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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탄서원에 배향된 이자 선생
 
 이자 선생이 귀양온 토계와 서원이 있는 팔봉
 이자 선생이 귀양온 토계와 서원이 있는 팔봉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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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 선생이 1533년 12월 15일 충주 토계리 몽암(夢庵)에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1534년 봄 용인군 기곡면(器谷面) 선영에 묻혔다. 1577년에 이르러서야 노수신에 의해 행장(行狀)이 지어졌다. 그리고 유희춘(柳希春)의 계청으로 '문의(文懿)'라는 시호를 받게 되었다. '도덕을 널리 듣고, 덕성이 순박하고 맑다'는 뜻이다.

1583년에는 충주사림(士林)이 몽암유지(夢庵遺址) 북쪽에 계탄서원(溪灘書院)을 세우고 이자와 이연경을 제향하기 시작한다. 계탄이라는 이름은 이자의 호인 계옹(溪翁)과 이연경의 호인 탄수(灘叟)에서 한 자씩 따왔다.

1586년에는 노수신이 <계탄서원기>를 썼다. <계탄서원기>에 따르면 서원은 명현을 존숭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곳이다. 명현을 존숭하기 위해 숭덕사(崇德祠)가 있고,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호의당(好懿堂)이 있다. 노수신은 이연경과 이자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이 두 명현은 기묘사화로 인해 충주로 낙향하고 귀양을 왔다. 용탄으로 낙향한 이연경은 거룻배를 타고 달천을 거슬러 올라 토계에 귀양 온 이자를 찾아간다. 그들은 토계에서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짓고 술을 나눈다.
 
 토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칼바위(劍巖)
 토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칼바위(劍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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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계옹과 탄수로 서로를 부르면서 사립문에 달빛 비치고 창문에 바람 불 때마다 한가하게 앉아 이야기 나누었으며, 서책들을 깊이 음미하고 고금의 일을 고증하면서, 장차 그대로 생을 마치며 늙음이 이르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하셨으니, 이 어찌 두 분 선생의 회심의 장소가 아니겠는가."

당시 영의정이던 노수신은 조만간 벼슬에서 물러나 자신이 옛날 공부하고 살던 용탄을 찾아가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토계를 찾아 훌륭한 강산을 알아보고, 서원의 아름다움을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 그것이 두 분 선생으로부터 받은 공부의 빚과 마음의 빚을 갚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서원의 문머리에 자신이 지은 기문을 걸 수 있게 됨을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이자의 문집 <음애집> 이야기
 
 이자 문집 공부하기
 이자 문집 공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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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의 사상과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문집 <음애집>(陰崖集)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자의 문집 간행은 쉽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귀양지인 토계에서 세상을 떠났고, 왜란과 호란 같은 병란으로 시문(詩文)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음애집>은 이자가 죽은 지 200년도 더 지난 1754년에야 출간될 수 있었다. 이자의 6대손인 이도흥(李道興)과 집안의 종손(族從孫) 이이장(李彝章)이 힘썼기 때문에 가능했다.

집안에 전해지던 유고(遺稿)를 중심으로, 동시대 활동했던 문인 학자의 문집(文集) 야승(野乘) 패설(稗說) 일록(日錄) 등을 찾아 4권 2책으로 문집을 완성했다. 이것을 우리는 <음애집> 초간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3,656수나 남아 있던 시가 초간본에는 115편 정도만 실려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초간본 문집에는 새로 편집한 연보(年譜)와 부록이 들어갔다.
 
 음애집
 음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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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서문과 연보가 앞에 들어가고, 1-2권에 시문이 들어간다. 3권은 일록(日錄)과 잡저(雜著)로 이루어져 있다. 4권은 부록으로 다른 사람이 이자 선생에 대해 쓴 글이다. <이자 행장>, <이자 묘갈음기(墓碣陰記)>, <계탄서원기>, <검암서원 중건상량문>, <팔봉서원 사액제문>, <팔봉서원 춘추향축문> 등이 있다. 이 중 <이자 행장>과 <계탄서원기>를 노수신이 썼다. 마지막 부분에 발문이 들어가 있다.

이자는 '몽암에 묻혀 살다(夢庵幽居)'라는 시에서 귀양지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노래했다.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친 강변에 초가집을 지었으니 그것이 몽암이다. 그러한 집에서 책과 술을 벗 삼아 정치와 세속을 떠난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또 한 해가 바뀔 때 되니 심사가 여전히 어둡고 불편함을 표현한다.
 
 푸른 암벽 병풍 되어 못을 이룬 강
 푸른 암벽 병풍 되어 못을 이룬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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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긴 울타리 사이로 초가집 선명하고             茅齋楚楚映疏籬
푸른 암벽 병풍 되어 강이 못을 이루네.           翠壁爲屛江作池
책상에는 시문이요 병에는 술 있으니              案有詩書甁有酒
음애의 생활계획 정말 여유로워 졌네.             陰崖活計已全移

한 해가 저물어가니 심사가 어둡고 불편하나    暮年心事屬幽偏
산문에 이를 때마다 생각에 전념한다네.          每到山門思獨專


왕으로부터 사액을 받아 팔봉서원이 되다
 
 팔봉서원
 팔봉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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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탄서원이 팔봉서원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1672년이다. 충주 유생(儒生) 한치상(韓致相) 등의 상소가 받아들여져 나라로부터 교서가 내리고 팔봉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상소내용을 보면 충주 유림이 이자 등 기묘명현을 존경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이자와 관련된 팔봉서원 기록은 1752/53년 간행된 이자 선생 연보와 문집 <음애집>에 나타난다.

그 후 <왕조실록>과 <일성록>, 문집이나 사서에 팔봉서원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1796년(정조 20)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을 충주 팔봉서원, 운곡서원, 누암서원, 충렬사에 나눠준 기록이 있다. 그리고 200여년 후 팔봉서원이 훼철된다. 1871년 1인 1서원 배향원칙을 따르라는 예조(禮曹)의 명으로 팔봉서원이 철폐된 것이다. 이때 함께 훼철된 충주의 서원이 팔봉서원, 운곡서원(雲谷書院), 누암서원(樓巖書院)이다.

팔봉서원은 그 후 100년 이상 근근히 명맥만 유지한다. 배향인물 네 분의 위패는 모시지 못하지만, 네 개 단을 쌓고 낮은 담(壝)을 쌓아 서원 공간임을 분명히 한다. 다행히 1998년 정부 지원과 후손들의 출연으로 서원이 재건된다. 팔봉서원은 달천강을 낀 서쪽 경사면에 동남향으로 위치한다. 서원 건너편에는 칼바위(劍巖)가 있다. 서원 외부에 자연석축을 쌓고 담장을 두른 다음 솟을삼문을 설치했다.

서원 내부로 들어가면 정면에 사당이 있고 오른쪽에 재실(齋室)이 있다. 사당을 바라볼 때 왼쪽에 팔봉서원 중수기념비가 있다. 팔봉서원 재건 후 매년 음력 3월 20일 춘계제향을 지낸다. 그러나 제향과 교육의 두 가지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진 못했다. 팔봉서원은 2003년 6월 13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129호로 지정된다. 다행히 2018년부터 문화재청의 지원으로 팔봉서원 문화재 활용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를 통해 3년째 팔봉서원과 달천에서 교육과 문화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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