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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 아렌트, <공화국의 위기>, 김선욱 옮김, 2016.
 한나 아렌트, <공화국의 위기>, 김선욱 옮김, 2016.
ⓒ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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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불복종과 양심

<공화국의 위기>는 두 번째 장에서 '시민불복종(civil disobedience)' 주제를 다룬다. 양심적 병역거부 관련해 기자회견 같은 게 열릴 때면 간간이 뉴스에 오르내리는 용어다. 혹은, 비폭력 평화시위와 거의 같은 뜻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한나 아렌트는 먼저 시민불복종을 개인의 양심 차원의 문제로 간주하지 않기를 조심스럽게 권한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갑돌이의 양심과 을돌이의 양심이 대립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양심적 병역거부'와 '양심적 병역근무'의 대립 같은 것이다. 둘째, '시민불복종은 악에 대한 개인의 양심적 반응이다'란 개념정의로는 합의에 도달하기가 뜻밖에도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유한한 존재인 인간 개개인의 양심에 선악을 절대적으로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이 체계있게 갖춰져있지 않다는 사실과 관계가 깊다.

조금 당황스러울 수 있다. 시민불복종에 관한 한 실천가와 이론가를 겸하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에 따르면, 시민불복종이 악을 씻어낼 수 있는 개개인의 양심적 의무로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아래는 소로의 글이다.
 
어떠한 악이라도, 심지어 가장 흉악한 악이라도 그것을 근절하는 데 헌신하는 것이 인간의 당연한 의무는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응당 몰두해야 할 다른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의 손에서 악을 씻어내는 것은 그의 의무이며, 비록 그가 악을 행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자신이 악행에 도움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인간의 의무이다. -99쪽

그런데 하나하나 따져볼 필요가 있다. 과연 소로의 말대로, 악을 씻어내는 걸 인생의 의무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악을 씻어내기 위해 먼저 선악을 구별해야 한다.

현실에서 선악은 자명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비근한 예로 어떤 사람들은 동성애가 '선악의 문제'라고 주장하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성적 취향(sexuality)의 문제다. 그리고 또 악을 제대로 씻어내려면 그 사람은 자기자신에게 깊은 관심(자기성찰적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공정해야 한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자기는 선하고 남들은 악하다고 판정할 우려가 누구에게나 상존한다.

이런 사정들을 감안하고서, 본격적으로 한 번 따져보자. 그리고 헤아려보자. 자명하지 않은 선악을 선명하게 구별할 수 있고, 거기에 더하여 자기성찰까지도 공정하게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며, 그들의 숫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
 
시민불복종과 공화국

어떤 시민이 '실수로 기표를 잘못했는데 이 투표용지를 찢고 새로 받아야겠어'라고 생각하고, 과감히 실행했다고 하자(실제로 지난 4.15 총선에서 그런 사례가 있었다). 혹은 '건강보험료 못 낸 사람들이 건강검진을 못 받으니 그들이 건강검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나도 건강검진을 받지 않겠다' 결심하고, 거부했다고 치자. 시민불복종일까?

위의 사례들은 공권력의 탄압 대상이라기보다는 아마도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 될 만한 괴짜" 정도로 간주될 것이다(94쪽). 개인이 일으키는 단순한 일탈행위는 물론이거니와, 박애를 염두에 두고서 개인이 양심을 걸고 실천한 특이행위는 시민불복종이 아니다.

시민불복종은 애초에 고귀한 개인적 양심에서 출발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걸 변호하려는 집단의 동의와 지지가 뒷받침되어야 성립된다. 즉 기자회견을 하든, 도로에 나가 삼천배를 하든 오체투지를 하든 공공장소에 나서야 하고, 지지자들이 함께하여야 하는 것이다. 양심적 행동이 타인들은 모르는 '개인적·사적(private)' 실천이 아니라 '공공(public)'으로 나올 때 비로소 '시민불복종'으로 불릴 수 있다는 논지다.
 
시민불복종자라는 이 특정집단이 비록 처음부터 주장한 정당성의 근거(그들의 양심)를 여전히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사실 더 이상 그들 자신에게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하나의 의견이 되어 (···) 그리고 의견의 강도는 양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한 사람들의 수에 의존한다. -109쪽

시민불복종에서 양심의 요인을 삭제하고, 그것을 공공성을 띤 '집단행동'의 일환으로 구분하는 아렌트의 노력(?)은 거북하게 느껴질 수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처벌을 달게 받으며, 때로 죽음까지 불사하는 시민불복종자의 고결함을 마치 깎아내리는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래와 같은 아렌트의 문장을 만난다면, 조금 더 불편한 마음이 들 수 있다.
 
시민불복종은 (···) "소수에 해당하는 시민들은 먼저 자신의 수적인 힘을 보여주기 위해 또한 다수의 도덕적 힘을 감소시키기 위해 연합한다"는 토크빌의 말보다 더 적합하게 서술한 것은 없을 것이다. (···) 토크빌은 시민불복종에 대해 감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험을 모르지 않았다. -140~141쪽

아렌트가 시민불복종을 개인적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공공성을 띤 정치적 행위, 공화국의 법·제도에 문제를 제기하는 위력적 행위로 시민불복종을 다루기 위해서다. 개인의 양심이나 윤리적 감수성의 문제로 시민불복종을 다루지 않으려는, 다분히 의도적인 논리전개다.

시민불복종을 개인의 양심에 밀접하게 결부시키면 시민불복종자의 인격을 불가피하게 논의의 주제로 삼게 된다. 논의 자체가 까다로워진다. 그 와중에 객관성을 놓치고 인물에 대한 주관적 평가로 갑론을박할 가능성도 생긴다.
 
시민불복종자들, 면역세포 같은 사람들

그러면, 시민불복종을 '공화국의 법·제도에 공공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정치적 행위'로 살피면 이야기가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 아렌트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자.
 
국가의 기존제도들이 적절히 기능하지 못하고, 그 권위가 힘을 상실했을 때 위기는 분명히 다가온다. 이러한 위기는 자발적 결사를 시민불복종으로 바꾸어놓고 반대를 저항으로 변형시켰을 때 (···) 나타났다. -146~147쪽

공화국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면 공화국의 시민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자기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거나, 제대로 기능하려고 발버둥치거나. 시민불복종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공화국 안에서, 시민으로서 자기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정치적 의미에서 제대로 기능하려고 발버둥치는 시민적 반응 중 하나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시민불복종자들은 평상시엔 양심적 개인으로 존재하다가 위기상황에선 공공영역으로 뛰쳐나와, 다른 양심적 개인들과 세력을 규합하여, 말하자면 집합적 양심이 되고자 한다. 그렇게 한데 모인 양심들의 행위는 사적인 차원, 개인적 차원에서만 머물지 않으며, 또 종교적 권위를 내포하는 절대적 선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합의 가능성이 있는 공공선을 추구하려는 목적을 지닌 집합행동이라 할 수 있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 공공선을 추구하고자 하는 자는 어느 공화국에서나 또 어느 시대에나 필요할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은 어쩌면 유사시에 제대로 활약하기 위해 평상시에도 건강하게 존재해야 할 면역세포 같은 존재들일지 모른다.

덧붙이는 글 | 한나 아렌트를 더 읽고 싶은 분은 제 블로그(blog.naver.com/mindfirst)에 들러주세요.


공화국의 위기 - 정치에서의 거짓말.시민불복종.폭력론

한나 아렌트 (지은이), 김선욱 (옮긴이), 한길사(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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