵심인 자유로운 시민 정신은 점차 시들어갔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이때부터 피렌체 르네상스가 저물기 시작했다고 보기도 한다. 이렇게 피렌체를 떠난 르네상스는 로마와 베네치아를 거쳐 알프스 이북으로 올라간다.
  
  파치 가문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곳으로 산타크로체 수도원 안에 있다. 피렌체에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파치의 흔적이다. 오래된 전통 귀족가문 파치는 쿠데타 실패 이후 철저하게 그 흔적이 지워졌다. 사람들은 파치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도 조심해야 했다.
▲ 파치 예배당  파치 가문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곳으로 산타크로체 수도원 안에 있다. 피렌체에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파치의 흔적이다. 오래된 전통 귀족가문 파치는 쿠데타 실패 이후 철저하게 그 흔적이 지워졌다. 사람들은 파치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도 조심해야 했다.
ⓒ 박기철

관련사진보기

 
[참고자료]
- 라우로 마르티네스, <메디치 살인사건의 재구성>, 김기협 옮김, 푸른역사
- 팀 팍스, <메디치 머니>, 황소연 옮김, 청림출판
- G.F.영, <메디치>, 이길상 옮김, 현대지성
- 마테오 스트루쿨, <권력의 가문 메디치2>, 이현경 옮김, 메디치미디어
- 레오나르도 브루니, <피렌체 찬가>, 책세상

- 김태권, <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한겨레출판

태그:#피렌체, #파치가의 음모, #바르젤로, #메디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