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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을사오적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하영과 민영기도 당시 대신으로서 을사오적 못잖게 망국에 기여했다는 의견도 많다. 그래서 '을사5적'이 아니라 '을사7적'이라는 주장이다. 조양회관(광복회 대구지부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을사오적 사진에 이하영과 민영기를 덧붙인 을사칠적 사진을 만들어보았다.
 흔히 을사오적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하영과 민영기도 당시 대신으로서 을사오적 못잖게 망국에 기여했다는 의견도 많다. 그래서 "을사5적"이 아니라 "을사7적"이라는 주장이다. 조양회관(광복회 대구지부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을사오적 사진에 이하영과 민영기를 덧붙인 을사칠적 사진을 만들어보았다.
ⓒ 조양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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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8일 게재한 기사 '일본인이 국가의 중대사를 모두 결정한 조선 말기'에서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때 일제에 적극 협조한 친일파는 이하영과 윤치호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당시 창의한 의병들이 일진회 회원들을 많이 공격한 사례도 열거했다. 이하영, 윤치호, 일진회의 친일 행각에 대해 알아본다.

이하영(李夏榮)은 철종 9년(1858)에 태어나 대한민국 10년(대한민국임시정부 설립을 기점으로 한 연도로 서기 1929년)에 죽었다. 이하영은 외부 대신이던 1904년 일본이 작성한 '한국 재정고문 및 외교고문 초빙에 관한 각서'에 조인하여 일제의 재정 및 외교권 침탈에 크게 기여(?)했다. 이듬해인 1905년에는 '한일 통신기관 위탁에 관한 협정서'와 '한국 연해 및 내하천 항행에 관한 약정서'에도 조인했다.

이토 송덕비 건립 등 다양한 친일 활동
 
김상덕, 이세영, 이사성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김상덕(金商德, ?~1906) : 충남 사람이다. 1906년 5월 11일 을사조약 늑결에 격분하여 충남 홍산 지치에서 기의한 민종식 의진에 참가하여 참모장으로 활동하고 홍주성에 입성하였으나 동월 31일 일군이 재탈환을 위한 대공세를 감행할 때 일군과 접전 중에 전사 순국하였다.

이세영(李世永, 1869~1938) :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중국 사천에서 타계했다. 충무공 이순신의 12대 종손으로, 홍주 의병군과 임병찬의 독립의군부의 일원으로 의병 투쟁에 참여했고, 망명 후에는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등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이사성(李思聖, 1883~1949) : 1906년 5월 11일 민종식의 홍주의진(洪州義陣)에 가담하여 선봉장 박영두와 함께 소모장에 임명되었다. 그 후 유격장 이한구와 같이 임천·한산 등지의 의병을 모집하고자 임천에 도착하였다가 붙잡혀 동년 11월 23일 평리원에서 소위 '정사(政事)를 변경할 목적으로 난을 일으키는 율(律)'로 유배 10년을 언도받았다. 그 뒤 1906년부터 1923년까지 서천군 한산면 송림리에서 은거 생활을 하면서 1919년에는 손병희가 주도하는 3·1독립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일경의 이목을 피해 부안군 위도면 진리에서 은거하였으나 생활고로 인하여 7년간의 걸식 생활을 하였다.
 

1906년에는 법부 대신으로서 홍주 의병 김상덕·이세영·이사성 등에 대한 처결을 지휘했다(위쪽 박스 참조). 1908년 '이등공 송덕비 건의소' 수금위원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송덕비 건립 활동을 벌였다.

일제는 이하영이 '한일합병'에 기여(?)한 '공'을 인정하여 1910년 자작 작위를 주었고, 1911년에는 5만 원의 은사 공채도 주었다. 10만 원씩 받은 을사오적에 견주면 이하영은 일제로부터 그 '공'이 저평가된 모양이다. 이에 대해 이태영은 저서 <다큐멘터리 일제 시대>에서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을사조약 체결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고종이 조약문에 도장을 찍은 것은 아니므로 그에게는 책임이 없을까? (중략) 전제 국가의 황제가 신하들에게 '알아서 처리하라'라고 말했다면 을사조약은 결국 고종이 체결한 셈이다. (중략) 흔히 을사오적이라 하여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 또한 공정하지 못하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노골적으로 아부하며 을사조약 체결에 찬성했던 (외부 대신) 이하영, (탁지부 대신) 민영기도 을사오적과 별반 다르지 않다. (중략) 을사오적 개념이 자칫 망국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왜곡할 수 있다.


KBS-TV 〈역사저널 그날〉 197회(2018년 11월 25일자) '대한제국을 지워라' 편도 "( '을사오적'이 아니라 이하영과 민영기를 포함해서) '을사칠적'이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들도 있습니다"라고 방송했다.

이하영 집안 3대의 화려한(?) 친일 이력
 
 사진은 철도 박물관에 게시되어 있다가 ‘친일파의 사진을 걸어놓았다’는 비판을 받고 2016년 사라진 이하영의 모습이다. 철거 이전에는 사진 아래에 ‘주미 공사관에 근무하다가 귀국할 때 정교한 기관차 모형을 가져와 궁중에서 문무백관에게 공람하여 새로운 문명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였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사진은 철도 박물관에 게시되어 있다가 ‘친일파의 사진을 걸어놓았다’는 비판을 받고 2016년 사라진 이하영의 모습이다. 철거 이전에는 사진 아래에 ‘주미 공사관에 근무하다가 귀국할 때 정교한 기관차 모형을 가져와 궁중에서 문무백관에게 공람하여 새로운 문명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였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 철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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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영은 1910년부터 1929년 사망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냈고, 1916년 <조선 반도사> 편찬사업 심사위원으로서 일제의 한국사 왜곡 편찬 사업에도 기여(?)했다. 그는 공교롭게도 3·1운동 10주년 기념일인 1929년 3월 1일에 사망했다.

일제가 준 작위와 혜택은 아들 이규원(李圭元)이 물려받았다. 일본 육사를 졸업한 손자 이종찬(李鐘贊)은 일본군 장교로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이종찬은 독립 후 국방부장관과 국회의원도 지냈다.  

민족반역자 처벌에 있어 우리나라는 사형 1명, 징역 12명에 멈췄지만, 프랑스는 1만여 명을 처형하고 15만 8천여 명에게 유죄 처분을 내렸다. 그런 뜻에서, 이하영 집안의 3대에 걸친 화려한(?) 이력은 친일을 청산하지 않은 우리 역사의 잘못을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이다.

1차 한일협약의 또 다른 주역 윤치호

윤치호(尹致昊)는 고종 3년(1866)에 태어나 독립을 되찾은 1945년에 죽었다. 그는 대한제국 군부 대신으로 소위 '한일합방'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얻은 윤웅렬(尹雄烈)의 아들이다. 그는 1881년 유길준·유정수와 함께 최초의 도쿄 유학생이 되었고, 1888년부터 1893년까지 미국에서 유학했다.

윤치호는 러일전쟁 발발 후 외부대신 서리로서 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협약을 맺었다. 1909년 11월 장충단에서 열린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 준비위원을 맡았고, 1919년 3·1운동 참여를 거부했다.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회장, 조선체육회 회장, 중추원 고문,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일본 국왕이 임명한 의원) 등을 역임했다.
  
윤치호는 중일 전쟁이 발발한 1937년 일본군 위문금 1000원과 국방 헌금 4000원을 내었고, 비행기 구입비 500원도 헌납했다. 또 조선총독부가 중일 전쟁의 정당성 홍보 목적에서 개최한 시국 강연회의 연사로 활동했다. 1938년 조선군 사령부에 1만 원을 기탁했고, 기독교계의 친일 협력을 위해 조직된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39년 조선 지원병 후원회 회장을 맡았고, 일본군에 2000원을 헌금했다. 1941년 5월 조선총독 자문기구인 중추원 칙임관 대우 고문에 임명되어 해방될 때까지 해마다 30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42년 5000원을 종로 경찰서에 바쳤고, 조선인 징병제 실시가 결정되자 환영하는 글을 곳곳에 실었으며, 징병제 실시 기념 강연회의 연사로 활동했다.
 
 광주시 남구 구동 22-3 광주공원의 권율 창의비 왼쪽에 ‘관찰사 윤공 웅렬 선정비’, 오른쪽에 ‘관찰사 이공 근호 선정비’가 서 있던 광경이다. 윤웅렬과 이근호는 조선을 망하도록 하는 데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거물 친일파들이다. 2019년 8월 이들 두 친일파의 선정비는 철거되었다.
 광주시 남구 구동 22-3 광주공원의 권율 창의비 왼쪽에 ‘관찰사 윤공 웅렬 선정비’, 오른쪽에 ‘관찰사 이공 근호 선정비’가 서 있던 광경이다. 윤웅렬과 이근호는 조선을 망하도록 하는 데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거물 친일파들이다. 2019년 8월 이들 두 친일파의 선정비는 철거되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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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최대의 친일 단체 일진회

1904년에 결성된 일진회(一進會)는 송병준과 이용구가 이끌었다. 1858년 함경도 장진에서 태어난 송병준(宋秉畯)은 고종 8년(1871) 무과에 급제했다. 열넷에 과거를 통과했으니, 열일곱 나이로 등용문에 오른 을사오적 이지용과 어깨를 겨룰 만한 '큰 도둑'의 소지를 보였다. 예로부터 '머리 좋은 나쁜 놈은 나라를 팔아먹고, 머리 둔한 나쁜 놈은 좀도둑이 된다'고 했다.   

경기도 양지 현감, 경상도 흥해 군수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기도 하고, 인삼을 불법 반출하여 일본 등지에서 팔기도 하던 송병준은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육군 소장 오다니 기쿠조(大谷喜久藏)의 통역으로 귀국했다. 그는 일본군을 배경으로 정치적 성장을 도모했다.

1868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이용구(李容九)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손병희(孫秉熙, 1919년 3·1만세운동 민족대표)의 우익장을 맡아 수 천 교도들을 이끌고 일본군과의 전쟁에 참여한 열렬 동학교도였다.

이용구는 일본에 망명 중인 손병희가 정치개혁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을 꾸리라는 명을 보내오자 전국 곳곳의 동학교도들을 모아 1904년 9월 진보회를 결성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손병희를 배신하고 친일의 길로 들어섰다. 

손병희를 배신하고 친일로 가는 이용구

송병준은 이용구보다 한 달가량 앞선 1904년 8월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다가 이내 일진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송병준은 전국 조직을 갖춘 이용구와 손을 잡는 것이 여러모로 유익하다고 판단, 그해 12월 진보회와의 통합을 성사시켰다. 그 후 이용구는 13도 지방 총회장, 송병준은 평의원장을 맡아 일진회의 두 축이 되었다.

온갖 친일 행각을 일삼던 일진회는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 10여 일을 앞두고 일본에 외교권을 넘겨주어야 한다는 '보호 청원 선언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1907년 6월 고종이 헤이그(Hague)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을 때에는 일제가 고종을 밀어내고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도록 강제하는 공작의 선두에 섰다.

7월 16일 고종 퇴위 후 진행된 3차 한일협약(정미 7조약, 한일 신협약) 체결에도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1909년 12월에는 일본과 한국이 한 나라로 합쳐야 한다는 성명서 '국민 2천만 동포에게 서고(誓告, 나라의 큰일을 알리는 일)'를 발표, 병합 여론 조성에도 선두에 섰다.

일진회 "조선 민중은 한일합방을 바란다" 성명 발표

일제는 제3차 한일협약 이후 '지방 군수들을 일제히 경질했다. (새로 자리를 차지한 자들은) 모두가 일진회 계통의 친일 상놈과 천민이었다(박성수, <알기 쉬운 독립운동사>).' 그러나 일제는 1910년 9월 이용가치가 없어진 일진회를 해산시켰다.

이용구는 일진회 해산 경비로 5000원, 조국 멸망에 기여한 '공'으로 10만 원을 받았지만, 자신에 대한 민중의 반감이 두려워 일본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912년 5월 22일 불과 44세로 숨을 거두었다.

송병준 67세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는 자작 작위를 받았고, 총독 자문기구 중추원의 고문이 되었으며, 1911년 은사 공채 10만 원도 받았다. 1920년 백작으로 승작되었고, 1921년에는 중추원 친임관(親任官, 일본 국왕이 직접 임명하는 관리로, 조선총독부에는 총독과 부총독 격인 정무총감 두 명뿐이었다.) 대우 고문에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해마다 3000원씩 수당을 받았다.

1925년 2월 1일 그가 죽자 일본 왕은 포도주 12병을 보내 슬픔을 표시했다. 총독 사이토(齋藤實)는 직접 조문을 왔다. 서울 장례식 시간에 맞춰 도쿄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에서는 동시에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과연 송병준은 을사오적 이지용에 맞먹는 거물 친일파였던 것이다. (이지용과 송병준은 사망 당시 이력까지 비슷하다. 둘은 모두 죽을 때 중추원 고문이자 친일단체 동민회 고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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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소설 의열단><소설 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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