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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설부장관 시절(1974~1976년)의 김재규.
 건설부장관 시절(1974~1976년)의 김재규.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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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장은 국가의 모든 정보를 취합하는 자리다. 여기에는 대통령까지 포함된다. 그동안 멀리에서 혹은 지근에서 박정희를 지켜보았고 알 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중정부장의 위치에서 보니 문제가 훨씬 심각했다. 육영수 여사 사망 후에 보인 사생활은 추악하기 그지없었다.
 
김재규가 변호인단이 항소이유서에서 적시한 대로 3군단사령부에 연금, 혹은 건설부장관 임명식장에서 저격 기도를 할 만큼 '박정희 제거'가 움직일 수 없는 목표였다면, 그 동기는 어디서부터 싹이 텄을까.

앞에서 '박정희는 속도, 김재규는 방향'이란 표현을 썼는데, 동향이고 동기생인 박정희가 추구하는 '권력자의 길'에서 그 자신 많은 은혜를 입으면서도, 마음 한 켠에서는 정녕 그 방향이 정도가 아니라는 '양심의 소리'가 자리잡게 되었을 것이다.
 
어릴 때 아버지의 "바르게 살라"는 가르침, 피난수도 부산에서 쿠데타를 꼬득였으나 군인이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이종찬 장군의 교훈, 그리고 민족주의자 장준하와의 만남이 '속도보다는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고 할까.
 
김재규가 중앙정보부 차장에 부임될 때 부인을 비롯 가족ㆍ친지들의 반대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날 역술인을 찾아갔다. 당시는 정부의 주요 청사기공식에서 고사를 지내고, 주요 행사의 택일을 할 때에는 역술인을 찾았다. 대통령후보들 중에 출마에 앞서 조상묘를 옮기거나 역술인들이나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는 일이 잦을 때이다.
 
그는 역술인 오 모 씨를 찾았고, 그의 집에서 점괘보다 액자에 쓰인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이란 문구를 보고 크게 감동했다.

"법은 이치에 이기고, 권세는 법에 이기고, 마지막으로 하늘은 권세에 이긴다"는 뜻이 담긴, 이 문구를 보고 그는 큰 깨달음을 갖게 되었다.
 
그가 중정부장에 취임했을 때 군의 선배인 이형석(예비역 육군소장)씨가 〈대의멸친(大義滅親)〉이란 휘호 한폭을 써보내었다.

"대의를 위해 사사로움을 배척하라"는 뜻이었다. 집무실에 걸어놓았다. 틈나는대로 〈대의멸친〉과 〈비리법권천〉을 휘호로 쓰면서 실천의지로 다졌다.

10ㆍ26 후 재판과정에서 자신의 행위를 '민주화 의거'의 입증자료로 변호인단이 제출하기도 하였다. 박정희 체제는 이치와 법률에 앞서 긴급조치, 민주공화의 기본가치보다 3권귀일의 유신헌법을 앞세우는 구조에서, 국민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늘(역사)의 심판을 믿는다는 역사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대의를 위해 권총을 뽑았던 것 같다.
 
김재규가 떠안은 유신말기의 국정은 어느것 하나 녹록한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대미관계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먼저 중정 출신 인사들과 외교관들의 망명 사건부터 살펴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77년 6월 17일 중앙정보부 앞으로 '대통령 특별지시사항'을 하달해 "김형욱에게 용서란 없다"고 명령했다. 사진은 65년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박정희. 왼쪽에 정일권 총리가 서 있다. 정일권 총리는 김형욱 미국 망명 당시 미국으로 김형욱을 설득하러 갔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77년 6월 17일 중앙정보부 앞으로 '대통령 특별지시사항'을 하달해 "김형욱에게 용서란 없다"고 명령했다. 사진은 65년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박정희. 왼쪽에 정일권 총리가 서 있다. 정일권 총리는 김형욱 미국 망명 당시 미국으로 김형욱을 설득하러 갔었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은 77년 6월 17일 중앙정보부 앞으로 "대통령 특별지시사항"을 하달해 "김형욱에게 용서란 없다"고 명령했다. 사진은 65년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박정희. 왼쪽에 정일권 총리가 서 있다. 정일권 총리는 김형욱 미국 망명 당시 미국으로 김형욱을 설득하러 갔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77년 6월 17일 중앙정보부 앞으로 "대통령 특별지시사항"을 하달해 "김형욱에게 용서란 없다"고 명령했다. 사진은 65년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박정희. 왼쪽에 정일권 총리가 서 있다. 정일권 총리는 김형욱 미국 망명 당시 미국으로 김형욱을 설득하러 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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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은 6년 동안 지켜온 중앙정보부장직에서 밀려나자 박정희에게 보복하고자 하는 앙심에서 미국 망명을 택했다. 3선개헌과 이른바 동베를린 간첩단사건 등 각종 악역을 맡아 박정희에 대한 최고의 충성을 다했는데도 불구하고 해임이 예상되자 이에 앙심을 품고 미국 망명을 치밀하게 계획하여 이를 실천에 옮겼다.

김형욱은 정보부장으로 있으면서 언젠가 해임에 대비하여 미국 뉴저지주에 당시 시가로 27만 달러짜리 고급 저택을 마련하고 부인과 두 아들과 딸을 먼저 미국으로 보내놓고 있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회를 노리던 김형욱은 1973년 4월 15일 대만의 학술원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슬그머니 김포공항을 빠져나가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공화당의 전국구의원 5번으로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박정희가 언제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목을 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었다. 누구보다 박정희 권력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형욱이 얼마나 많은 돈을 해외로 빼돌렸는지는 여전히 비밀에 속한다. 그러나 미하원 프레이저위원회가 나중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의 재산규모는 1천 5백만 달러 내지 2천만 달러에 이른 것으로 밝혀졌다.

뉴욕은행에 450만 달러가 정기예금되어 있었고 스위스은행에도 정보부장 재직시에 거액을 맡겨두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에 도착한 김형욱은 초기 2년여 동안은 외부와 담을 쌓고 지냈다. 그가 즐긴 소일거리는 라스베이거스나 파리의 카지노 출입과 골프, 그리고 가족끼리의 세계여행이 전부였다.
  
 MBC PD수첩은 지난 5월 3일 "김형욱 양계장 암살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며 이를 처음 제기한 4월 11일자 시사저널 보도와 상반된 주장을 펼쳤다. 생전 김형욱 모습.
 MBC PD수첩은 지난 5월 3일 "김형욱 양계장 암살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며 이를 처음 제기한 4월 11일자 시사저널 보도와 상반된 주장을 펼쳤다. 생전 김형욱 모습.
ⓒ MB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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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김형욱이 1976년 초부터는 칩거생활을 끝내고 미국하원 외교위원회 국제관계 소위원회에 박 정권의 비리, 즉 박동선사건의 내막을 알리는가 하면, 미의회의 청문회에 나서고 미국과 일본의 유력한 매스컴과 회견하는 등 적극적인 반박정희 활동을 벌였다.
 
김형욱은 1979년 10월 초, 파리에서 의문의 실종사건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의 실종사건은 지금까지 하나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는데, 한국 정보부 요원에 의한 현지암살 또는 강제납치살해 등의 의문이 따르고 있다.
 
김형욱의 망명을 전후하여 주미 한국대사관의 참사관 김상근 씨가 미국에 망명한 것은 1976년 11월 24일이다. 5ㆍ16 직후인 61년 7월 중앙정보부에 들어가 김형욱 부장의 비서관으로 일한 적도 있는 김씨는 70년 일등서기관의 직함을 갖고 주미대사관에 근무발령을 받은 다음 76년 참사관으로 승진했다.
 
김씨가 미국에서 맡은 임무는 교민들의 반정부적 활동을 봉쇄하고 유신지지로 유도하는 일이었다. 그는 특히 75년 8월부터 한국 정부로부터 '백설작전'이란 비밀임무를 부여받는다. 이 작전은 미국 내 영향력 있는 언론인이나 학자들을 포섭하여 박정희 지지로 여론을 유도하는 임무였다. 그러나 유신체제의 인권탄압과 부패문제 등으로 미국의 여론이 극도로 좋지 않을 때였기 때문에 김씨의 임무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한국 정부는 그를 소환하기에 이르렀다.
 
본국 정부의 소환명령을 받은 그는 정치적 보복이 두려워 미국 FBI에 망명을 신청하게 되었고, FBI로부터 보호와 생활비를 받으면서 77년 10월에는 미하원 윤리위원회에 나타나 '백설작전'의 진상을 폭로하고 박 정권의 치부를 들추어내는 등 반정부활동을 계속했다.
 
뉴욕총영사관 손호영 참사가 미국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한 것은 77년 9월 16일이다. 손씨의 공식직함은 뉴욕 총영사관 참사관이지만 실제 신분은 뉴욕지구 KCIA 책임자였다. 그는 한국 정부로부터 김형욱을 귀국시키거나 최소한 미의회 증언을 막도록 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김형욱의 반정부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고 손씨는 귀국명령을 받았다. 귀국 후의 엄중한 문책을 두려워한 그는 FBI 요원들에게 망명신청을 하게 되었고, 망명선물로 「1976년 대미공작 계획서」라는 한국정부의 비밀 대미 로비활동 계획서를 프레이저위원회에 넘겨주었다.
 
주미공보관장 이재현 씨가 미국에 망명신청을 한 것은 73년 6월이다. 70년부터 주미공보관장직을 맡고 있던 이씨는 재직중에 유신을 맞아 한국 정부로부터 유신체제를 적극 홍보하라는 훈령을 받았다. 이 훈령은 독재체제인 유신의 지지를 위해 일반 외교관의 활동영역을 넘어서는 각종 불법공작을 벌이라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가뜩이나 미국사회에서 인기 없는 유신체제를 홍보하고 여기에다 불법공작 임무까지 부여받은 이씨는 한국 정부의 공작지시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따라 그의 행동은 감시를 받았고, 언제 소환될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되어 결국 망명을 택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에 정치망명을 택한 이씨는 일리노이 대학에서 준교수로 재직하면서 비교적 조용히 지내다가 77년 10월 미하원 윤리위원회 청문회에 나가 의회의원 매수공작 등 불법 로비활동 사실을 증언하는 등 반정부 활동에 나섰다.
 
70년대 중반 미주 지역의 한국공관은 잇따른 공관원 망명사건으로 긴장되고 있었다. 이재현ㆍ김상근ㆍ손호영과 더불어 73년 5월 주미 공보관 직원 한혁훈 씨가 한국의 유신 쿠데타에 반대의사를 밝히고 사표를 제출, 미국에 영주권을 신청하였다.
 
또 73년부터 75년까지 주미공보관에 근무한 김성한 씨는 한국 정부의 마닐라 전근발령에 반발, 가족과 함께 미국에 영주권을 신청했다. 김씨는 사직 후 반정부 활동을 벌였다.
 
뉴욕대표부 지역책임자 이영인 씨는 77년 귀국 명령을 받고 미국에 영주권을 신청한 바 있고, 캐나다 주재 한국대사관 양영만 영사는 78년 한국 정부로부터 캐나다 지역의 반정부적 교민활동에 강경하게 대응하라는 훈령을 받고 이를 거부, 망명을 선택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박정희를 쏘다, 김재규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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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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