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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버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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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8일, 야학 입학식 준비로 늦게까지 일하고 몸이 완전히 파김치가 됐다. 전철역까지 도저히 걸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밥을 먹은 식당과 가까운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얼마 만에 버스를 탔는지 모른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빈자리는 많았다. 앉자마자 자리에 편안하게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얼마쯤 갔는지 모르겠다. 큰 소리가 들려서 비몽사몽간에 눈을 떴다. 한 승객이 내 뒤쪽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는 상소리를 섞어 운전 기사에게 폭언을 했다. 버스 안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불안함이 커졌다. 기사는 운전을 계속하면서 좋은 말로 대답하다가, 나중에는 참다 참다 못해서 언성을 높였다.

잠깐 들어보니 승객은 노선을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에 화가 난 것 같았다. 기사는 정작 그가 버스에 탈 때는 묻지 않더니, 나중에 시비를 건다는 입장이었다. 버스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계속 앞으로 갔다. 그런데 그 승객이 기사 앞으로 가더니, 욕을 하면서 빨리 버스를 세우라고 말했다. 험악하게 인상을 쓰면서 주먹질을 하려는 몸짓을 보이기도 했다. 기사는 어쩔 수 없이 버스를 세웠다. 기사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말싸움을 했는데, 누가 보더라도 승객이 억지를 부리는 상황이었다.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한 승객은 먼저 내리겠다고 해서 기사가 뒷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중간쯤에 앉아 있었는데 둘러보니 10여 명이 버스에 있었다. 그만하라고, 빨리 버스가 출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누군가 말했지만, 그 승객은 막무가내였다. 나도 그 승객에게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애써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분위기가 무서웠다. 두려웠다. 그 승객에게 해코지를 당할까 봐 불안에 떨면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하다 하다 안 돼서 그랬을 것이다. 기사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러자 그 승객은 바로 그 기사 얼굴을 보고 '잘했다'며, '누가 잘했나 따져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그 승객이 신고하는 기사를 혹시 폭행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5분쯤이나 지났을까. 경찰이 다섯 명이나 출동했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승객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기사도 경찰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경찰은 기사에게 간단한 설명을 듣고, 그 승객을 데리고 갔다. 그러면서 기사에게 '이젠 됐으니 운전하고 가셔도 된다'고 말했다.

곧 버스는 출발했다. 기사는 운전하면서 뒤쪽까지 다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일이 이렇게 돼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승객 가운데 아무도 그에 대해서 답변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애 많이 쓰셨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이번에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버스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은 듯, 노선을 따라 움직였다. 나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부터 끝날 때까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것에 대한 미안함과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혼자서 그 힘든 상황을 겪어야만 했던 흰머리의 운전기사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았다. 내가 그 운전기사라면 어떻게 됐을까? 얼마나 그 시간이 공포스러웠을까? 일의 전후를 보면 잘잘못을 가릴 수 있었다. 승객 가운데 누구라도 다가와서 조리 있게 잘 중재해주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일이 엉뚱한 곳으로 번져서 폭행이 오가지 않을까 얼마나 걱정했을까?

일어났다. 무엇이라고 해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운전석 오른쪽에 있는 의자로 가서 앉았다. 기사의 얼굴이 매우 창백하게 보였다. 그런 봉변을 당했으니 그렇지 않겠는가. 나는 용기를 냈다.

"기사님, 아주 잘하셨습니다. 힘내세요."

그게 내가 처음으로 기사에게 한 말이었다. 그는 내 말에 깜짝 놀라더니, 이내 고개를 조금 숙이며 고마워했다.

말주변이 별로 없는 나였지만, 그 말만은 하고 싶었다. 일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기사와의 대화가 계속 이어진 것이다. 그는 나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털어놨다. 나도 그의 말에 대해서 어떤 때는 짧게, 어떤 때는 좀 길게 답변했다. 주로 운전을 하면서 일어났던 고충에 관한 내용이었다.

하루종일 버스를 운전한다는 것

그는 승객들 가운데 좋은 사람이 참 많다고 했다. 그런데 가끔 오늘과 같은 사람이 있어서 무척 힘들다고 덧붙였다. 요즘은 코로나19 때문이 승객들이 모두 마스크를 써야 하는데, 좋게 권해도 인상을 쓰며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나는 그에게 '왜 이 버스에는 운전기사에게 폭언이나 폭행을 하면 처벌을 받는다는 경고문이 붙어있지 않으냐'고 물었다. 이러한 경고문을 붙이는 건 기사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승객들의 생명과 안전과도 관련돼 있다. 그는 경고문을 붙인 버스도 있다고 했다. 나는 모든 버스에 다 경고문을 붙여야 한다고, 그래야만 불의의 사건을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한 20분가량 대화했을까. "기사님, 힘내세요. 오늘 아주 잘하셨습니다"라는 말을, 두 번이나 더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에게 인사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집으로 걸어가면서 나이 지긋한 그 운전기사를 생각했다. 그는 누군가의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일 수도 있다. 오늘 겪었던 일은 분명 처음이 아닐 것이다. 승객 중엔 별별 사람들이 다 있기 때문에, 모르긴 몰라도 거의 매일 같이 그런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어떤 심정일까? 어떻게 그 경험을 이겨낼까? 그 기사가 그날 밤 일을 다 마친 다음, 악몽에서 빨리 벗어나 편안하게 잠을 자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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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즈음 큰 기쁨 한 가지가 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마이뉴스'를 보는 것입니다. 때때로 독자 의견란에 글을 올리다보니 저도 기자가 되어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들의 다양한 삶을 솔직하게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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