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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간 사진을 봤다.

그 유명한 경주 최부잣집 곳간이라고 했다. 현재 있는 목재 곳간 중 가장 크고 오래 된 곳이라고 했다. 정면으로 다섯 칸, 측면으로는 두 칸 크기였다. 상상을 해봤다. 현장에서 이 정도 규모의 건물을 관람하는데 얼마의 시간이 걸렸을까. 사진만 봐서는 10분이 채 소요되지 않을 것 같았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재산은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
과객은 귀천을 구분하지 말고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말고 파장 때는 물건을 사지 말라.
가문에 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도록 하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최부잣집의 여섯 가지 가훈>

"최부잣집 한 해 식량 소비량이 대략 3000석이었는데 1000석은 식구들 양식으로, 1000석은 과객들의 접대로, 나머지 1000석은 100리 안 이웃들을 돌봐줄 몫이었다"고 했다. 진짜 부자 이야기가 담겨 있는 공간이었다. 교과서에 실릴 만한 역사 이야기도 담겨 있는 곳이다. 일제시대 독립운동 자금줄 역할을 했던 이 집안의 곳간에서는 2018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던 경주 사람 5100명의 명단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알고 나면 달리 보이는 곳간임에 분명했다.

"21세기는 이야기가 자원"
 
경주 최부잣집
 경주 최부잣집
ⓒ 김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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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는 이야기가 자원인 시대이다."

<한국문화콘텐츠와 스토리텔링>(박영사)이란 책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나라 문화 콘텐츠 자원을 음식, 정원, 풍류, 차, 한옥, 한복, 서원, 회화 등 14개 분야로 나눠 스토리텔링과 엮어 정리했다.

서순복 조선대학교 교수가 썼다. 법과대학 교수다. 그는 머리말에서 "문화해설사 교육을 받고 지금까지 자원봉사를 한 지 벌써 20년 가깝게 되었다, 그러면서 많은 교육과 답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우리 문화에 애착을 가지게 되는 행운이 있었다"면서 "각 분야 권위자들의 연구 결과를 정리하고 체계화하여 한국 문화콘텐츠 자원을 스토리텔링화하는데 도움을 드리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책에서 서 교수는 "18세기에 산업혁명이, 20세기에는 정보혁명으로, 그리고 21세기는 이야기 혁명의 시대로 변모하였다"면서 "지금 세계는 이야기의 힘을 이용해 사람들의 소비 심리를 부추기고, 누가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더 많이 상품화하느냐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이야기 전쟁'을 펼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예 중 하나가 아오모리 합격사과 이야기다. 사과 생산지로 유명한 일본 아이모리현, 1991년 큰 태풍이 불어 한 해 농사를 망칠 위기에 봉착했다. 한 농부가 발상을 전환했다. 태풍 속에서도 여전히 사과나무에 붙어있는 사과에 '합격 사과'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10배나 높은 가격임에도 불티나게 팔렸다고 했다. 그 이야기가 비싼 값에 팔렸던 셈이다.

1초짜리 여행지와 10분짜리 여행지
 
소쇄원 모습
 소쇄원 모습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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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관광상품 중에서 1초 짜리 여행지와 10분 짜리 여행지 내지는 관광 상품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 장가계와 계림, 캐나다의 나이아가라 폭포, 미국의 그랜드캐년은 1초 관광지라고 할 수 있다. 풍경을 보면, 바로 '아, 멋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러나 우리나라 담양의 소쇄원이나 보길도의 세연정을 보고 느낌과 감동이 오는 것은 10분 동안 이야기를 들어야 감동을 느끼고 몰입되고 감정이입이 된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에는 '10분 짜리 여행지'가 많다. 이야기의 힘이 더 필요하다고 서 교수가 강조하는 것도 그래서다. 한 눈에 사람을 사로잡는 풍경을 갖고 있는 여행지에서 '이야기'가 보너스 같은 것이라면, 그렇지 않은 여행지에서는 꼭 필요한 콘텐츠라는 것이다.

앞서 소개한 최부잣집 경우, 서 교수는 "교육 콘텐츠로서의 의미와 가능성이 충분한 선비 문화" 사례로 평가됐다. "이기적 사욕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시각을 벗어나 내가 아닌 타인을 경제적 상황과 상관없이 배려하는 공동체 중심의 사상과 가치가 지배하는 도덕적으로 좋은 사회"에 필요한 문화라며, 현대 인성 교육과 관계가 있다는 주장도 함께 담았다.

조선시대 풍류 문화는 '번아웃 증후군(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무기력해지는 현상)' 또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등 용어로 설명되는 현대인의 고민을 풀 수 있는 콘텐츠로 소개됐다. 서 교수는 "여전히 일에 쫓기며, 여유시간에도 즐겁게 만족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안빈낙도의 즐거움, 배움의 즐거움, 자연 속에서 누리는 즐거움, 사회적 관계에서 누리는 즐거움" 등 동양적인 풍류는 현대적인 것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스토리는 사회를 변화시킨다"

서 교수는 전화통화에서 "현대적인 삶에서도 21세기에 맞는 풍류를 모색할 수 있다"면서 "우리나라 문화 자원들이 그 토대가 될 수 있으며, 우리 문화 자원의 속살에 대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잘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 책을 내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계속 강조한 것은 역시 "이야기의 힘"이었다. 서 교수는 최부잣집 이야기와 아오모리 합격사과 이야기의 공통적인 주제는 "스토리 파워"라면서 과거 자신의 경험담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15년 전인가, 16년 전인가, 영호남 교수들 세미나가 경주에서 열렸어요. 그 때 최부자집 종손 어른께서 집으로 초청해 대청마루에서 경주 법주에 오색 국수도 대접해주셨는데, 집안 내력 이야기를 쭉 해주시더라고요. 300년 넘게 부를 유지했던 비결이나 이육사 등 독립투사를 도운 이야기를 들으면서 엄청나게 감동을 받았고 반성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몰랐을 때는 흔히 얘기하는 졸부, 이런 식으로만 부자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구나.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존경스러운 부자들이 계시는구나', '이렇게 멋지게 돈을 잘 쓰고 가시는 분도 있구나',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사회적으로도 그런 훌륭하신 분들 모델이 확산될 수 있지 않겠어요?"

서 교수는 아오모리 합격사과 역시 이야기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금은 창의성과 아이디어가 필요한 시대 아니냐, 경제적으로 어려운 현실에서 스토리가 돌파구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면서 "스토리는, 이야기는 삶과 연결되고 사회를 변화시킨다"고 강조했다.

한국문화콘텐츠와 스토리텔링

서순복 (지은이), 박영사(2020)


태그:#스토리텔링, #서순복, #최부잣집, #아오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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