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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태정호 옮김, 한길사, 1996.
▲ <인간의 조건> 책표지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태정호 옮김, 한길사, 1996.
ⓒ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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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지위상승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H. Arendt)는 책 <인간의 조건>에서, 일을 '노동'과 '작업'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노동은 'labor', 직업은 'work'다. 다소 막연한 느낌이어서 철학적 설명을 시도하긴 어려울지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둘 사이에서 미세한 차이를 감지할 수 있다.

아렌트는 <서양철학사>에서 이 두 단어가 동일한 뜻으로 취급돼 온 것을 모순으로 지적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아렌트는 마르크스의 노동이론을 비판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인간이 일할 때 '어떤 일'이냐에 따라 그것을 노동 또는 작업으로 구별해볼 수 있는데, 노동해방의 이론가 칼 마르크스(1818~1883)는 이 두 단어를 혼용했다.

사실은 그 전에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1723-1790)도 그랬다. 인간의 권리로서 자유를 주장한 존 로크(1632-1704)도 마찬가지로 혼용했다. 혼용의 방식은 노동에 작업을 귀속시키는 형태였고, 혼용의 결과는 노동의 지위격상이었다
.
"노동이 가장 낮고 미천한 위치로부터 인간활동 중의 최고이자 가장 상위의 지위로 갑작스럽고도 눈부시게 상승하게 된 것은 로크가 노동을 모든 부의 원천으로 발견했을 때부터이다." - <인간의 조건> 156쪽

아렌트의 표현을 따르면, 위의 세 사람은 노동의 지위상승에 차례로 관여했다(156쪽). 출생년도로 볼 때 대략 90년씩 간격이 있는 세 사람은 노동의 지위에 관한 한 점진적 상승단계의 한 부분씩을 맡은 것처럼 보인다. 로크에서 시작된 노동의 지위상승은 스미스를 거치면서 확고해지고, 마르크스에 이르러서는 정점을 찍었다.

여기까지만 읽고, 혹시 이런 질문이 떠올랐을지 모르겠다. 어허, 아렌트는 노동의 가치를 높이 보는 것이 불만스러운가?

아니다. 아렌트는 노동의 지위상승에 관하여 불만스러워한 것이 아니다. 아렌트는 인류역사에서 노동의 지위가 왜, 어째서 '상승을 위한 노력'이 따로 필요할 만큼 폄하되어있었던 것인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졌다. 그 질문에 대한 응답을 찾던 끝에 마침내 아렌트는, 마르크스 이전에 인류사에서 오래도록 노동이 과도하게 멸시돼 온 핵심적 이유를 밝혀냈다. 노동이 인간의 생존(삶의 필연성)에 직결되고, 자연친화적이기 때문이었다.

생존에 직결되는 활동보다 그렇지 않은 활동을 더 고상한 것으로 쳐주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연에서 독립 못한 동물적 삶보다 자연 이상의 존재로 인간을 확인하고 싶은 사회적 공감대 탓이었을까? 유사 이래 노동은 끈질기게 천시받아 왔다.

노동과 생존

인간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목적을 갖고 일을 개시한다. 첫째는 생존하기 위해서다. 생존하기 위한 일은 노동이다. 먹고살기 위해 인간이 하는 일은 노동이다. 다음으로, 인간이 일하는 두 번째 이유는 뭔가를 만들기 위해서다. 이때의 일은 작업이며, 작업자는 작업의 결과물을 통해 자기의 고유한 인격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각각의 특징을 따라 편의상 이름을 붙이면 앞의 것은 생계의 일(삶의 필연성), 뒤의 것은 인격의 일(인격의 독립성)이 될 것이다. 

좀 더 명확한 구분을 위하여, 토기장이의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가마에서 토기를 꺼낸 토기장이가 그것을 망치로 때려부수고 있다. 사용하는 데엔 별 지장이 없지만 그의 눈에 아주 작은 흠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지금 그의 행동은 그가 삶의 필연성보다 인격의 독립성에 더 비중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돈 못 벌어도 좋으니 작품이 좋아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서 망치를 휘두를 때 그는 작업자에 가깝다.

그런데 토기판매가 유일한 생계수단인 가정이라면 그런 장인정신은 가족들의 원망 섞인 눈총을 받게 될 것이다. 동일한 일(토기 제작)을 노동으로 보느냐 작업으로 보느냐에 따라, 토기장이의 토기 파손행동이 달리 평가될 수 있다. 

생계의 일과 인격의 일이 이렇듯 겉으로 동일해 보일 수 있기에 인류역사에서 노동과 작업은 자주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기술을 배우겠다고 각지에서 몰려든 제자들이 찾아와 "스승님!" 하고 무릎꿇는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노동과 작업이 서로 스며들면서, 노동자가 천시되는 것만큼 작업자도 천시되는 길을 걸었다. 노동은 노동대로 가치있으며, 작업은 작업대로 가치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흔히 사람들은 작업을 노동에 붙여 둘을 한꺼번에 심리적으로 '하향평준화'해버렸다. 

그러던 중 칼 마르크스가 등장해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노동이론의 모든 단계에서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개념정의했다. 노동은, 마르크스의 전체 이론체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인간적인 힘'으로 묘사된다. 노동의 가치를 최상급으로 드높였다. 인간은 노동하는 만큼 위대하다! 그러고는, 마르크스는 노동해방을 주장했다. 인간이 "바로 그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인간적인 힘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로 나아가 노동에서 해방되는 것이 마르크스가 말하는 '역사적 진보'의 뜻이다(160쪽).

바로 이 지점을 아렌트는 비판한다. 비판의 한가운데에 아렌트의 다음과 같은 물음이 자리잡고 있다. 노동 때문에 위대한 인간이 바로 그 위대함(노동)을 발휘하지 않는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 어떻게 어법모순으로 들리지 않을 수 있는가?

노동과 수고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 3장('노동' 장)을 시작하며 첫 문장에서 마르크스가 비판받으리라 예고한 바대로(133쪽), 3장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마르크스를 물고 늘어진다. 그러면서 아렌트는, 노동을 '위대한' 것으로 말하지 않고 '복된' 것으로 표현한다. 복됨의 근거는 (어딘가 모르게 역설적 느낌을 주지만) 노동의 수고로움이다.

아렌트는 자기가 알고 있는 서양사회 언어들을 모아놓고, 작업을 가리키는 단어들과 비교해볼 때 노동이라는 단어 쪽에 '수고, 고통'의 뉘앙스가 들어있음을 발견했다. 아렌트가 살펴본 언어들을 표로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134쪽).
 
      노동               작업
그리스어         ponein          ergazestgau 
라틴어            laborare        facere or fabricari 
독일어            Arbeit           Werk 
프랑스어         travailler        ouvrer 
영어               labor            work  

한국어를 몰랐던 아렌트의 비교표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우리말 '노동(勞動)'에도 '수고로울 로(勞)'가 들어있다. 작업(作業)에는 수고로움을 가리키는 뜻이 전혀 없다.

아렌트에 따르면, 수고로운 노동이 복되다. 수고스럽고 고통스러운 노동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 복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아렌트가 수고·고통만으로 점철된 삶을 복되다고 말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렌트는, 수고로운 노동 사이사이에 반드시 적합한 분량의 휴식이 주어져야 인간다운 삶이 영위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충분한 휴식을 보장하지 않은 채 노동자를 노동에만 묶어두는 사회는 비참하고 황폐한 사회라고 비판한다.

아렌트의 마르크스 비판은, 그가 노동의 가치를 너무 높게 보았다는 점에 걸려있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아렌트의 정치철학이 인간다운 삶을 한가롭고 편안한 삶으로 파악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적 삶'을 강조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손 끝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지내는 편안한 삶,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도 배불리 먹고살 수 있는 삶, 그런 삶은 기생하는 삶이거나 비현실적 삶이다. 아렌트는 그런 삶을 인간답지 않은 삶으로 규정하고, 현실적 삶에 행복을 연결했다.
 
"노동에 내재하는 삶의 축복은 작업(work)에서 결코 발견될 수 없으며 또한 일을 성취했을 때 찾아오는 잠깐 동안의 안도감이나 기쁨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노고와 만족이 생존수단의 생산과 소비만큼이나 서로 밀접하게 이어진다는 점이 노동의 축복이다. 그래서 기쁨이 건강한 신체의 기능과 공존하듯이 행복은 과정 자체에 수반한다." - 163쪽

책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인간다운 삶과 그에 걸맞는 현실감각을 강조하기 위하여 마르크스의 노동이론을 비판하였다. 비판의 요점은, 노동은 위대한 게 아니라 복되다는 거다. 이를 뒤집으면 이러한 문장이 탄생하리라. 인간의 삶이란 위대함을 확인하고 성취해가는 과정이라기보다는, 복됨을 누리는 모든 순간들을 바탕으로 하여 성립된다.

덧붙이는 글 | 한나 아렌트를 더 읽고 싶은 분은 제 블로그에 들러주세요. http://blog.naver.com/mindfirst (마음먼저)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지은이), 이진우 (옮긴이), 한길사(2019)


태그:#한나 아렌트, #칼 마르크스, #노동, #작업, #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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