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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년전 광주민주화투쟁에 헌신했던 박선정은 고인이 되어 5.18제2국립묘역에 안장됐다. 2020년 5월 30일은 그가 세상을 떠난지 2주기가 되는 날이다.
 40년전 광주민주화투쟁에 헌신했던 박선정은 고인이 되어 5.18제2국립묘역에 안장됐다. 2020년 5월 30일은 그가 세상을 떠난지 2주기가 되는 날이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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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30일 오후 4시 박선정 2주기 추도식이 5.18국립묘지 제2묘역에서 열리는데 안 가실래요?"

광양제철고에서 영어를 가르치다 퇴직했던 박발진 후배한테서 위 내용의 전화가 왔다. "알았어. 최대한 시간을 내보도록 할게"라는 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잠시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40년 전으로 되돌렸다.

1980년 당시 정계와 학원가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들떠있었다. 영구집권을 꿈꿨던 박정희가 10.26사건으로 죽음을 맞고,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신군부가 세력을 잡고 있었지만 자유로운 세상을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1980년 3월, 전국 대학에서는 대학생들의 손으로 직접 학생회장을 뽑는 직선제가 부활했다. 당시 전남대학교 사회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선정 학생은 인문사회대 학생회장으로 당선되어 박관현 총학생회장과 함께 전남대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운명은 필연이 아닌 우연이 이끄는 걸까? 고등학교 후배이던 박선정 회장이 군 제대 후 복학해 집과 도서관만 오가던 필자를 찾아와 학생회 일을 도와달라며 총무부장직을 부탁했다.

불법으로 집권하려는 신군부세력을 거부하고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대학가의 시위는 5월 14일까지 계속되다 중단되었다. 하지만 광주 대학생들은 교수들과 함께 민주화 시위를 계속했다.

벼르고 있던 전두환 신군부는 5월 17일 자정에 비상계엄령을 발령하고 도서관 등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구타하고 불법 구금했다. 총학생회장 박관현과 박선정 등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단은 이날 밤 12시경에 체포 연행되어 갖은 폭행과 고문을 당했다.    "만약 계엄령이 발동되면 도청 앞 수협사무실 앞에 모이자"고 약속했던 학생회 임원들은 약속대로 5월 18일 오전 10시경에 약속장소에 모였지만 박선정 학생회장은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 구속됐을 거라"는 추측만 하며 걱정하고 있을 즈음 경찰진압 차량이 전남대 방향으로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학생회 간부들도 시내버스를 타고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 내렸다.

전남대 정문 앞에는 철모를 눌러쓴 공수부대원들이 서 있었다. 때마침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자 공수부대 대위가 메가폰을 들고 "학생들, 5분 내로 해산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민주화를 외치는 시위는 계속됐다. 잠시 후 공수부대원들이 고함을 지르며 진압봉을 들고 학생들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광주항쟁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됐다.

광주역에서 밀려난 학생들은 11시경 카톨릭회관 앞에서 연좌 데모를 하다 최루탄 세례를 받았다. 하늘에서는 헬기가 날고 광주시내는 매캐한 최루탄 연기가 자욱했다. 오후 4시경 삼복서점을 거쳐 전남도청 앞으로 가려는 일행을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사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말을 시작했다.
 
"학생들, 나는 전남도경에 근무하는 경찰이에요. 내 아들도 대학생입니다. 데모를 막는 경찰과 공수부대원은 차원이 달라요. 여러분 부마사태 때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죠? 내 아들 같은 학생들이 다치는 걸 원치 않아요. 빨리 집으로 돌아가세요"


그분과 헤어진 후 10미터도 못 가서 지도교수를 만났다.

"아니! 학생회 간부가 지금도 피하지 않고 뭐하고 있어요. 어젯밤 학생회장들은 전부 구속당했고 전남대학교 운동장에 공수부대원들이 천막을 설치했어요. 최대한 빨리 피해요. 그렇지 않으면 큰일납니다."

그제서야 학생회장이 구속되어 약속장소에 오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살아남은 학생회 간부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들을 때면 희생자들에게 죄스러울 따름이다. "산 자여 따르라!"는 노랫말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푸르른 5월이 되면 돌아가신 영령들에게 미안함을 표하며 가슴앓이를 한다. 죄스러울 따름이다. 그래도 올해는 조금이나마 위안거리가 생겼다. 21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지긋지긋했던 폭언을 덜 듣게 됐다. '광주폭도들', '북한특수부대원 소행', '빨갱이' 소리를 했던 국회의원과 막말을 외쳐댔던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려줬으니 말이다.

부채의식을 지니고 살아가던 필자에게 박선정 후배의 2주기 추도식 소식은 "꼭 참석해야 한다"는 소명으로 다가왔다. 오후 4시, 5.18국립묘지 제2묘역에 도착하니 고인의 학창시절 함께 활동했던 '전남대학교 얼샘동지회' 회원과 지인 20여 명이 모여 추도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박발진씨의 사회로 시작한 추도식은 민주열사들에 대한 추모묵념,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약력보고, 추모시에 이어 고인의 애창곡 <타는 목마름으로>를 부르는 순서로 진행됐다.

고인의 약력 보고서에는 1984년 복학 후 '전남대 총학생회부활추진협의회' 회장에 선출되어 전남대 총학생회의 법통과 정신을 계승하는 데 앞장섰다는 구절이 있었다. 1985년 대학 졸업 후에는 5.18구속자협의회, 5월위령탑 건립추진위원회, 전남민주회복국민협의회 국장으로 5공에 맞서 호헌철폐, 직선제 개헌쟁취 투쟁을 이끌었다. 
 
  광주민주화운동에 일생을 바쳐 일하다 2018년 5월 30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박선정 2주기 추도식에 모인 지인들이 기념촬영했다. 장소는 5.18 국립묘지 제2묘역이다.
  광주민주화운동에 일생을 바쳐 일하다 2018년 5월 30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박선정 2주기 추도식에 모인 지인들이 기념촬영했다. 장소는 5.18 국립묘지 제2묘역이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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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제2대 광주광역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어 제3대 광주광역시의회 의원에 재선된 그는 시의회 상임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 너무나 슬프지만 남편의 기일을 잊지 않고 찾아주는 여러분들에게서 위안을 얻는다"는 고인의 아내는 "남편은 역사를 올바로 세우기 위해 애썼고 정의롭게 살다 가셨습니다"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5.18광주민주화 운동은 민주•인권•평화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천했던 역사적 사건이다. 5.18광주항쟁은 전두환 정권을 붕괴시키는 6.10항쟁으로 이어졌으며 촛불혁명으로 되살아났고 2020년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극우세력의 몰락으로 귀결됐다.

추도식장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회고사를 하던 고인의 친구가 "친구가 그립다. 보고 싶구나!"라고 말한 것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40년 만에 고인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난 후배는 사진 속에서 여전히 웃고 있었다. 커다란 눈을 껌벅이며 "형님!" 하던 고인을 나도 보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태그:#박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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