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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니!'

부를수록 정겹고 포근하게 느껴지는 호칭이다. 어려움 닥칠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던 외마디소리 '아이고 엄니!'. 그래서 그런지 희미한 잔영이 시나브로 떠오를 때마다 애틋함이 더한다. '엄마'나 '어머니'보다 훨씬 더 강하고 억척스러운 이미지에 고난과 시련을 상징하는 아이콘이기도 하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허리가 바숴지게 일하면서도 아들의 앞날만 걱정했던 엄니. 졸졸 따라다니며 귀찮게 해도, 유리병 속 눈깔사탕 먹고 싶다고 사달라고 졸라대도, 화내면서 고함을 질러대며 쫑알대도 감격 어린 소리로 "아이고 내 새끼~" 하며 감싸줬던 엄니. 그의 자식 사랑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진귀한 보석과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귀하고 소중하다.
 
 연작시집 <울엄니> 책표지
 연작시집 <울엄니> 책표지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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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금의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는 '엄니', 결혼 후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라 불렀다. 엄니란 호칭을 사용한 세월은 30년 남짓, 어머니는 15년쯤 된다. 그래서일까, 두 호칭에서 시간적 괴리가 먼 옛날이야기처럼 큰 폭으로 느껴진다. 그 틈에서 시간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도와줄 책 한 권을 최근에 선물 받았다. 신상득(59) 작가의 연작시집 <울엄니>다.

신 작가는 강원도 속초 출신이다. 그는 함경도에서 월남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주변엔 교육자 아들도 있었고, 시장 상인의 딸도 있었다. 부농의 아들도 있고, 소작농의 딸도 있었다. 부유했던 가난했든 친구들은 나름대로 성장하였고, 지금은 21세기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이다. 어느새 꼬맹이들 머리에는 희끗희끗 눈이 내리고, 얼굴에는 오글거리는 잔주름이 깊어지고 있다.

중앙지 사회부 기자(1992~2009)였던 그는 2016년 가을부터 틈틈이 '울 엄니 시리즈'를 썼다. 시집은 자신이 초등학교 시절 보고 느낀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글 형식을 따지자면 스토리가 있는 '수필형 서사시'다. 서정시도 보이지만 한결같이 '울 엄니 시리즈'다. 그는 "정리하는 내내 가슴은 애잔했고, 추억은 짜릿했다. 형식이야 어쨌든 추억의 편린(片鱗)을 하나하나 꺼내는 일은 흐뭇했다"라고 말한다.

작년 5월, '울 엄니' 시리즈 100편을 책으로 엮었다. 낱낱의 책장에는 그가 어린 시절 어머니와 주고받은 대화가 냇물처럼 잔잔하게 흘러가면서 소년의 눈으로 본 엄니의 고단한 삶들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삽화와 함께 시로 완성된 엄니의 질박한 모습들은 한동안 잊고 지낸 추억들을 소환하면서 고향집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연작시 대부분 그가 나고 자란 동해안 최북단 속초·고성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1960~1970년대에 의무교육을 받은 반공 세대여서 그런지 입학통지서, 가슴 손수건, 망가진 도시락, 채변봉투, 자활촌과 납작보리, 우량아 선발대회, 야매 이발소, 연탄가스, 분식의 날, 옥수수빵, 쥐잡기 운동, 아바이와 간나새끼 등 목차에서부터 그 시절 학교 분위기와 사회상을 실감 나게 보여준다.

고향인 함경도를 애타게 그리다가 쓸쓸히 생을 마감한 어부 아바이 이야기. 명태 잡고 오징어 말리던 바닷가 이야기, 해일이 일어 죽을 뻔했던 이야기, 검정 고무신 잃어버리고 애태웠던 이야기, 영랑호에 빠져 불귀의 객이 된 친구 이야기, 크레용을 사지 못해 벌서던 이야기, 오줌싸개 이야기 등이 말풍선 딸린 삽화와 어우러지면서 책장을 더욱 푸근하게 꾸민다.

그 외에도 지독히 가난했던 70년대 자식 키우느라 고생했던 어머니를 비롯해 학창 시절 궁핍 속에서도 따사롭게 피어났던 형제간 사랑, 진즉 세상을 뜬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추억 등이 100편의 서사시를 녹여내고 있다. 과거에 써두었던 '밤(栗)'을 장롱에서 찾아 '울 엄니 시리즈' 1번에 배치한 것도 눈길을 끈다.

그는 "시집이라기보다는 수필에 가까운 글이다. 그래도 찰나를 기록하는 일은 찌릿한 즐거움'이었다. 그저 나에 대한 기록이려니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썼는데 주위에서 많은 위로와 격려가 있었다"라며 "등단과 관련 숱한 제안에도 불구하고 차마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라고 술회한다.

온 산야가 신선한 초록으로 출렁이는 가정의 달이다. 유독 가족을 돌아보게 하는 5월도 어느덧 초순을 넘기려 하고 있다. 투박한 옹기그릇처럼 살다가 진즉 하늘의 별이 된 엄니를 비롯해 멀리 떨어져 사는 형제의 정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요즘, 앞에서 소개한 연작시들과 함께 코흘리개 시절로 추억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밤(栗)' -울 엄니 1

울 엄니
해마다 가을 새벽이면 밤 주우러 나가셨다
철부지 자식들 곤히 자는 시각 밤 주우러 나가셨다

울 엄니
밤 주우며 깊은 사랑 주웠다
자식들 먹이는 일 마냥 즐거웠다

밤 주우며 간절한 염원(念願)도 주웠다
그 하뭇한 기도로 지금 내가 살고 있다

울 엄니
밤 주우며 넉넉한 행복 주웠다
우묵하게 살아 있는 귀함 알았다

밤 주우며 짜릿한 깨우침도 주웠다
못난 자식 비척거려도 전혀 서럽지 않았다

울 엄니
지금은 까만 머리에 하얀 눈 맞으며
쓸쓸히 고스란한 세월 줍는다

그리고 나는 가을 새벽
울 엄니 하얘진 머리칼 보면서
덧없이 애절(哀切)한 아픔 줍는다

2011년 10월 10일
 
덧붙임: 신상득 작가는 신작시 '금슬지락(琴瑟之樂)', '나이가 든다는 것', '먹물' 등으로 2020년 2월~3월 동방문학(통권 제92호) 시 부문 신인상을 받았다. 그중 '먹물'은 화선지에 먹물이 번지듯이 스미어 비로소 문장이 되고 작품이 되는 먹물처럼 인간의 사랑도 '담담히 스미고/ 가당히 번져야' 참사랑이 된다는 깨달음을 담담한 어조로 표현하는 등 감성제어 능력이 높은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울엄니

신상득 (지은이), 조영길 (그림), 비앤북스(B&Books)(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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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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