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속상하거나 억울한 일을 겪을 때, 아직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대부분 상처를 잘근잘근 곱씹다가 결국 상대방에게 같은 수위로 한껏 날을 세워 되갚아버리기 일쑤였던 것 같다.

그렇게 감정적으로 상처를 되갚다 멀어진 관계는 회복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때론 아예 회복 자체를 포기해야 할 경우도 있다. 조곤조곤 말로 침착하게 감정과 생각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은 늘 굴뚝같은데 왜 막상 닥쳐서는 실천하지 못하는지... 

물론 상처를 되갚는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때도 많다. '이쯤이야 별 것 아니겠지'라고 쉽게 어떤 선을 넘었다가 본의 아니게 친근한 누군가를 아프게 했던 경우들이다.

누군가에겐 그 선이, 관계를 생각해 양보하고 양보해서 제시한 마지노 선일 수도 있는데 이를 뒤늦게 알아차릴 때가 왕왕 있는 것이다. 좀 더 친해지려다가 그런 나의 실수를 계기로 갑작스레 멀어진 기억은 안타까운 씁쓸함만 남긴다. 

결국 주변 사람들과 그럭저럭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내가 택한 방법은 적정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도록 서로 간에 예의를 지키는 적정거리 말이다. 전화 두 번을 한 번으로, 매주 볼 일은 두어 주만에 한 번으로, 용건이 있다면 만나거나 연락할 수 있지만 마음이 불편해지는 만남은 가급적 자제한다. 
 
 관계  개입이 아닌 따뜻한 정서적 지원으로 관계의 기쁨과 에너지를 누린다.
▲ 관계  개입이 아닌 따뜻한 정서적 지원으로 관계의 기쁨과 에너지를 누린다.
ⓒ KellySikkema on Unsplash

관련사진보기

 
사람들과의 관계는 좀 건조해지더라도 그나마 이 방법이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쓸 만한 방법인 것 같다. 타인이 주는 상처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나도 누군가에게 뜻하지 않은 상처를 주지 않도록 말이다. 이젠 예전처럼 상처를 곱씹는 것도, 격한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도, 관계를 회복하려 애쓰는 것도, 다 기운이 달려 벅차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헌데, 정서적 거리두기의 노력을 기울이는 대상 중 힘든 분들이 있다. 바로 부모님이다. 지방에 사시는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기는커녕 웬만해선 전화도 하지 않는다. 필요한 용건이 있을 때는 문자를 이용한다. 부모님은 내가 선의로 드린 말씀을 종종 곡해하여 불쾌한 감정들을 쏟아내시곤 한다. 그때마다 혼자 속 끓이며 그 감정들 속에서 허우적대는 일을 이제 그만하고 싶다.

부모의 권위에 못 이기는 척 조용히 감내할 수도 있지만, 기어코 시시비비를 가려내는 나의 반격으로 갈등이 심화되는 일도 더 이상 겪고 싶지 않다. 부모님께 거리를 두어 평정심을 얻는 것이 힘든 이유는 치러야 할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바로 거리두기에 대한 부모님과 나의 형제, 친척들의 지탄이다. "부모님이 사시면 얼마나 사신다고 누나는 도대체...", "집안 경조사에 얼굴도 안 들이밀고 쯧쯧쯧...", "네 목소리도 못 듣는데 00한들 무슨 소용이냐." 등등등. 기회만 있으면 언제든 이런 말들이 화살처럼 날아든다.

평정심을 얻으려다 또 다른 상처를 받는 꼴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런 말들은 한 귀로 듣고 바로 한 귀로 흘려보내 버림이 상책이다. 이런 말에는 십중팔구 상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오로지 자신의 입장만 옳다는 완고함과 고루함일 때가 더 많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자세한 사정을 모르면서도 허울 좋게 "도리"나 "효"를 들이대며 거리낌 없이 남을 괴롭히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자신의 괴롭힘이 결국은 부메랑처럼 돌고 돌아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되어 있음을 정말 몰라서 그런 걸까?

우리는 친구나 이웃, 직장동료 등 사회적으로 교류하는 이들에게 대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다. 여기서 말하는 예의란, 수직관계에서 행해지는 예의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다. 어느 정도 성숙한 인간이라면, 상처가 될 것 같은 말은 혹여 하고 싶어도 삼키거나 돌려하기 마련이고, 남의 의견을 쉽게 무시하거나 대놓고 면박을 주지 않는다.

아마도 사회적 관계에서는 체면도 차려야 하고, 상대를 다 안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자식이 부모에게 이런 예의를 기대하는 것은 영 무모한 일일까? 부모의 소유물이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서 좀 더 수평적인 친밀감을 나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자식을 낳아 기른 대가로 자식에게 부모 자신의 희망을 끊임없이 요구하며, 부정적 감정의 배출구로서 자식을 이용하는 행태는 어디까지 감내해야 할까? 더불어, 자식이 부모의 말대로 군말 없이 살아주는 것이 '효'인양 포장되는 이 세태는 도대체 언제까지 지속될지.

<미움받을 용기>에서 소개된 아들러 심리학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모든 고민을 내려놓기 위해 '과제의 분리'를 제안한다. 즉, 자식을 믿는 것은 부모의 과제, 하지만 기대와 신뢰를 받은 자녀가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것은 자식의 과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선을 긋지 않고 부모의 희망만 밀어붙이면 이는 스토커나 다름없으며, 자식의 과제에 개입하고 이를 떠안는 부모는 자신 인생의 무게만을 더욱 무겁게 짓누를 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가족이라면 더욱 의식적으로 과제를 분리할 것을 당부하며, 개입이 아니라 자신감과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자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지원할 것을 제시한다.

사회적으로 가족 간의 적정 거리두기 경험이 워낙 일천해 어디서부터 개입이고 어디까지가 정서적 지원인지 사안별로 구분하기가 아직은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리 있는 말임에는 틀림없다. 

무릇 인간의 삶은 타인과 주고받는 친밀감을 통해 삶의 기쁨과 에너지를 얻어 돌아간다고 한다. 서로의 친밀감을 원하면서도 권위며, 도리며, 체면 따위에 매여 상처만 주고받기에 급급한 모습이 안타깝다.

서툴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성숙한 관계를 위해 애는 써보는 게 어떨까? 적정거리를 두되 즉, 타인의 과제에 개입은 하지 않되, 불쾌한 감정이 아닌 진심 어린 친절함으로 대하려고 말이다. 내가 보낸 친절함도 역시 돌고 돌아 부메랑처럼 결국 나에게 돌아올 테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 본 글은 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됩니다.


태그:#관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살면서 궁금한 게 많아 책에서, 사람들에게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즐깁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