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29 14:23최종 업데이트 20.06.29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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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는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주요 현상들을 시공간적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합니다[편집자말]
1948년 생인 존 볼턴 전 국가안보보좌관과 1954년 생인 아베 신조 총리는 정치적으로 다른 면들을 갖고 있다. 아베는 총리직이 없더라도 지역구와 자유민주당(자민당)을 기반으로 지도력을 행사할 기회가 있다. 하지만 볼턴은 의회 진출을 통해 새로운 기반을 확보하지 않는 한, 적어도 정치·행정 분야에서는 누군가가 자기를 불러주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자기가 쓴 글과 자기가 아는 것들을 진열해놓고 세상을 놀래키며 반응을 살피는 볼턴의 모습이 이를 증명한다.
  

2018년 5월 17일(현지시간) 존 볼턴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을 듣고 있다. ⓒ EPA=연합뉴스

 
아베 신조는 'A급 전범이자 전 총리인 기시 노부스케'를 외할아버지로 두고 '10선 의원이자 전 자민당 총재인 아베 신타로'를 아버지로 둔 정치 명문가의 일원이다. 아베 신조의 친할아버지로부터 계통을 설명하지 않은 것은,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의 정치라는 업(業)이 사위인 아베 신타로와 외손자인 아베 신조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기시 노부스케의 지역구가 아베 신타로를 거쳐 아베 신조에게 넘어간 것에서도 그런 계승 관계가 드러난다.

볼턴은 노동자 계급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집에서 가사 노동을 했고, 아버지는 워싱턴 동북쪽 1시간 거리(지금의 자동차 도로 기준)인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소방관으로 근무했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나 예일대학을 거쳐 변호사가 되고 세계적인 '유세객'이 되고 미국 정부의 고관도 됐으니, 입지전적 인물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볼턴과 아베의 인연

볼턴과 아베는 정치적 기반도 다르고 정치적 경로도 상이하지만, 두 사람은 오랫동안 끈끈한 인연을 유지해왔다. 이 인연의 햇수를 알려주는 한마디가 <그것이 일어난 방(The Room Where It Happened)>란 제목의 볼턴 회고록에 담겨 있다.


2006년 12월 유엔대사직을 그만두고 민간연구소 연구원, <폭스뉴스> 평론가, 2012년 공화당 대선 후보 미트 롬니 캠프를 거친 볼턴은 2018년 4월 9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이 되어 행정부로 복귀했다.

그 직후, 쿠바를 마주보는 플로리다주의 트럼프 개인 별장인 마라라고에서 미일정상회담이 있었다. 이 상황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그것이 일어난 방> 제3장은 볼턴과 아베의 인연 햇수를 알려준다.
 
"우선, 아베와 트럼프가 일대일 회동을 가진 뒤, 그들과 그들의 대표단이 마라라고의 백금 연회장(White and Gold Ballroom)에서 회합했다. 이곳은 정말로 대단히 하얗고 대단히 금빛 찬란했다. 이때가 오후 3시였다. 아베는 '복귀 축하합니다'라며 나를 반갑게 대했다. 이는 우리가 15년 넘게 서로 알고 지냈기 때문이다."
 
2018년 기준으로 15년 넘게 이어진 이 인연의 출발점은 볼턴의 2007년 저서인 <항복은 선택지가 아니다(Surrender Is Not An Option)>에서 설명된다. 이 책에는 '그들의 1일'이 정확히 언제인지 적혀 있다. 볼턴이 국무부 군축 및 국제안보 차관으로 일본을 처음 방문해 초면의 아베를 접한 2002년 8월 26일이 바로 그 '1일'이다.

이 날의 만남을 볼턴은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아베가 풍긴 인상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평소에 품고 있던 이상형의 연인을 만나기라도 한 듯, 볼턴은 첫 만남을 강렬히 기억했다. <항복은 선택지가 아니다>에서 볼턴은 이렇게 회고했다.
 
"일본에서 8월 26일 내각관방차관 아베 신조를 처음 만났으며, 그가 북한에 대해 갖고 있는 노선이 얼마나 강경한지를 알고 고무됐다."
  

미국 백악관을 배경으로 18일(현지시간) 촬영된 존 볼턴 전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그것이 일어난 방'의 표지. ⓒ AP=연합뉴스

 
볼턴이 아베에게 반한 것은 대북 강경노선 때문이었다. 당시의 아베는 상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보다도 강경했다.

볼턴과 아베가 처음 만나고 3주가 흐른 그해 9월 17일, 평양 북일정상회담 때 아베 차관은 강경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는 '납치문제에 대한 해명과 사과가 없으면 그냥 돌아가자'며 고이즈미 총리를 압박했고, 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간접적 사과를 이끌어낸 원동력으로 알려져 있다.

친구 간에는 '다름'보다는 '같음'이 매력적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처럼 극우 신념을 가진 아베 신조를 보고 볼턴은 강렬한 이끌림을 느꼈던 듯하다. 볼턴은 첫 만남을 회상하면서 '고무됐다'라는 표현을 썼다. '고무됐다'를 표현할 때 'was inspired'나 'was stimulated' 또는 'was encouraged' 등을 쓸 수도 있었을 텐데, 이 대목에서 볼턴은 'was heartend'를 썼다. 심장(heart)을 연상시키는 단어를 선택한 것이다.

볼턴이 다른 단어들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선택한 건 아니다. 볼턴의 글에서는 inspire나 encourage 같은 단어가 등장한다. 그가 아베와의 만남을 표현하는 대목에서만 hearten을 쓴 것은 아니지만,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아베와의 첫 만남이 그에게 감동을 줬음을 설명하는 자료 중 하나로 활용될 수도 있다.

첫 만남 직후부터 볼턴과 아베의 자국 내 위상은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볼턴의 미국 내 지위는 그대로인 데 비해, 아베의 일본 내 지위는 급격히 올라갔다. 북일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이 납치자 문제를 간접적으로나마 시인한 사실을 활용해 아베 신조가 극우세력과 합세해 대대적인 반북한 여론을 조성하면서 위상을 높여나간 결과였다.

종전에 북한은 '자진 입북일 뿐 납북은 아니다'라고 주장했지만, 납치문제를 인정해주면 북일 수교도 이루고 경제협력도 얻을 수 있다는 판단 하에 납치 문제를 간접적으로나마 시인했다. 하지만 아베를 비롯한 극우세력은 이를 발판으로 대북강경 분위기를 조성하고 북일수교를 무산시켰다. 2006년에 아베가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 원동력 중 하나는 납치 문제로 인한 일본 사회의 우경화라고 볼 수 있다.

18년 관계

2002년 8월 26일 이후로 볼턴은 아베를 잊지 못했다. 볼턴은 아베와의 공적 관계를 사적 관계로 신속히 전환시켰다. 그는 그 뒤 거의 매년 일본을 방문하고 그때마다 아베를 찾아갔다. <항복은 선택지가 아니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 뒤 매년 아베와 연락을 하고, 거의 매년 도쿄에 갈 때마다 그를 만났다. 그가 총리가 된 2006년에 나는 기쁨을 느꼈다."

이렇게 2002년에 시작된 관계가 오늘날까지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다. 외국 출장 때 만난 상대국 관료에게 계속해서 연락을 보내고 거의 매년 찾아가는 것은 보통의 정성과 집념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볼턴이 아베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북미관계·북일관계·한일관계 등에서 아베와 인식을 함께한다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2018년 4월 12일 야치 쇼타로 국가안전국장으로부터 일본 정부의 대북정책을 들은 뒤에 볼턴이 느낀 감정에서도 그것이 드러난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 연합뉴스

 
<그것이 일어난 방>에서 볼턴은 "도쿄의 관점은 남한의 그것과 180도 달랐으며, 요약하면 내 것과 상당히 닮았다"고 평가했다. 북한에 단계별 보상을 제공하기보다는 북한 핵무기를 일단 제거한 뒤 사후에 일괄 보상해야 한다는 아베 내각의 입장이 볼턴을 흡족케 했던 것이다.

볼턴은 일본인 납치 문제와 관련해서도 아베를 돕고 있다. 동조하는 차원이 아니라 협력하는 차원에까지 도달해 있다.

2019년 5월 25일 도쿄 미일정상회담 때 일본인 피랍자(북한 표현은 '입북자') 가족들이 트럼프를 찾아가 만난 일이 있다. <그것이 일어난 방>에서 이 장면을 소개할 때 볼턴은 "내가 예전에 워싱턴에서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는 그 가족 구성원들은 트럼프에게 까놓고 이야기를 했다"고 말했다. 볼턴이 피랍자 가족들을 수차례 만났다는 것은, 아베 내각의 대북 압박 수단인 납치자 문제에 대해 응원을 보내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볼턴은 한일관계와 관련해서도 아베의 주장을 사실 확인도 없이 신뢰하고 있다. 볼턴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과 부속협정을 통해 식민지배 문제가 다 종결됐다'는 아베의 주장을 사실로 믿고 있다. <그것이 일어난 방> 제11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래의 '문'은 문재인 대통령이다.
 
"문은 양국 간의 1965년 조약을 뒤집으려 하고 있다. 물론 일본의 관점이긴 하지만, 이 조약은 1905년부터 1945년까지에 걸친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시련과 유명한 위안부 문제로 인한 적대관계를 종식시키는 것을 겨냥하고 있다."
 
한일기본조약 어디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없다. 제2조에서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조항이 하나 있을 뿐이다.

이것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가능케 한 조약들이 이미 효력을 상실했음을 선언하는 규정에 불과하다. 또 청구권협정을 비롯한 부속협정 어디에서도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항을 발견할 수 없다.

또 한국 국민들과 문재인 대통령의 주장은 1965년 조약을 뒤집자는 게 아니라, 1965년 조약에서 규정되지 않은 식민지배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그런데도 볼턴은 '1965년 조약은 식민지배 문제의 해결을 지향하고 있으며, 한국은 이 조약을 뒤집으려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물론 일본의 관점이긴 하지만'이란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한국 측의 입장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일본 측 의견에 경도돼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일관계는 한·일 양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이 개입해온 데서도 알 수 있듯이, 한일관계는 한미일 삼각동맹을 통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수행을 위한 하위관계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 따라서 미국의 대외전략을 기획하는 국가안보보좌관이라면 당연히 숙지하고 있어야 할 분야다.

그런데 볼턴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전혀 엉뚱하게 이해하고 있다. 이는 아베에 대한 볼턴의 흔들림 없는 우정을 보여주는 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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