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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위르 사무실은 입구부터 그림과 글씨로 가득한데, 팔레스타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큰 올리브 나무가 입구에 서 있다
▲ 탄위르 사무실 입구에 서 있는 올리브나무 탄위르 사무실은 입구부터 그림과 글씨로 가득한데, 팔레스타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큰 올리브 나무가 입구에 서 있다
ⓒ 팔레스타인평화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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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최대도시 나블루스에 도착했다. 왁자지껄하면서도 정감 있고, 복잡한 골목길에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줄줄이 들어서 있는 나블루스 올드 시티에 있는 숙소에 짐을 풀고, 나는 '와엘'이 있는 탄위르로 향했다.

채소 가게, 빵 가게, 그릇 가게, 올리브 가게, 비누 가게, 닭집, 시계탑 등을 지나 시장의 끄트머리에 있는 탄위르 사무실에 도착했다. 입구는 아주 평범했지만, 딱 5개의 계단을 지나자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을 알 수 있는 그라피티로 가득한 사랑스러운 곳이었다.
   
안녕, 와엘
   
친구들이 상보를 선물하자 와엘이 익살스럽게 모자냐고 하며 머리에 써보고 있다
▲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가가 선물한 상보를 머리에 써 보는 와엘 친구들이 상보를 선물하자 와엘이 익살스럽게 모자냐고 하며 머리에 써보고 있다
ⓒ 팔레스타인평화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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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블루스에 가기 탄위르의 상임 활동가 '와엘'에 대해 들었다. 친구들이 팔레스타인 이야기를 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 

'와엘이 말이야, 와엘이 도와주지 않을까?, 와엘 사무실에서...'

어떨 때는 와엘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샘 날 정도였고, 계속 듣다 보니 나도 마치 와엘을 아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까지 했었다. 그런 와엘이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수수한 옷차림, 수수한 얼굴, 수수한 표정을 하고. 편안하고 평안한 얼굴과 몸짓으로 와엘이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었다.

와엘을 너무나 그리워한, 함께 간 친구가 '와엘!' 하고 부르자, 와엘은 환한 웃음으로 '야핑'하고 부르며 덥석 친구를 안았다. 두 사람의 모습에서 반가움과 그리움의 정이 듬뿍 묻어나는 걸 절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와 친구 자인도 드디어 와엘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안을 수 있었다.
   
와엘은 나블루스에 오면 크나파를 먹어야 한다며 우리가 도착하자 크나파 가게로 데리고 갔다
▲ 나세르, 유세프, 와엘과 크나파 먹는 친구들 와엘은 나블루스에 오면 크나파를 먹어야 한다며 우리가 도착하자 크나파 가게로 데리고 갔다
ⓒ 팔레스타인평화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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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엘은 "나블루스에 왔으면 크나파를 먹어야지"하며 우리를 크나파 가게로 데리고 갔다. 늦은 시간이라 많은 가게가 문을 닫았고, 우리는 번화가 한 곳의 문을 연 크나파 가게에서 얼떨결에 크나파 한 접시씩을 받았다.

처음 먹어 보는 크나파. 함께 갔던 탄위르 활동가 나세르와 유세프가 테이블을 정리하고 우리를 편하게 앉게 해줬다. 크나파 가루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테이블마저 정겹게 느껴졌다. 와엘과의 만남이 처음이었지만, 눈 딱감고 "하나 더 먹어도 되나요?"하고 묻고 싶을 만큼 크나파는 맛있었다.
       
나블루스에 있으면서 가장 많이, 가장 자주 만난 사람은 와엘이었다. 누구를 만나고 싶다든지 무슨 활동을 하고 싶다든지, 심지어는 택시를 잡고 싶다는 사소한 일까지 와엘에게 말하면 무엇이든 이루어졌다.

코로나19로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을 때도 와엘은 우리가 가르쳐준 한국어로 '밥 먹었어? 가족들은 잘 지내?'하고 전화를 걸어왔다. 정이 느껴지는 그의 진심에  눈물을 왈칵 쏟기도 했다.
   
"바다에 가고 싶어" 와엘의 소원 
     
한국어로 간단한 인사와 안부를 배우는 와엘의 모습이 진지하다
▲ 열심히 한국에 배우는 와엘 한국어로 간단한 인사와 안부를 배우는 와엘의 모습이 진지하다
ⓒ 팔레스타인평화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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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길을 걸으며 친구 뎡야핑이 이런 말을 했다.

"와엘은 바다를 정말 좋아하고 보고 싶어 하는데 바다를 보러 갈 수 없는 처지야. 어느 날 와엘이 나에게 '야핑, 네가 나 대신 바다에 가 줄 수 있을까? 실컷 보고 나에게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어'라고 하더라고."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사람이 그렇듯, 와엘도 팔레스타인을 군사 점령한 이스라엘에 저항하는 활동을 하다가 여러 차례 감옥에 다녀왔다. 저항 운동으로 감옥에 다녀온 팔레스타인 사람의 경우, 외국은 고사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조차 할 수 없다.
  
이스라엘은 7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 지역을 군사 점령해왔으며,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인권은 지금까지 심각하게 유린당하고 있다. 와엘 역시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 점령이 끝나지 않는다면, 평생 나블루스를 벗어날 수 없으며 외국에도 갈 수 없다.

와엘은 언제쯤 바다를 볼 수 있을까? 언제까지 와엘 대신 친구들이 바다를 보러 예루살렘에 가고, 하이파에 가야 할까?
   
와엘이 있는 나블루스는 소위 '팔레스타인 A' 지역이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총을 차고 거리에 다니는 B, C 지역과 달리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는 지역이라서, 이방인인 나 역시 편안하고 활기차게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럼에도 A 지역으로 들어가기 위해 나와 친구들은 무장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몇 개의 검문소를 거쳐야만 했다.
  
와엘은 바다에 갈 수 있을까
  
40개의 시민사회 단체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불법적인 서안지구 영토병합에 반대하는 한국 시민사회단체’ 주최의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 영토병합 규탄과 점령종식 촉구 기자회견 40개의 시민사회 단체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불법적인 서안지구 영토병합에 반대하는 한국 시민사회단체’ 주최의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 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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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9일(현지 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30%에 달하는 땅을 이스라엘이 합병할 수 있는 '중동평화구상안'을 발표했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정치적 논의가 우선돼야 한다며 트럼프 행정부가 중재하는 구상안 모두를 거부했다. 

그러나 7월 1일, 미국은 국제 사회의 비난에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땅 강제 합병 계획을 발표하려고 했다. (이 계획은 7월 1일 발표될 예정이었으나 미루어진 상태이며 발표가 미루어졌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진 것은 없다). 팔레스타인에 사는 민중과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는 대재앙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이스라엘의 불법적인 서안지구 영토 병합에 반대하는 한국 시민사회 일동은 같은 날 오전 서울 종로구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영토 병합을 규탄하고 군사점령 종식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당시 와엘은 아랍어로 연대와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날 나는 그의 연대와 감사의 말을 대신 읽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이 흐려졌다. 그의 말을 읽어야 하는데, 그의 인사를 모두에게 전해야 하는데, 그의 환한 웃음, 따뜻한 태도, 굳은 손, 바다를 보고 싶다는 바람이 한데 합쳐지며 나의 마음은 가만히 있질 못했다. 아마 우리의 소식을 들은 와엘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넬지 모르겠다.

'밥은 먹었어? 가족들은 잘 지내?'라고.

바다를 보고 싶은 와엘, 무언가를 하고 싶은 수많은 와엘의 앞에 또 얼마나 많은 고난이 펼쳐질까를 생각해본다. '혁명은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너무나 두렵다. 오늘을 시작으로 팔레스타인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모두의 마음을 힘들게 할 수도 있다. 그곳의 상황이 매우 안좋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일과 해야만 하는 일을 생각해 본다. 작은 손이지만 내밀고, 쉴 수 있는 어깨를 내어주고, 옆에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을 전하고 그렇게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이 걷고 싶다. 언젠가 하고 싶은 일을 와엘에게 전해 본다.

'와엘, 우리 함께 바다에 가요. 크나파 잔뜩 사서 소풍 가요. 저는 하이파 바다에 갈래요. 그리고 크나파는 제가 젤 사랑하는 크나파 가게에서 살 거예요.'

*와엘: 팔레스타인 나블루스에 있는 탄위르의 상임 활동가.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려는 국제 활동가들의 활동을 다양하게 지원하고 있다.

*탄위르(르네상스라는 의미를 가진 아랍어): 2002년 4월 5일부터 8일 동안 있었던 이스라엘의 나블루스 침공으로 생긴 많은 피해자를 구호하기 위해 2005년에 만들어진 풀뿌리 지역 운동 단체. 현재는 청소년과 여성, 청년, 시민 등에게 필요한 적절한 교육을 하기도 하고, 빈곤 퇴치, 반전 평화 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하는 곳이다.

*나블루스: 팔레스타인 중부에 있는 그리짐산과 에발산으로 둘러싸인 기름진 계곡이 있는 서안지구의 가장 큰 도시다.

*크나파: 케이크같이 생긴 매우 달고 치즈가 듬뿍 들어간 중동식 디저트이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영토 병합 규탄 및 군사 점령 종식 촉구 기자회견: 2020년 7월 1일 10시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40개의 시민사회 단체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불법적인 서안지구 영토병합에 반대하는 한국 시민사회단체' 주최로 열림. 자세한 사항은 '팔레스타인평화연대'로 문의하면 된다. ☞ https://bit.ly/2O0vtS1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지난 2월 1일부터 2월 28일까지 약 한 달 일정으로 팔레스타인에 갔으나, 코로나19로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2월 25일 강제 철수되었습니다.


태그:#팔레스타인, #영토 병합, #바다, #군사 점령 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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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없이 세상의 길을 헤매는 것이 즐겁습니다. 작고 소박하면서 거친 저의 길 위에서 두 눈을 감고 작은 바람 한 조각을 온몸으로 느끼고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흠뻑 맞으며 경이로운 춤을 추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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