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삼청동 청와대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의 'PKM갤러리' 입구 모습. 미니멀한 건물이다.
 삼청동 청와대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의 "PKM갤러리" 입구 모습. 미니멀한 건물이다.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윤형근 대규모 회고전이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관'에서 있었다. 2년 만에 삼청동 'PKM갤러리'로 돌아왔다. 그의 90년대 20여 점 작품 중심으로 6월 20일까지 회고전이 열린다. 그는 한국 단색화의 거장임에도 2018년 이전에는 전시가 많지 않아 사람들이 그의 진가를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베니스시립미술관장 '다니엘라 페레티(D.Ferretti)'는 2018년 국립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윤형근 전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래서 2019년 5월~11월까지 열리는 베니스비엔날레 기간에 시립미술관에서 전시를 유치했고, 현지에서 폭발적 반응을 보였다. 오프닝 날 800여 명 세계 미술계인사가 몰렸고, 전시 1달 만에 160여명 외신기자가 다녀갔다.

그는 고품격 회화로 한국서예의 정신을 살려냈다. 불필요한 인위성이 없앤 윤형근 전시는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근 뉴욕 3대 갤러리 중 하나인 '데이비드 즈워너(D. Zwirner)'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릴 정도로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간다.

올곧은 '선비집안'에서 자란 윤형근
 
 윤형근 I 'Burnt Umber & Ultramarine' 227×181.7cm Oil on linen 1991. 윤형근 전이 열리는 'PKM갤러리' 전시장 내부
 윤형근 I "Burnt Umber & Ultramarine" 227×181.7cm Oil on linen 1991. 윤형근 전이 열리는 "PKM갤러리" 전시장 내부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윤형근(1928-2007)은 1928년 충북 청주에서 6남 2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독자였다. 그래서 아들을 많이 낳아야 한다는 집안의 종용을 받았다. 그의 할아버지는 '원(元)근, 형(亨)근, 천(天)근, 도(道)근, 인(仁)근, 의(義)근' 등 이름을 이미 다 지워놓았다. 주역의 '원형'과 가운데 '천도', 끝으로 공자의 '인의'를 가져왔다. 실제로 6형제를 낳았단다.

서울 회고전을 기획한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가 쓴 윤형근 도록에 보면 윤형근의 할아버지는 '윤태현'은 경성의전 출신이고, 윤형근의 아버지인 '윤용한'은 경성고보 출신으로 문인화가였단다. 20세기 초 개화기에 덕망 있는 선비집안임에 틀림없다. 윤형근은 어려서 적송으로 지운 한옥에서 17명의 대가족과 함께 정신적으로 충만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올곧은 '선비정신'을 교육받은 윤형근은 그림공부 이전에 인생 공부를 철저히 했다. 그는 교사와 교수시절에 제자들에게 "먼저 사람이 되라"는 말을 많이 했단다. 그의 육성을 들어보자.

"예술은 이론을 가지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천진무구한 '인품'에서만이 영원불변한 향기로운 예술이 생성된다". […] 진리에 사는 것, 진리에 생명을 거는 것. 그게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거예요. 그림만 잘 그리면 됐지, 그 사람 사생활은 어찌 돼도 좋다. 인간이 바로 서야 해. 작품이란 그 사람의 흔적이니까, 분신이니까 그대로 반영되는 거예요" 
 
 윤형근 I 'Burnt Umber & Ultramarine' Oil on linen 82.5×40.5cm 1970. 이 시기에는 그의 작품에 어느 정도 색채가 들어갔다. The Estate of Yun Hyong-Keun
 윤형근 I "Burnt Umber & Ultramarine" Oil on linen 82.5×40.5cm 1970. 이 시기에는 그의 작품에 어느 정도 색채가 들어갔다. The Estate of Yun Hyong-Keun
ⓒ 윤형근

관련사진보기

 
그는 예술가 이전에 불의를 참지 못하는 의인이었다. 1947년 서울대에 미대가 생겨 그는 첫 입학생이었는데, 당시 '하지'장군이 통치하는 미군정기, 그가 주도하는 '국립대학교설립안'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는지 반대했다가 일부 학생들은 구제됐지만 그는 제적당했다.

그는 또 50년 6·25 전쟁 중 좌익세력 정신교육을 자처한 이들이 만든 '보도연맹' 사건에 휘말려 죽을 뻔했고, 1956년에는 북한군 부역 죄로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생활도 했다. 그는 1957년 간신히 홍익대 졸업했다. 당시 이 대학교수였던 김환기는 윤형근이 홍익대로 편입하는 걸 도와줬다. 그게 인연이었나! 1960년 윤형근은 김환기 장녀인 김영숙과 결혼했다.

1960년 신접살림을 꾸린 후 다음 해부터 숙명여고 미술교사로 부임했다. 그러나 1973년 유신시대 권력실세인 중앙정보부장 딸의 숙명여중에서 숙명여고로 입학과정에서 부정이 있었음을 항의했다가 반공법에 걸려 잠시 구금되었고 해직되었다. 그의 인생 공부는 이렇게 끝이 없었다. 이때부터 그의 화풍이 확 바뀌었다. 작가도 이에 대해 이렇게 털어놓았다.

"내 그림이 1973년부터 확 달라졌다. 서대문교도소에서 나와 홧김에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 전에는 색을 썼었는데 색채가 싫어졌고 화려한 것이 싫어 그림이 검어진 것이지 욕을 하면서 독기를 뿜어낸 것이지 그림에 살아온 것이 배인 거야." - 윤형근 일기 중에서 
 
 윤형근 I 'Burnt Umber & Ultramarine' 228×182.2cm Oil on linen 1980 '광주학살'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윤형근 I "Burnt Umber & Ultramarine" 228×182.2cm Oil on linen 1980 "광주학살"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 국립현대미술관

관련사진보기

 
천지를 그린 '천지문' 시리즈

키가 177cm인 윤형근은 사진만 봐도 기백이 넘친다. 역사의식이 깊고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박정희가 죽자, 그의 사슬에서 좀 풀려났다. 그러나 또 다시 80년 '광주' 전말을 듣고 격노하여 총에 맞아 피 흘리는 죽어가는 광주시민들 모습을 형상화했다.

70년대 시작 80-90년대 본격적으로 '천지문(天地門)' 시리즈가 등장한다. 천지의 문을 여는 모습인가. 천지인 혹은 천자문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天地玄璜)'에서 왔나. 우주를 최대로 단순화시킨 도상이다. 색채도 묵직하고 오묘하고 독특하다. 하늘을 상징하는 검은 푸른 색(울트라 마린, Ultramarine)과 땅을 상징하는 검은 고동색(엄버, Burnt Umber)을 합쳤다.

'마리' 전 국립미술관 관장은 이 시리즈에 대해 "오랜 시간 세파를 견뎌낸 고목, 한국전통가옥의 서까래,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흙의 정취를 풍긴다. 그는 이렇게 무심한 작품을 통해 이른바 한국단색화의 거목으로 알려져 최근 국제적 인지도 높은 작가가 되었다'고 평했다. 
 
 윤형근 I 'Burnt Umber & Ultramarine' 80.7×100.2cm Oil on linen 1991
 윤형근 I "Burnt Umber & Ultramarine" 80.7×100.2cm Oil on linen 1991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그의 색채는 그렇게 죽음보다 더 강한 생명의 불꽃같다. 그러나 활활 불타고 있지만 다 태우지 못하고 남은 재의 색채라고 할까. 거기에서는 어둠의 악령과 인간의 혼령과 역사의 망령까지도 다 순화될 것 같다. 베니스에서 그의 회전이 열렸을 때 현지 언론에서도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색채"라고 평했다.

사실 윤형근은 가장 한국적인 색, 가장 자연에 가까운 색을 오래전부터 탐구해 왔다. 그의 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언제부터 흙 빛깔을 좋아졌다. 또 나무 빛깔도 그렇다. 또 돌의 빛깔도 그렇다. 겨울의 자연 빛이 좋다. 이 모두가 인조가 아닌 자연의 빛이라 퇴색한 것 같은, 탈색한 것 같은 그런 빛깔 말이다."

추사, 윤형근 정신적 아버지

20세기 선비출신답게 윤형근은 그의 예술적 계보는 추사 선생에서 나온다. 예컨대 추사의 예술정신 중 하나인 '졸박청고(拙樸淸高: 서투른 듯 맑고 고아하다)' 등이 그런 것이다. 인위적 작위와 기교가 배제된 자연스럽게 색이 배어 나오게 시도했다. 다소 서툰 듯 보이나 천진난만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극도의 단순함 속 간결하고 소박하고 넉넉한 분위기를 냈다. 
 
 1993년 미국에서 만난 '윤형근'과 '도널드 저드' 저드는 다음 해 갑자기 타계하다
 1993년 미국에서 만난 "윤형근"과 "도널드 저드" 저드는 다음 해 갑자기 타계하다
ⓒ 국립현대미술관

관련사진보기

 
추사도 당대에는 상당한 코즈모폴리턴이었지만 윤형근도 그에 못지않게 첨단의 서구미술을 관심이 많았고 글로벌하게 세계 미술관 원활하게 소통하고 있었다. 그는 회화를 하면서도 회화의 범위를 넘어 서예의 정신과 세계미술의 전반적 흐름을 다 포함시키고 있다.

그런 와중에 1991년 국내 최초로 '인공갤러리'에서 미니멀리즘 창시자 '도널드. 저드' 개인전을 열었다. 그때 한국에 온 저드는 윤형근을 처음 만났고, 두 거장은 한눈에 알아봤다.

'미니멀리즘'이라고 하면 형태, 비례, 색채를 최소화를 통해 표현의 최대화를 추구하는 미술이다. 이런 저드와 만난 이후, 윤형근은 작업에서 이런 경향이 더 강해졌다. 이에 대해 김인혜 학예연구사는 "윤형근은 저드와 만남 이후 더욱 극단적인 단순함을 추구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단호하고 주저함이 없는 확신을 갖게 된 것 같다"라는 평했다.

두 거장, 미국에서 1993년 11월 14일 재회했고(위 사진) 저드의 주선으로 1993년 뉴욕에서 윤형근의 개인전을 열어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94년 2월 저드의 갑작스럽게 사망해 그 다음해 7월에 '치나티재단미술관'에서 2인전이 아닌 윤형근전시만 열게 된다.

프랑스에는 '인상파', 한국에는 '단색화'
 
 윤형근 I 'Burnt Umber & Ultramarine' 227.5×181.6cm Oil on linen 1999. 말기작
 윤형근 I "Burnt Umber & Ultramarine" 227.5×181.6cm Oil on linen 1999. 말기작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윤형근은 후기로 갈수록 번짐이 줄어든다. 더 해맑아졌다. 이번 90년대 중심 전시에서는 수묵화의 번짐과 기둥 시리즈보다는 대작 위주의 회화를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는 초심으로 돌아가 마포가 아닌 한지 위에 심도 있게 조명한 작품도 있다. 후기시절 원숙미를 보여준다.

2004년 5월 8일, 그는 "다들 죽었다. 이일(미술평론가)도, 한창기(<뿌리깊은나무> 발행인)도, 조셉 러브(미국 미술이론가)도, 도널드 저드도, 황현욱(미술가 출신 갤러리스트)도 죽고, 나만 지금껏 살아있구나.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이 다 죽었구나"라고 했다. 자신을 죽음을 예고한 말 같다. 2007년에 사망한 그는 평생을 몇 번의 고비를 넘기며 지난한 삶을 살았다.

19세기 프랑스에 '인상파'가 있다면, 20세기 한국에는 '단색화'가 있다. 단색화의 거장 윤형근은 과연 단색화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나? 그는 이우환, 서세욱, 박서보 등과도 다르다. 그는 단색화 그냥 단색조가 아니라 모든 색을 다 혼합한 색이라고 할까? 이제 그는 올 홍콩크리스티 경매에서 한국작품 중 최고가격인 132억에 낙찰된 김환기마저도 넘어서려 한다.

덧붙이는 글 | PKM Gallery 홈페이지 PKMGALLERY.COM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