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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12월 20일 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제10회 선고 공판에서 김재규 피고인이 법정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1979년 12월 20일 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제10회 선고 공판에서 김재규 피고인이 법정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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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소심 공판이 1월 22일 김계원ㆍ김태원에 대한 사실 심리로 시작되었다. 1심 때와 같은 법정이고 재판부는 바뀌었다. 육군본부 계엄고등군법회의 재판부는 육군중장 윤흥정, 심판관 육군소장 소준열, 법무사 육군중령 김진홍, 법무사 육군중령 양신기, 간여 검찰관은 육군 중령 김익하, 육군소령 이병옥이었다.

1월 23일의 2차 공판에 이어 24일 제3차 공판에서 김재규에 대한 항소심 심리와 변론, 최후 진술이 진행되었다. 함께 기소된 다른 피의자들의 공판에 김재규도 출정하여 신문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이날 변호인단을 대표하여 강신옥 변호사가 대표로 나서 진행된, 김재규에 대한 신문 내용 중 몇 대목이다.

"1심에서 긴급조치 해제를 건의했다고 했는데 몇 번이나 건의했나요?"
"1978년도에 세 번 건의했으며, 10ㆍ26 전까지 외국에서 보도된 우리나라 체제에 관한 비판은 일일이 보고하고 해제건의를 했습니다."

"외국 보도를 어떤 방법으로 건의했나요?"
"중앙정보부 안에 국제문제연구소가 있습니다. 세계 주요 신문, 잡지를 포함한 정기 간행물이 전부 입수되는데, 전문가들이 보고 유신 체제에 대한 비판이 실리면 발췌 번역하여 참고하시라고 계속 보고했습니다. 무슨 방법으로든지 해결해보려고 1년 전에 대통령 선거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하지 말고 직선해도 충분히 당선된다고 했으나 손톱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긴급조치 해제와 유신 체제를 고쳐보기 위해 무한히 노력했습니다. 저는 순리대로 일하기를 원합니다. 군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무리한 일이나 횡포를 싫어합니다. 결국 무슨 방법으로든지 고쳐보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 하지 못했습니다."

"피고인의 생각으로는 혁명이란 어떤 뜻인가요?"
"금번 10ㆍ26 민주회복 혁명은 이름 그대로 비민주주의적인 유신 체제를 철폐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환원하는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우리나라의 건국이념이며 국시인데, 5ㆍ16 후에 자유민주주의가 무너졌고, 10월 유신으로 자유민주주의가 끝장났기 때문에 10ㆍ26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혁명입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내란목적살인죄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건국이념과 국시에 맞을 뿐, 제가 공산주의를 하자고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대통령으로부터 긴급조치를 해제해야 되겠다는 말이 있었나요?"
"아는 바 없고, 그런 일도 없었습니다."
 
 
김재규 재판 박정희 대통령 ‘시해’ 혐의로 재판정에 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혹자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후 ‘육본’이 아닌 ‘남산’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2020년 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 개봉했다.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 이야기는 임상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그때 그 사람들>(한석규와 백윤식 주연)이라는 영화로 제작해서 개봉한 바 있다.
▲ 김재규 재판 박정희 대통령 ‘시해’ 혐의로 재판정에 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혹자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후 ‘육본’이 아닌 ‘남산’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2020년 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 개봉했다.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 이야기는 임상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그때 그 사람들>(한석규와 백윤식 주연)이라는 영화로 제작해서 개봉한 바 있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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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건의했으나 유신 체제를 바꿀 수 없었고, 긴급조치가 유신 체제의 방어수단이었으므로 대통령은 전혀 해제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김재규가 한마디 덧붙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도 자유민주주의를 희망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봅니다."

자유민주주의를 희망하지 않는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 한 사람뿐이라는 말이었다.

"피고인은 중앙정보부장으로 근무 중 긴급조치 사범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충이 있었다는데 사실인가요?"
"이율배반이었습니다. 한쪽으로는 시행 안 할 수 없었고, 시행하자니 정당한 일을 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900여 명의 학생들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제적되었고, 날이 갈수록 그 수는 늘어났으며, 이런 모순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결국은 중앙정보부장이란 중책을 가진 사람이 이런 혁명을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제 심정을 정당히 평가해주십시오."

"지금 심정은 어떠한가요?"
"지금 영어(囹圄)의 치욕보다 빨리 죽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명색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한 혁명을 했는데, 죽는다면 앞으로 계엄이 해제될 때 틀림없이 데모가 일어나고, 제 죽음이 그 데모의 이슈가 되어 사회가 혼란해지고, 그러면 북괴는 위장평화 공세로 나올 것입니다. 미국도 대통령 선거 전에 정책 발표가 있을 것인데, 한시적으로는 우리나라를 멀리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대처할지 걱정스럽습니다.

지금 저는 재판을 받고 있으나 재판받을 수 있는 대상이 되지 않으며 심판을 받는다면 국민의 심판 대상일 뿐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의 재판은 정치적인 면이 큽니다. 내가 죽고 나라가 잘된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앞으로 나라가 잘되어야만 10ㆍ26 혁명이 민주주의 역사에 남을 것인데, 그렇게 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해놓고도 제가 나라를 망하게 만들어놓았다고 한다면 땅속에서도 눈을 감을 수 없겠습니다." (주석 6)


주석
6> 안동일, 앞의 책, 350~353쪽.(발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박정희를 쏘다, 김재규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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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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