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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에 처음 인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 여행기는 지난해 2019년 8월, 인도에 두 번째 방문했을 때의 내용으로 작성되었습니다.[기자말]
스무 시간 기차여행의 시작점인 뉴 알리푸어다르역
 스무 시간 기차여행의 시작점인 뉴 알리푸어다르역
ⓒ 이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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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가 가진 티켓은 좌석이 확정된 티켓이 아닌 대기표였다. 인터넷을 통한 기차표 예약은 오직 인도인만 할 수 있다는 얘기에 호스텔에서 만난 인도인 스태프의 손을 거친 게 화근이었다. 어쩐지 생각보다 쉽게 해결됐다 싶더니, 좌석번호가 나오지도 않은 티켓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그 전에 좌석번호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내 잘못도 있었다.

기차역 직원과 옆에 있던 인도인 남자의 말에 의하면, 내가 가진 티켓은 열차에 탑승한 후 차장이 검사한 후에도 좌석이 없으면 자동으로 환불되는 티켓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환불이 되면 푯값은 인도인 스태프의 지갑으로 들어가고, 나는 웃돈을 더 주고 다른 등급의 객실로 가야 한다는 거였다.

에어컨이 나오고 담요도 주는 한 단계 상위등급인 3AC는 갈 형편이 안 되고, 남은 건 무조건 제네럴 뿐이었다. 제대로 된 좌석도 없이 입석으로 가야 해서 사람이 많으면 선반 위라도 올라가야 하거나, 그마저도 화장실이라도 한 번 갔다 오면 고스란히 뺏겨버리는 그런 제네럴. 그 외엔 별다른 방법이 없었으며 웬만하면 피하고 싶었다.
   
침대가 있는 객실 중 등급이 가장 낮은 SL칸, 여행자들은 보통 이 칸에 몸을 싣는다.
 침대가 있는 객실 중 등급이 가장 낮은 SL칸, 여행자들은 보통 이 칸에 몸을 싣는다.
ⓒ 이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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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여행자들이 일반적으로 타는 SL칸에 들어간 다음, 사람이 그나마 없어 보이는 한적한 칸을 찾았다. 그중에서도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너른 곳으로 가 간단한 상황설명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나, 내가 앉을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있거나 누워있던 이들은 대부분 대기표를 가진 이들이었다는 것을. 지정된 좌석이 있을 땐 그런 이들을 보고 화도 내고 정색도 하곤 했었는데, 이젠 내가 그 처지가 되었다.

다음 정차역은 좀 큰 역이었는지 하얀 옷을 입은 무슬림 일행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여느 인도인처럼 내가 먼저 앉았으니 내 자리다 할까 하다가도, 그랬다간 쪽수에 밀릴 게 빤해 조용히 일어나기로 했다.

실제로 인도인들은 자신의 자리에 누군가 먼저 앉아있으면 비어 있는 다른 자리로 가는 게 일반적이라고 한다. 그런 '국룰' 탓에 지정된 좌석이 적힌 티켓을 가진 외국인 여행자와 그렇지 않은 인도인 간의 실랑이가 일어났던 거였고.

하지만 저들은 세 명이고 나는 한 명이다. 조용히 일어나 사람들이 다 앉을 때까지 기다린 다음 빈 자리에 조용히 앉음이 맞다. 그래 봤자 처음 앉았던 자리에서 멀지 않은 자리였지만.

급행으로 가는 열차였는지 다음 정차역은 여기서 세 시간 거리였다. 지금이 오후 10시를 넘겼으니 다음 역에는 새벽 1시에 설 거다. 부탄으로 가던 지난 밤에도 기차에서 보낸 탓인지 피곤함이 쏟아지는 건 당연한 일, 염치 불고하지만 배낭을 베개 삼아 잠을 청하기로 했다.

세 시간 뒤에 내 자리에 앉을 이가 온다면 나를 깨울 것이다. 아무리 비어 있는 자리로 가는 게 일반적이라 해도, 모두가 자리를 깔고 누운 상황이라면 당연히 깨우는 게 맞다.
 
기차는 이름 모를 간이역에 하염없이 멈춰섰다.
 기차는 이름 모를 간이역에 하염없이 멈춰섰다.
ⓒ 이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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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려보니 해가 뜰 무렵인 오전 6시쯤, 불안한 마음에 중간중간 몇 번 깨긴 했지만, 군에서 불침번을 자주 섰던 경험 탓인지 깨어남과 다시 잠듦은 익숙했다. 자리엔 두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와 젊은 아버지가 앉아있었다.

이제 자리를 비워야 할 때가 왔나 싶었다. 하지만 이들이 내리지 않음에도 또 다른 남자가 와서 앉는 걸 보면 또 그렇지도 않아 보였다. 내가 있던 자리는 그저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돌보기 위한 공간이었던가.

기차는 속도를 늦추다 서길 반복한다. 기차가 시속 100km/h 이상으로 달릴 땐 행복하다가도, 다시 속도를 늦추어 어느 한적한 곳에서 마주 오는 기차를 비켜줄 때면 다시 우울해졌다.

언제 쫓겨나 다른 자리로 이동하거나 아예 다른 칸으로 갈 수 있다는 불안감, 기차에서 밤을 보내고 해가 중천에 뜨도록 나타나지 않는 차장. 하지만 그보다도 나를 지치게 만드는 건 모든 기차는 정해진 정차 시각이 있다는 거였다.
  
기차에서 바라본 인도인들의 일상
 기차에서 바라본 인도인들의 일상
ⓒ 이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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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이야기지만, 모든 기차는 정해진 정차 시각이 있다. 그 말인즉슨 기차가 역에 일찍 도착하면 정해진 출발 시각을 맞출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거였다. 우리의 고정관념 속 인도는 항상 늦게 오고, 기차가 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거였지만 꼭 그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게 지금 있는 곳에서 200km 떨어진 목적지 바라나시역까지 6시간 정도 걸린다고 나와 있는 걸 보면, 애초에 시간 조정을 길게 설정한 것 같았다. 그렇다 보니 큰 역에는 한 시간씩 정차하고, 교행할 수 있는 간이역에서는 하염없이 대기해야 했다.

그래 여긴 인도다.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한국 사회와 다르게 여긴 모든 것들에 관대해 흐르면 흐르는 대로 흘러가게 두는 곳.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건 순전히 물갈이 때문일 거다.

인도 여행을 하면 한 번쯤은 찾아오고, 한 번쯤은 예상했어야 할 물갈이를 기차에서 맞이할 줄이야. 보통 장거리 기차에 오를 때면 전날 저녁을 먹지 않거나, 큰일을 유발하는 음식은 피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피하지 못한 걸 보면, 기차에서 파는 밀크티나 물이 원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애쓰는 것도 잠시. 정해진 목표지점이 다가올수록 인내의 끈은 점점 짧아지는 법, 게다가 이제 곧 정차하는 역은 바라나시가 서울역이라 치면 영등포쯤 되는 역이었다. 릭샤와 같은 웬만한 교통수단으로도 충분히 숙소까지 닿을 수 있는 곳, 하지만 기차로는 한 시간 반이나 걸린다는 말에 바로 내리기로 했다.

검색해보니 합승 지프를 탈 수 있는 등 가는 방법은 많아 보였다. 역 밖으로 나오니 합승 지프는 아니지만, 바라나시 시내까지 가겠다는 합승 릭샤가 보였다. 4년 만에 다시 찾은 바라나시, 열아홉의 마지막을 장식한 바라나시. 과연 스물셋의 나는 이곳을 어떻게 바라보게 될까.
 
무갈 샤라이역. 바라나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무갈 샤라이역. 바라나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 이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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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인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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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을 마음에 품고 현실을 바라봅니다. 열아홉 살의 인도와 스무 살의 세계일주를 지나 여전히 표류 중에 있습니다. 대학 대신 여행을 택한 20대의 현실적인 여행 에세이 <우리는 수평선상에 놓인 수직일 뿐이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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