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초미의 관심사> 스틸 컷

영화 <초미의 관심사> 스틸 컷 ⓒ 트리플픽쳐스

 
"와, 이 영화, 진짜 대박이다." "그치? 기대 이상이네."

영화 <초미의 관심사>를 보고 나오다 딸애와 나눈 말이다. 보는 내내 시시덕거렸다.
 
영화의 시작부터 '센' 엄마(조민수)는 갖은 그악을 떨며 등장한다. 욕설은 기본이고 눈을 부라리는 성난 표정과 누구도 선뜻 입기 어려운 조악한 패션까지, 딸애의 표현을 빌리자면 "와 저 엄마, 진짜 내가 다 창피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보통의 극에서는 극악을 떠는 여자일지라도 자식한테만은 끔찍한 모성의 소유자로 미화되지만, 이 영화는 오우 노우~ '극한 엄마'의 등장이다. 둘째 딸 유리(최지수)가 꿍쳐 놓은 돈을 가지고 달아났다며 첫째 딸 순덕(치타)에게 나타난 낯선 엄마. 하지만 유리는 순덕에게서도 사라진 지 오래다. 도무지 합이 나올 법하지 않은 모녀는 '대체 유리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의 '초미의 관심사'로 하루를 동행하게 된다.
 
영화 <초미의 관심사>는 유리를 찾아 떠나는 단 하루의 여정을 그린다. 이 하루에 등장하는 갖은 인물들은 주·조연을 망라하고 모두 마이너들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마이너들을 함부로 '루저'로 전락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마이너들의 일상의 틈을 벌려 그 안을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각 마이너들의 캐릭터를 하나하나 생생히 살려낸다. 벌려진 틈으로 들여다 본 그들의 삶은 쉽게 '루저'라 칭할 수 없을 만큼, 녹록지 않은 것임을 깨닫게 한다. 등장하는 마이너들의 면면을 보면, 혼혈 흑인 청년부터 게이 커플, 어린 싱글 맘, 트랜스젠더, 마침내 드래그 퀸까지, 조합이 정말 다양하다. 이런 조합이 어색하지 않은 이곳은 어디? 이태원이다.
 
"섞이기 힘들게 생"긴 흑인 청년 정복. 피부색 때문에 태어나고 자란 이 땅에서 그가 치렀을 고충이 짐작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 사람"이라는 그의 말은, 소외당한 삶에서도 그가 무엇을 포기하지 않았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사람의 어떤 것은 짓밟는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누나라 부르는 순덕과는 동병상련을 나누는 처지다. 그런 누나의 동생이 사라졌다니, 의리를 보여야 할 시간이다.
 
감독은 유리를 찾는 과정을 우리가 살면서 잃어버린 무엇을 찾는 과정인 양, 새롭게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우여곡절 삶을 조우하게 한다. 타투 숍에서 만난 마이너들. 타인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사랑을 키워나가는 게이 커플과 두 살짜리 아이를 키우며 "힘들지만 아기 땜에 살아간다"는 싱글 맘(안리나)은 사회가 자신들을 소외시켜도 살아내는 '깡다구'를 보여준다. '돈이 없지, 깡이 없나?' 비록 중학교 때 출산했지만, 아이를 책임지며 살아가는 싱글 맘의 모습은 그 나이 대에 순덕을 낳고 키웠을 과거의 엄마와 다르지 않다. 그녀가 싱글 맘임을 밝히자마자, 유리의 흔적을 다그치느라 눈알을 부라리던 엄마는 곧바로 싱글 맘 동호회원이 된다. 순덕의 말대로 못 말리는 "오지랖"의 소유자 엄마가 구질구질한 삶에 부대끼면서도 동병상련으로 다독였을 삶의 방식일 터다. "서로 돕고 살아야지."
 
엄마는 자신의 삶의 자장 안에서 유리의 실종을 추리한다.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돈을 가지고 숨었을 거란 어림짐작은 딸이 자신의 삶을 이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과 불안감에 기인했을 것이다. "겁났어. 나처럼 될까 봐"라는 엄마의 고백에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아이를 낳았음에도 부모 노릇은 혼자 감당하며 아이를 키워야 했던 싱글 맘의 아픔이 묻어난다. 어떻게든 아이를 키우려 지독하게 살아냈음에도 누구에게도 승인받지 못한 초라한 삶이 엄마의 삶이다.
 
 영화 <초미의 관심사> 스틸 컷

영화 <초미의 관심사> 스틸 컷 ⓒ 트리플픽쳐스

 
그녀가 이태원서 나고 자랐다는 사실과,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게 살았을 엄마의 엄마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이태원이 과거 기지촌이었음을 아프게 환기시킨다. 꿈을 품었지만 한 번도 펼쳐보지 못한 채, 아이를 키우기 위해 술과 웃음을 팔았을 수많은 기지촌 여성들의 삶의 그늘이 서늘히 드리워져 있다. 그녀들은 왜 싱글 맘이 되어 거리에서 아이들을 키워야 했을까?
 
순덕이 엄마를 지독히도 싫어하면서도 외면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녀가 이태원을 떠나지 않는 이유와 같을지도 모른다. 어릴 적 엄마와 살던, 어찌 보면 슬픔과 궁핍이 곳곳에 스민 그곳에, 순덕은 남아 있었다. 순덕은 아픈 과거를 가진 이름을 버리고 '블루'라는 새 이름을 스스로에게 명명한다. '블루', 푸름. 강렬한 바다 또는 하늘의 색인 동시에 '우울'을 뜻하기도 하는 말. '블루'가 된 그녀는 재즈를 부르는 가수가, 그것도 아주 노래를 썩 잘 부르는 가수가 되었다. 삶이 매 순간 시험에 들게 했어도, 그녀는 노래로 스스로를 지켜냈다. 자신이 만든 노래에 희로애락을 녹여가며 곰국을 끓이듯 노래를 고아 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노래는 곧 그녀다.

블루가 공연장에서 삶을 아는 자만이 낼 수 있는 그윽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는, 곧 삶에 대한 메시지이며 자신을 토닥이는 헌시이기도 하다. 그게 무엇이든, 자신을 지키며 살 수 있는 무엇이 있다면, 삶은 포기되지 않는다. 엄마가 작명 도사에게 기십만 원을 들여 지은 이름 순덕은, 지극한 복을 축원한 이름이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순덕은 그 이름을 버림으로써 삶에 조응할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탈가정'한 삶은, 순함을 버리고 독해질 수밖에 없게 했겠지만, 파고든 독기는 어느새 노래로 해독되곤 했을 것이다. '블루'는 고독으로 완성시킨 푸르름이다.
 
이 블루를 연기한 치타는 <초미의 관심사>의 가장 큰 수혜자다. 그녀의 아주 숙련되지 않은 연기는 오히려 시크한 블루에게 적절했다. 평소 래퍼로 각인된 그녀는 재즈라는 장르를 통해 '블루'함으로 다시 조명받게 했다. 래퍼 치타가 저렇게 노래를 잘할 수 있다는 것을, 게다가 자작곡으로 저토록 훌륭하게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치타는 이 영화를 통해 연기자로, 재즈 가수로 다시 태어났다. 마음 맨 밑바닥에서 긁어 올리는 그녀의 고독한 노래는 영화를 한껏 고양시키는 데 톡톡한 몫을 해내고 있다.
  
 영화 <초미의 관심사> 스틸 컷

영화 <초미의 관심사> 스틸 컷 ⓒ 트리플픽쳐스

 
자, 그럼 모두의 '초미의 관심사'인 유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직접 보시는 게 좋겠다. 딸애와 나는 유리의 반전이 다소 허탈했는데, 사실 알고 보면, 그것은 관람자나 영화 서사의 관성 때문이었다. 유리를 쫓으며 줄곧 무슨 일이, 그것도 매우 불행한 일이 벌어질 거라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이는 불행한 엄마에 불행한 딸이 있다는, 대를 잇는 지긋지긋한 팔자 놀음의 재현을 믿게 만든 유구한 신화의 유령이 떠돌았던 탓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기망에 빠지지 말지어다. 소녀들이 나선 길은 불행하지도 위험하지도 않노니.
 
영화가 종반을 향해가며, 음악으로 세 모녀의 혈연력을 이어 붙이려 한다. 그리도 원망했지만 미워할 수 없었던 이유는 피 내림이라는, 유구한 가족주의로 살짝 발을 들여놓으려 한다. 훈훈한 가족애로 마무리되는 서사는 누구에게나 환영받는 안심되는 결말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밀레니얼의 가족의 서사는 피내림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감독은 가족이, 어쩌면 가족 간의 사랑이, 아직 유효하다고 납득시키려 했을지 모른다. 가족 간의 관계를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서로에게 우선이 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게 이 시대에 더 유효하지 않을까? 엄마와 블루는 유리를 찾는 과정을 통해 서로의 빗장을 아주 조금 열 수 있었다. 이대로면 어떤가? 꼭 울고불고 부둥켜 안고, 오글거리는 사랑과 위로의 말을 전해야만 모녀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제 모습대로 각자 살아가는 모녀의 모습도 아름답다. 각자의 건투를 빌어본다.
 
에필로그답지 않은 에필로그
 
조조 영화를 좋아하는 데 조조를 볼 수 없었다. 인근 영화관이 모두 오후 2시 이후부터 영업을 하기 때문이었다. 영화관에 들어설 때부터 싸하다 못해 을씨년스런 이 분위기는 뭔가? 발권을 돕는 직원은 한 명도 없었고, 스낵바도 딱 한 명이 지키고 있었다. 상영관 입장을 확인하던 직원도 온데간데 없고, '자율 입장'이라는 알림판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입장한 상영관 역시 썰렁. 오후 4시 반이면 관람객이 많을 시간은 아니지만, 설마 했는데 정말 딸애와 나의 독관(獨觀)이었다. 난생처음 독관에서 딸애와 조잘대며 영화 볼 수 있어 좋은 쾌감도 잠시, 이거 정말 큰일이다 싶었다. 돌아오는 우리 모녀의 '초미의 관심사'는 이랬다. '그 많던 직원(알바)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무사히 지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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