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김재규 전중앙정보부장의 박정희암살 현장검증 장면
 김재규 전중앙정보부장의 박정희암살 현장검증 장면
ⓒ 나무위키

관련사진보기

 
다시 역사의 현장으로 돌아가 본다.

이번에는 박정희와 차지철을 저격한 다음의 과정을 김재규의 육성으로 들어보자.

1979년 10월 28일 합동수사본부에서 작성한 첫 '진술서'다. 진술서는 자신의 경력을 비롯 거사 과정이 담겨 있다. 여기서는 권총으로 박ㆍ차를 쏜 이후부터 '현장중계' 한다.

19시 42분경 현장을 이탈하여 맨발과 Y셔츠 바람에 집무실로 뛰어와 차량 대기실에서 "차 어디 갔어, 손님 모시고 나오라"고 외쳤습니다.

19시 45분, 본인은 본인 승용차에 육군참모총장, 김정섭차관보, 박흥주 수행비서와 동승하는 순간 본인이 총장에게 "큰일났소. 빨리 차에 타시오."했다. 승차 후 차 안에서 "무슨 일입니까" 묻길래 본인은 "큰일이 났어. 정보부로 가자"고 하자 총장이 "무슨 일이 났소" 하고 물었다.

이때 본인이 좌수 엄지 손가락으로 표시하며 우수 인지로 'X' 표시를(각하 살해됐다는 표시)하면서 저격당했다고 하자 총장이 "각하가 돌아가셨습니까" 하며 묻길래 본인이 "보안 유지를 해야 한다. 적이 알면 큰일이다."고 하면서 몹시 당황하여 경호차가 오는지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총장이 "외부의 침입이요, 내부의 일이요" 물었으나 본인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본인은 차를 부(部, 정보부)로 가자고 하자 총장이 "육본 벙커로 갑시다" 하므로 이때 운전사는 미8군 영내를 통과하여 20시 05분 육본에 있는 B-2 벙커에 도착하여 벙커 참모총장실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본인은 김정섭 차장보에게 지시하여 청와대 실장에게 전화로 "이쪽 형편이 갈 형편이 못됩니다" 하자 "이리 오시오 다 끝났는데 거기 무엇하러 갑니까. 여기 다 모였으니 총리 모시고 오시오"라고 하자 김실장은 약간 전화를 멈추었습니다만 본인이 육군총장을 인질로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응락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전화 통화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총장은 상황실 방으로 왔다갔다하여 무슨 조치를 취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22시 30분경 김계원 비서실장, 총리, 내무, 유혁인, 법무장관 등이 도착하였습니다. 법무부 장관이 본인에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자 본인은 "지금 대통령이 유고입니다. 이것은 중대한 사태로서 경계를 강화해야 되겠고 국내 유혈 사건도 막아야 하기 때문에 2,3일간 보안을 단호히 유지해야 하고 각의를 열어 계엄을 선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유병현 장군이 "위컴 대장이 미국에 가 있으니 제가 참모장에게 전달하면 됩니다. 외교부 장관이 내일 아침 미국 대사를 불러서 제가 통보하겠습니다" 했다. 이때 좀 늦게 도착한 문공장관이 "비상계엄의 사유를 어떻게 할까요" 하여 본인은 "소련의 브레즈네프가 사망한 지 여러 날이 되어도 아직 보안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보안을 지켜서 비상계엄의 사유는 유고(有故)로 하면 될 것입니다."

국방부장관실로 국무총리 이하 국방부장관과 육군총장이 자리를 옮기고 22시 55분경 본인이 김실장을 총장실 내에 있는 화장실로 데리고 들어가 "사태 수습이 급선무입니다. 보안을 유지해야 합니다"하여 "최단 시일 내에 계엄사령부 간판을 혁명위원회 간판으로 바꾸어 달도록 하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22시 40분경 총장실에서 국방부 장관실로 옮겨 23시 각의를 소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유혁인(정무제1수석 비서관)이가 중앙청 근처에서 기자들이 취재 움직임이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본인이 외신기자의 보안유지를 위해 전재덕 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체크하라고 2차장보인 김정섭에게 지시하였습니다.

10월 27일 0시 40분경 국방장관 부속실 요원이 와서 김비서실장이 찾는다고 하여 장관실 입구 부속실로 나가보니 대기한 헌병 2명에 의해 체포당하였습니다. (주석 15)

 
김재규 재판 박정희 대통령 ‘시해’ 혐의로 재판정에 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혹자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후 ‘육본’이 아닌 ‘남산’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2020년 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 개봉했다.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 이야기는 임상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그때 그 사람들>(한석규와 백윤식 주연)이라는 영화로 제작해서 개봉한 바 있다.
▲ 김재규 재판 박정희 대통령 ‘시해’ 혐의로 재판정에 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혹자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후 ‘육본’이 아닌 ‘남산’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2020년 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 개봉했다.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 이야기는 임상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그때 그 사람들>(한석규와 백윤식 주연)이라는 영화로 제작해서 개봉한 바 있다.
ⓒ 국가기록원

관련사진보기

 
거사 다음날인 10월 27일 새벽 4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 정승화 총장이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혐의로 구속되고, 계엄사 내에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합동수사본부가 꾸려지고, 계엄사는 합수부의 지침을 받아 계엄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전두환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합수부는 사건발생 18일 만인 11월 13일 김재규ㆍ김계원 등 8명을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미수혐의로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로 송치했다. 김재규는 사건 직후 승용차에서 중앙정보부로 가자고 말했으나 정승화 총장이 육군본부로 가자고 하여, 육본 벙커로 갔고 얼마 뒤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중정이냐 육본이냐가 운명의 갈림길이 되었다.

일부의 주장대로 김재규는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거사였다면 그때 중정으로 가서 사후 조처를 취하는 것이 순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준비가 없는 육본으로 가고, 결국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대통령을 저격한 엄중한 사태의 경황 중이라 할 지라도, 보안사령관과 중정부장을 지낸 사람으로서 그토록 준비없이 결행했을까 의문을 갖게 한다.

따라서 10ㆍ26 거사가 '우발범'인가 아니면 '확신범'인가는 재판과정과 취후진술, 변호인들과의 면담록 등 자료를 통해 추적될 것이다. 정부 대변인 김성진 문공부장관은 10월 27일 오전 박대통령 서거를 공식 발표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26일 저녁 6시경 시내 궁정동 소재 중앙정보부 식당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마련한 만찬에 참석하시어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 등과 만찬을 드시는 도중에 김 정보부장과 차 경호실장 간의 우발적인 충돌 사태가 야기되어 김 정보부장이 발사한 총탄으로 26일 저녁 7시 50분 서거하셨습니다. (주석 16)
 
 1979년 10. 26. 사태 당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1979년 10. 26. 사태 당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 자료사진

관련사진보기

 
정부 발표에 이어 28일 오후에는 전두환 합수부장이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정부와 합수부는 '우발적 살인'이라 주장하고 있다.

김재규는 평소 대통령께 건의하는 정책에 대하여 불신을 받아왔고 자신이 모든 보고와 건의가 차지철 경호실장에 의하여 제동을 당하였을 뿐 아니라 양인의 감정 대립이 격화되어 있었고, 업무 집행상의 무능으로 수차례에 걸쳐 대통령으로부터 힐책을 받았다. 이로 인하여 최근 요직 개편설에 따라 자신의 인책해임을 우려하고 있던 차에 10월 26일 저녁 박 대통령,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소개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만찬 도중에 차 실장과 심한 의견 충돌을 한 뒤 밖으로 나와 권총을 찾아 들고 들어가면서 밖에 있던 부하들에게 "내가 해치울 테니 총소리가 나면 밖에 있는 경호원들을 해치우라"고 지시한 뒤 7시 35분경 방에 들어가 차 실장과 박 대통령을 쏘았다. (주석 17)


주석
15> 「김재규의 10ㆍ26사건 최초 진술서」, 『월간조선』1987년 12월호.
16> 『한국일보』, 1979년 10월 28일자.
17> 앞의 신문, 1979년 10월 29일자.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박정희를 쏘다, 김재규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 둘째형과 편지 주고 받으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