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참 알싸하다. 결혼을 시키지 못해 안달난 엄마와 기꺼이 혹은 의문을 가지고 따르는 딸들의 모습이 '데자뷔'처럼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2006년에 개봉된 영화라면 센스 있게 결혼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포함시켰더라도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좀 남는다.

물론, 영화가 담아낸 잘 모르는 상대의 '오만'한 태도와 그에 따른 '편견' 어린 시선에 대한 이야기가 나쁘지는 않았다. 오만도 편견도 결국 같은 부모를 두고 있다. 오만은 당연히 편견을 부르며 편견 자체가 오만하다. 상대와 자신에 대한 무지는 오만과 편견을 낳기 마련이다. 그런 사실을 인식하고 쉽지 않더라도 성급한 판단을 자제하며 겸손하게 살려고 노력할 뿐이다.
 
영화 <오만과 편견> 포스터

▲ 영화 <오만과 편견> 포스터 ⓒ UIP코리아

 
엘리자베스(키이라 나이틀리 분)는 자신의 배필이 아니라는 이성적인 결론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에 대한 사랑을 접지 못하는 다아시(매튜 맥퍼딘 분)의 모습은 무척 낭만적이다.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똑부러지게 말하는 엘리자베스의 당당한 모습도 매력적이다. 그럼에도, 자꾸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서로에 대해 제대로 알아가며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 아니다.

자신들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내성적인 제인(로자먼드 파이크 분)과 귀여운 빙리(사이먼 우즈 분)의 풋풋한 사랑도 눈길을 끈다. 가난하지만 있는 척해야 하는 베넷가의 고민이 웃음 속에서도 느껴지는 섬세한 연출도 마음에 든다. 내심 엘리자베스 편인 줄 알았더니 기성 세대를 대변하는 캐서린(주디 덴치 분) 공작 부인의 모습은 변화가 쉽지 않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영화가 주는 매운 느낌은 '결혼'에 대한 여전하고도 위력적인 '편견' 때문이었다. 제인 오스틴의 원작소설 <오만과 편견>이 1813년에 출간된 것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불편한 것은 영화적 상황과 흡사한 개인적 경험들 때문이다. 무려 200년이 지났음에도 그리 변하지 않는 상황들에 적잖이 소름이 돋는다.

20년 전, 엘리자베스의 엄마처럼 엄마가 그랬다. 물론 친구들의 엄마들도 그랬다. 당시의 기준으로 결혼 적령기에 이른 언니를 붙잡고 엄마는 결혼을 노래 불렀다. 그 노래가 언니에게 통하지 않자 필자를 붙들고 노래를 불렀다. 엄마의 노래는 결혼을 선택함에 있어 결정적이진 않았지만 큰 영향을 미쳤다. 엄마의 노래는 아직도 끝나지 않는 돌림노래처럼 미혼인 동생을 향해 여전히 불려지고 있다.

엄마는 대단히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을까? 단언컨대, 아니다. 친구들이 전해준 부모의 결혼 생활 역시 그리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언니의 친구들도 동생의 친구들도 부모의 결혼 생활을 보며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행복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불행하지 않아야 하는데, 아쉽게도 눈에 보이는 대부분의 결혼은 불행에 가까웠다. 이전 세대의 많은 부모들이, 특히 엄마들이 하는 말은 "자식 때문에 참고 살았다"거나 "나만 참으면 된다, 그것이 여자의 일생이다"였다.
 
영화 <오만과 편견> 한 장면

▲ 영화 <오만과 편견> 한 장면 ⓒ UIP코리아

 
하지만, 많은 부모들이 미리 약속이나 한 듯 꼭 결혼을 해야 할 것처럼 굴었다. 자식을 너무나 사랑해, 불행 중에 행복을 찾으며 성찰하라는 의미로 일부러 인생의 고행길로 들어서게 하는 걸까. 혼자 살아도 어차피 인생은 고달프니 같이 고달파할 짝지를 꼭 찾아주고 싶은 간절한 사랑의 일환일까. 나는 아니더라도 너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표출일까.

많은 부모들에게 결혼은 남들 다하니까 해야 하는 일이지 않았을까. 결혼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하고 결혼을 권하는 부모들은 거의 없었다. 부모들에게 적령기에 이르렀음에도 결혼하지 않은 자식은 남부끄러운 일 중 하나였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부모들도 결혼에 대한 큰 고민없이 그렇게 결혼했고 그렇게 결혼 생활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배우자가 능력자이거나 부자이면 좋겠지만, 커다란 흠없이 적당하다면 만족한다. 엘리자베스 엄마 베넷 부인(브렌다 블레신 분)처럼 말이다.

원작이 쓰여지고도 200여 년, 영화가 개봉하고도 십수 년의 시간이 흘렀다. 과거보다 많은 젊은이들이 결혼을 생각하지 않거나 늦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결혼은 여전히 부모들의 떼창이다. 결혼을 인생의 필수처럼 여기는 사회적인 시선은 약간의 변화를 맞이한 듯하지만, 여전히 사회가 규정한 적령기를 놓친 미혼은 의아하게 여겨진다.

엘리자베스가 살던 시대는 결혼 외에 다른 삶을 생각하기 쉽지 않은 때였다. 여자가 분명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도 의외인 시대였다. 영화 <오만과 편견> 속 엘리자베스나 제인처럼 배우자가 될 남자에 대해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진일보한 일이었다.

한계 속에서도 나름의 대안을 찾고, 예상될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용기를 엘리자베스는 보여준다. 첫눈에 빠지는 흔한 사랑이 아닌, 좋은 사람임을 확신하는 과정을 통해 이해를 바탕으로 한 사랑을 한다. 다아시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에는 그에 대한 확신과 함께 자신에 대한 확신이 뚜렷하다.
 
영화 <오만과 편견> 한 장면

▲ 영화 <오만과 편견> 한 장면 ⓒ UIP코리아

 
허나, 끝까지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의 진면목을 보지 못해 그와 결혼하지 못한다 한들 엘리자베스에게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이러저러한 모든 일들을 천리안처럼 꿰고 있는 것이 더 이상하다. 서로 잘 말해 풀면 다행이지만, 오해를 풀지 못하는 일도 적지 않다. 엘리자베스도 제인도 결혼을 하지 못하거나 안 할 수도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거절한 콜린스(톰 홀랜드 분)의 청혼을 수락한 친구 샤롯(클로디 블레이크리 분)에게 놀란다. 너만이라도 이해해 달라고 말하는 샤롯의 태도에는 간절함이 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건 결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샤롯의 모습은 혼사가 어그러진 엘리자베스나 제인보다 애처롭다.

그녀가 그런 선택을 하는 이유가 이해가 되기 때문에 더욱 안타깝다. 샤롯에겐 엘리자베스가 버린 선택지가 최후의 선택지가 될 수도 있다. 그녀는 노처녀가 되느니 남편이 있는 삶을 택한 것이다. 당시엔 그것이 '안정'이었다.

결혼에 대한 많은 시선들은 여전히 오만한 편견에 가득하다. 그중 최고는 밑도 끝도 없는 '꼭 해야 한다'가 아닐까 싶다. 지금도 그것은 안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안정된 결혼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결혼을 한 사람들도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도 각자의 이유로 불안정하다. 둘이 부러울 것도, 혼자가 부러울 것도 없다. 꼭 하고 싶은데 못한다면 문제가 달라지겠지만,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더 불안해야 할 필요는 그리 없다.

결혼은 해보지 않는다면 전해 듣는 이야기만으로는 실체 파악이 쉽지 않다. 그렇게 징글징글해 하면서 왜 사나, 하는 의문을 해결할 길이 없다. 허나, 결혼은 해본다 하더라도 진면목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이렇게 징글징글해 하면서 왜 사나 하는 의문을 해결할 길이, 역시나 없다. 때문에 했다고 해서 잘 안다고 잘난 척도, 하지 않았다 해도 모른다고 소심해질 필요가 없다.
 
영화 <오만과 편견> 한 장면

▲ 영화 <오만과 편견> 한 장면 ⓒ UIP코리아

 
다시 보는 <오만과 편견>은 무뚝뚝한 다아시와 재기발랄한 엘리자베스의 관계를 쥐고 흔든 오만과 편견보다 결혼에 대한 꽤나 오래된 편견을 일깨웠다. 엘리자베스나 제인이 결혼을 하든 말든, 뭔 상관이겠는가. 편견으로 결혼을 못하게 되는 것처럼 편견으로 결혼을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그녀들의 인생과 결혼은 그녀들의 것이라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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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대한민국 한 귀퉁이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그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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