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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려 1천억 원을 들인 새마을운동 테마공원은 운영비 부담을 둘러싸고 경북도와 구미시가 대립하면서 완공된 지 8개월째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2018.9.3.)
 새마을운동 테마공원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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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농촌 새마을운동이지만, 사실 그는 농촌 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 점은 그가 "각 부락 단위로 향토예비군이 중심이 되어 새마을 또는 알뜰한 마을가꾸기 운동을 전개하라"며 새마을운동을 최초로 지시(1970년 4월 22일)하기 얼마 전까지도 그랬다.

새마을운동중앙회의 모태인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중앙협의회)는 1972년에 대통령령으로 제정된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규정에 따라 출범했다. 이 규정에 따르면, 중앙협의회는 내무부장관을 위원장으로 하고 경제기획원·내무부·문교부 차관 등을 위원으로 하며 각 부처 국장급들을 실무진으로 하는 정부 내 협의체였다. 오늘날과 달리 처음에는 정부기관이었던 것이다.

위 지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박정희가 농촌 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점은 그에 대한 미국의 시선에서 잘 드러난다. 미국은 박정희를 앞세워 동아시아 정책 중 일부를 수행해야 했으므로 그를 치밀하게 관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미국이 볼 때 박정희는 농촌에 대한 애정이 많지 않은 지도자였다.

절박한 사정

도널드 프레이저가 위원장인 미국 하원 국제기구소위원회가 1978년 발간한 <한미관계 보고서>, 일명 <프레이저 보고서>는 1960년대 한국 경제를 설명하면서 "성장의 과실이 한국사회의 모든 부문에 동등하게 나눠지지 않았고 경제계획을 수립할 때 경제의 모든 영역이 동등하게 관심을 받지 못했다"며 "농업(그리고 일반적인 농촌사회)과 도시 노동자들은 대부분 무시되었다"고 평가했다.

1961년 집권 이후 9년간 이렇게 농촌 문제에 무관심했던 박 정권이 1970년에 갑자기 농촌 살리기를 외치더니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관심을 보인 데는 박 정권 나름의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공업 분야, 특히 국내 시멘트 산업을 보호할 필요성에 있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주의연구소가 새마을운동중앙회와 더불어 바르게살기운동중앙협의회 및 한국자유총연맹을 분석한 <지역민주주의와 관변단체에 관한 기초 연구>에 이런 설명이 있다.
 
1970년 시멘트 수출이 정부 목표의 1/4에 불과할 뿐 아니라 수요 감소로 약 100만t의 시멘트가 남게 되자 1970년 8월 국내 시설자금으로 쓰기 위해 고금리로 도입된 유로 달러의 일부인 10억 원가량이 산업은행을 통해 내무부의 농촌 주택개량을 목적으로 한 새마을가꾸기 운동에 쓰일 시멘트 50만t을 매입하는 데 쓰였다.

즉 1971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가뭄 피해를 겪고 있었던 농촌과 중화학공업 중심의 개발정책을 취하고 있었던 정부가 농어촌의 민심을 달래고 수출형 중화학공업의 실패 부분을 내수로 소화하는 방안의 하나로 시멘트를 매입해서 새마을가꾸기 운동에 쓰도록 한 것이다.
 
1970년 하반기에 유럽 금융기관에서 도입될 달러 차관으로 국내 시멘트 재고를 처리할 명분을 만들고자 새마을운동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위 설명 속에는 박 정권의 또 다른 동기가 들어 있다. 1971년 대선을 대비한 농어촌 표심 잡기의 일환인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대통령 3선을 위한 1969년 3선 개헌은 도시 노동자와 지식인들의 반정부 투쟁이 가열하는 원인이 됐다. 이는 박 정권이 도시의 공격으로부터 정권을 지키고자 농촌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에 관심을 갖도록 했다.

이런 배경에서 등장했기 때문에 출범 당시의 중앙협의회는 농촌 자조를 돕는 기관이기보다는 박 정권의 의중을 실현하는 기관일 수밖에 없었다. 위의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규정 제2조에서도 이 기관의 임무를 "1. 새마을운동에 관한 시책의 협의·조정 2. 새마을운동에 따른 투·융자 기준의 설정 및 조정 3. 새마을운동에 관한 지도·계몽·홍보의 협의·조정 등"으로 규정했다. 밑으로부터의 운동이 아니라 정권 입장에서 지도·계몽·홍보에 치중하는 기관이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 현장시찰 장면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 현장시찰 장면
ⓒ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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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돈줄

중앙협의회가 정권과 농촌의 연계를 돕는 역할에 그친 것은 아니다. 박 정권은 이 협의회의 존재를 명분 삼아 새마을운동에 정부 예산을 대거 배정했다. 1970년대 10년간 새마을운동에 투입된 예산은 2조 7500억 원이다. 1972년경에는 짜장면 한 그릇이 100원 정도였다. 이 점을 감안하고 '2조 7500억 원'의 현재 가치를 추산해야 한다.

중앙협의회는 또 다른 목적에도 이바지했다. 박 정권이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하는 통로 역할도 했다고 1995년 11월 6일자 < LA 타임스 >는 보도했다. 이 기사를 소개한 그해 11월 7일자 <경향신문> '재벌 헌금, 5공 가장 악랄'은 이렇게 말한다.
 
이 신문은 익명을 요구한 재벌기업 전직 고위 간부의 말을 인용, 대통령의 정치자금 모금은 박 전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위한 기부를 요청하면서 시작됐다고 전했다. (중략) 한국 최대 재벌 가운데 한 곳에서 일했던 어느 전직 임원은 '대통령에 대한 헌금은 박 대통령 시절 새마을운동에 대한 헌금 형식으로 시작됐으며, 당시 대통령의 보좌관은 헌금을 받으면 그에 대한 영수증까지 끊어주었다'고 회고했다.
 
농촌 출신이면서도 농촌 문제에 관심이 적었던 박정희가 새마을운동이라는 거대 프로젝트를 벌인 배경에는 이처럼 시멘트 공업의 활로 모색, 도시의 반체제운동에 대한 대응과 더불어 정치자금 모금 등의 현실적 이익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에 더해 국민의식과 일상을 박정희 자신에 맞게 바꾸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박정희가 작사하고 박근령이 작곡한 '새마을 노래'의 첫 구절인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 마을을 가꾸세'는 물론 좋은 말들이지만 국민생활에 깊숙이 침투하고자 했던 박 정권의 의도를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중앙협의회는 이런 의도를 감추고 사업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도구의 성격을 띠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도구에 불과했다 해도 새마을운동이 대성공을 거뒀으니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의 역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해줘야 할 것이 아닌가? 절대 그렇지 않다. 이 점에서 한국 사회는 인식상의 모순을 범하고 있다.

초가 없애고 마을길 넓히기만

새마을운동을 계기로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한 것은 사실이다. 이런 외형적 변화를 근거로 박정희 이래의 보수 정권들은 '새마을운동은 성공적이었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지난 100년간 건물을 새로 짓고 도로를 넓히는 일은 전 세계 곳곳에서 일반적으로 벌어진 현상이다. 이런 일은 오랜 옛날에도 항상 있었던 일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지난 100년간은 이런 일이 초고속으로 벌어졌다는 점이다. 세계 전역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난 현상을 놓고 발전을 운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새마을운동이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으려면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새마을 노래'의 또 다른 대목인 '소득 증대 힘써서 부자 마을 만드세'란 부분도 성취됐어야 마땅하다.

새마을운동이 성공적이었다면. 1970년대에 수많은 농촌 주민들이 "먹고 살기 힘들다. 여기서는 희망이 없다"며 고향을 등지고 대도시 공장가로 몰려들어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기계 옆에서 쪽잠 자며 겨우겨우 연명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새마을운동이 소득 증대와 부자 마을 조성에 기여하지 못했다는 점은 "도시·농촌간 소득격차를 줄이기 위한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농 간의 소득은 해가 갈수록 더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1979년 10월 3일자 <매일경제> 기사 '도·농 간 격차 더 벌어져'에서도 알 수 있다.

박정희 정권 막판에 나온 이 기사는 "1인당 실질소득을 기준으로 할 때는 농가소득이 74년에 한때 도시 가구의 95% 수준까지 접근했었으나 그 후 계속 떨어져 78년에는 도시 근로자의 65.4%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이 시기에는 노동조합이 약했기 때문에 노동자 임금도 적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절에도 농촌 가구의 1인당 실질소득이 도시 노동자의 절반을 약간 상회하는 데 그쳤다. 새마을운동에 엄청난 자금이 투입되던 이 시절에 농촌과 도시의 격차는 더 벌어졌으니 박정희 시절의 중앙협의회는 실패한 기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전두환, 박정희보다 한 수 위

그런 새마을운동 조직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것이 전두환 정권이다. 전두환 정권은 기존의 새마을운동을 폭력적 국민 지배를 위한 사회정화운동과 연계해 성격을 관 주도 운동에서 민간 주도 운동으로 전환했다. 이를 위해 1980년 12월 13일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에 따라 새마을운동중앙본부(중앙본부)를 새로 구성하고 그달 19일 이것을 사단법인으로 출범시켰다.

전두환 정권은 새마을운동을 농촌에 국한하는 운동이 아니라 전 국민 운동으로 전환하려 했다. 이에 따라 새마을운동 조직은 종래와 달리 거대 관료제 기구의 성격을 띠게 됐다. <지역민주주의와 관변단체에 관한 기초 연구>는 이렇게 설명한다.
 
1981년 10월 1일에는 새마을운동중앙본부의 지방 조직으로서 시·도 지부가 설치되었고 1983년 10월 20일에는 시·군·구 지회까지 설치됨으로써 지방 조직이 정비되었다.
 
또 소수의 공무원들로 조직된 중앙협의회와 달리 중앙본부도 거대 관료제의 외형을 띠게 됐다. 위 책은 이렇게 말한다.
 
1980년 12월 새마을운동중앙본부 발족 때 2실 5부 12과에 직원 137명이었으나 1987년에는 1실 6부 32과에 1372명으로 늘어났다.
 
청와대나 국정원에 타 부서 공무원들이 파견되는 것처럼 중앙본부 시절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특히 1981~86년까지 행정지원 명목으로 내무부·문교부 등 공무원 96명, 각종 투자단체 직원 79명 등 모두 175명을 배치 받아 각 부처와의 연락을 담당했다"고 위 책은 말한다.

중앙본부를 정점으로 시·도 및 시·군·구를 잇는 광범위한 조직을 만들고 이를 삼청교육대로 상징되는 사회정화운동과 연계한 것은 국민과 국가를 수직적 계층구조로 엮고 국민의 일상을 지배하고자 했던 파시즘 식의 조합국가를 떠올리게 한다. 국민의 생업과 정신의식까지 지배하고자 했던 전두환 정권의 의도를 드러내는 일이었다.

박정희 시절의 중앙협의회가 국민 통제에만 활용되지 않고 정치자금 수수의 명분으로도 작용했듯이 전두환 시절의 중앙본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두환 동생 전경환씨가 조직을 장악한 것을 계기로 중앙본부는 1981년부터 6년간 256억 원의 성금과 지원금을 기업체 등으로부터 수령했다. 전두환 정권 역시 정치자금 모금의 통로로 새마을운동 조직을 활용했던 것이다.
 
 (서울=연합뉴스) 새마을 운동본부 회장이었던 전경환 씨가 구속 돼 서울 구치소로 향하는 차 안에서 수갑을 찬 채 눈을 감고 있다. 1988.3.31
 (서울=연합뉴스) 새마을 운동본부 회장이었던 전경환 씨가 구속 돼 서울 구치소로 향하는 차 안에서 수갑을 찬 채 눈을 감고 있다. 1988.3.31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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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의 자구 노력

이런 조직이었기 때문에 새마을운동 조직은 전두환 정권의 몰락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 조직은 용케 살아남아 생존을 모색하더니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박정희·전두환뿐 아니라 어느 정권이든 간에 국민통제에 활용될 만한 조직을 곁에 두고 싶어한다는 점 외에 이 조직의 생존을 가능케 했던 것은 전두환 시절의 조직 확장에 힘입어 중앙본부와 생계를 함께하게 된 단체 직원들의 자구 노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전두환 정권 몰락과 함께 새마을운동이 국민적 비판에 직면하자 이 단체 구성원들은 1989년에 중앙본부를 새마을운동중앙회로 바꾸고 중앙조직을 대폭 축소하는 한편 종래와 달리 선행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랑의 쌀 나누기, 내 탓이오 운동, 국기 바르게 달기 운동, 농촌과 도시의 자매결연 사업, 농어촌 살리기 운동 등이 이들에 의해 추진됐다. 새마을 운동의 세계화를 위한 해외 진출 노력도 함께 벌어졌다.

하지만 구태로부터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다. 보수 정권과의 인연을 쉽게 끊어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1992년 9월 27일자 <한겨레> 기사 '관변단체 회원 95%가 민자당원'에도 보도된 것처럼 1990년대 초반까지도 새마을운동 조직의 구성원 대다수가 보수 정당과 연계됐다는 의혹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관권 선거에 동원된다는 비판도 피할 길이 없었다. 선거와 관련된 지역 정보를 수집해 여당에 넘기는 일에도 구성원들이 관여했다. 1992년 9월 25일자 <한겨레> 기사 '동향 파악 여 후보 눈·귀 역할'은 "새마을지회 등 각종 관변단체 회원들이 각 동사무소에 정보를 알려주면 동장이나 사무장이 다시 구청 동정계장에게 보고하는 절차를 밟게" 된다고 보도했다.

그러다가 이명박·박근혜 정권 들어서는 정권과의 유착이 다시 강해졌다. 특히 박근혜 때는 4년간 144억 원을 받아 관변단체 중에서 최고를 기록하기도 했다. 거기다가 최순실이 새마을운동 사업에 관여했다는 의혹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2018년 정성헌 중앙회장의 취임을 계기로 새마을운동을 한 차원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고 있다. 근면·자조·협동으로 대표되는 박정희식 새마을운동을 생명·평화·공경 운동으로 전환하려는 시도가 벌어지고 있다. 환경문제와 공동체 살리기에도 관심이 기울여지고 있다. 새마을운동이 박정희·전두환의 묵은 때를 완전히 벗고 이 나라를 진짜로 '새마을'로 만들 수 있을지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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