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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 생가 본채
 김영삼 생가 본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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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외포리 앞바다

김영삼은 1928년 12월 4일,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김홍조와 박부련 사이에서 1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김동옥은 일찍 개화해 자기 밭에 신명교회를 지을 만큼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 아들의 정치활동 후원자로 어장에서 얻은 수익금 전부를 정치자금으로 쏟았다. 김영삼이 다른 정치인보다 부정한 정치자금에 초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희생 때문이었다. 김영삼의 정치 역정 뒤에는 '민주 멸치'라는 수식어가 뒤따랐다.

김영삼은 해마다 연말이면 자기를 돕는 이들에게 '민주 멸치'를 선물했다. 이는 바로 아버지가 자신의 어장에서 잡은 멸치를 잘 말려서 아들에게 보낸 준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후덕한 여장부였는데 1960년 5월 24일 무장 간첩의 권총을 맞고 절명했다.

김영삼의 호는 거산(巨山)이다. 이는 거제도의 거(巨) 자와 자신의 정치적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부산에서 산(山) 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김영삼 생가 앞 거제 외포리 바다
 김영삼 생가 앞 거제 외포리 바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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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김영삼은 고향 외포리 앞바다에서 자맥질을 하면서 지냈다. 그는 소문난 개구쟁이로 어렸을 때부터 승부사 기질이 강했다. 그는 동네 아이들과 해초를 붙들고 오래 버티기 시합을 하는 등으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도 넘겼다. 그는 걸음마보다 수영을 먼저 배웠을 만큼 바다와 더불어 살아왔다. 바다는 그에게 폭풍, 평화, 시련, 관용 등을 가르쳐줬다.

김영삼은 다섯 살 때부터 서당에 다니다가 일곱 살 때 외포에 있는 4년제 간이 학교를 다녔다. 이어서 장목소학교를 다녔다. 장목소학교 졸업 후 뭍으로 나가 통영중학교에 다녔다. 
  
 중학교 시절의 김영삼
 중학교 시절의 김영삼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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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대통령 김영삼'

해방을 맞자 아버지는 아들을 부산 경남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학을 시켰다. 경남중 시절부터 김영삼은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표어를 하숙집 방 책상 앞에 붙여놓고 그 꿈을 키웠다.

경남중학교(당시 5년제)를 졸업한 김영삼은 1947년 9월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1949년 서울대학교 2학년 때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열린 정부수립기념 웅변대회에 참가해 2등에 입상, 당시 장택상 외무부장관상을 받았다. 그때 장택상과의 만남이 이후 계속 이어졌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에 입후보한 장택상은 고향 칠곡에서 출마하기로 뜻을 굳혔다. 그런 뒤 자기를 도와줄 인재를 물색 중 웅변대회에서 수상한 김영삼에게 찬조연설을 부탁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김영삼은 장택상의 비서가 됐다. 김영삼은 이때 피선거권만 주어지면 자신도 출마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루 빨리 25세가 되기를 고대했다.
  
 서울대학교 졸업 기념사진, 부인 손명순 여사와 함께.
 서울대학교 졸업 기념사진, 부인 손명순 여사와 함께.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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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위독 전보

1950년 6.25 전쟁을 만난 김영삼은 적 치하 서울에 남았다. 김영삼은 용케 서울을 탈출해 경기도 이천군 대월면 군향리로 숨어들었다. 그곳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귀향했다. 1951년 2월, 학도의용군에 입대해 국방부 정훈국에서 대북방송 요원으로 복무했다. 그후 장택상 국회부의장 배려로 비서관으로 발탁돼 당시 수도 부산에서 활동했다. 그러던 중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서둘러 거제로 갔다.

"부랴부랴 집에 갔더니 할아버지가 위독한 게 아니라 장가를 가라는 겁니다."

그래서 마산의 손명순씨와 맞선을 보고 1952년 3월 6일, 마산 문창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해 장택상이 국무총리로 자리를 옮기자 김영삼은 창랑(장택상 호)의 사조직인 신라회 운영까지 도맡았다.

1954년 5월 20일, 그는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이기붕의 권유에 따라 자유당 소속으로 거제군 지역구에 출마했다. 당시 만 26세 5개월로 당시 최연소 국회의원이 됐다. 5.20 총선이 끝나자 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의 3선의 길을 트고자 분주히 움직였다.
  
 젊은날의 김영삼
 젊은날의 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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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창당 참여

어느 하루 김영삼 의원은 이기붕의 안내로 김철안, 김상도 의원과 함께 경무대(현 청와대)로 가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그 면전에서 김영삼은 이 대통령에게 말했다.
 
"박사님! 3선 개헌을 해서는 안 됩니다. 대통령은 이번으로 끝내셔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민족의 영원한 대통령으로 남으셔야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승만 대통령은 안면 근육이 실룩거리고 손을 떨며 말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동행 의원들의 얼굴조차도 창백해졌다. 그 모임을 주선했던 이기붕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김영삼을 꾸짖었다.

하지만 김영삼은 양심에 따라 발언했기에 후련했다. 그날 이후 김영삼은 당내 인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3선 개헌 반대운동을 펼쳤다. 자유당은 3선 개헌안을 '사사오입'이라는 불법적 방법으로 통과시키자 김영삼 의원은 뜻을 같이하는 10여 명의 인사들과 자유당을 탈당했다.

그때부터 김영삼은 호헌동지회원으로 활약하면서 신익희, 조병옥, 장면, 곽상훈, 박순천 의원 등과 긴밀하게 접촉했다. 그리하여 1955년 9월 18일 민주당 창당에 참여해 중앙당 청년부장 겸 경남도당 부위원장에 임명됐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고향 집 마당에 세워진 김영삼 흉상
 고향 집 마당에 세워진 김영삼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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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이광복 지음 <인간 김영삼> 등 수십 권의 참고자료와 그 시대 신문, 동시대에 살았던 여러 사람들의 증언으로 쓴 기사임을 밝힙니다.


태그:#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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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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