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금토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에는 만파식적이라는 신라 보물이 등장한다. 모든 물결을 잠재운다는 이 악기는 드라마 첫 회 때 등장한 뒤로 등장인물들에 의해 계속 언급되고 있다.
 
만파식적이 1994년에 대한제국 황실에서 두 동강 나는 것으로부터 <더 킹>의 스토리는 시작됐다. 1994년은 물론이고 지금 현재까지도 존재하는 대한제국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드라마에 따르면, 1994년 그해에 황제의 이복동생인 이림(이정진 분)이 형을 살해한 뒤 만파식적을 빼앗았다. 하지만 잠시 뒤 어린 황태자가 삼촌을 향해 겨눈 칼날에 의해 만파식적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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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드라마 <더 킹 : 영원의 군주> 관련 이미지 ⓒ SBS

 
황제는 죽였지만 황위는 빼앗지 못한 이림은 반토막 난 만파식적을 들고 달아났다. 그 뒤 그는 1994년의 대한민국에 등장했다. 동일한 한반도 위에 '대한제국이 있는 우주'와 '대한민국이 있는 우주'가 공존하는 상태에서, 이림이 만파식적 절반을 들고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건너온 것이다.
 
아버지가 피살되는 참혹한 현장에서 만파식적의 절반을 챙긴 황태자 이곤(이민호 분)은 아버지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뒤에도 그것을 소중히 간직했다. 그 역시 그것을 들고 대한민국이 있는 우주로 '차원 이동'한다. '공간 이동'이라 부르지 않은 것은 그의 이동이 동일한 한반도 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실제 존재한 국보 '만파식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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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상의 사전들에서는 만파식적이 전설상의 혹은 설화적인 악기로 소개된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악기가 실제 있었다는 점이다. 일연의 <삼국유사> 기이 편, 만파식적 항목에서는 신라 신문왕이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지정했다(號萬波息笛, 稱爲國寶)"고 서술한다. 만파식적이라 불린 국보가 실제 있었다는 것이다.
 
그랬던 만파식적이 전설상 혹은 설화적인 악기로 현대인들에게 기억되는 것은, 그 제작 경위에 대한 <삼국유사>의 설명이 상당히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런 설명이 현대인들에게만 환상적일 뿐, 고대인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설명이 환상적이라는 점을 이유로 만파식적을 전설상 혹은 설화적인 악기로 치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을 기록하는 현대 국가의 사관(史官)들은 기본적으로 서구식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다닌 학교는 그런 문화적 토양의 영향을 받고 있다.
 
하지만 고대로 갈수록 사관들은 무속인의 기질을 많이 띠었다. 춘추전국시대 이전의 주나라 행정체계를 기록한 <주례>에 따르면, 점치는 점인(占人)들이 사관 역할을 수행했다. 점인들은 자신이 연초에 예언한 일과 실제로 벌어진 일을 연말에 비교할 목적으로 1년간의 사건·사고를 기록했다. 이것이 고대 사관들의 모습이다.
 
사관이 무속인 기질을 갖고 있었다는 점은 이들의 기록 방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표현들이 이들의 기록에 많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기록을 읽는 고대인들은 특별히 이질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그런 표현들이 추상적이고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흔적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무속인이 "동방에서 귀인이 올 것입니다" 같은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예언을 내놓으면, 현대인들은 그것을 자기 자신에 맞게 적절히 해석한다. 종교가 없는 사람이 가족을 잃었을 때 근처 교회 목사가 찾아와 "형제님께서는 하나님 곁으로 가셨으니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라고 위로하면, 기독교를 믿지 않는 유족도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다. 종교인들이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고 지극히 사실주의적으로 말한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다.
 
고려시대에 나온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는 고구려·백제·신라·가야시대 사관들의 기록을 기초로 했다. 무속인 기질을 가진 사관들의 기록을 토대로 역사서를 편찬하다 보니,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곳곳에 환상적인 기록들이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파식적에 관한 '환상적' 기록
 
만파식적에 관한 기록 역시 마찬가지다. 신라 때 나온 이 기록 역시 무속인 성향의 사관들이 남긴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그래서 스토리가 환상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삼국유사> 속의 만파식적 스토리는 당나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김춘추의 손자이자, 당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킨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 시대(681~692년)를 배경으로 한다. 아버지 문무왕을 추모하는 감은사란 사찰이 신라 동해안에 건립된 뒤의 일이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문왕은 '동해의 작은 산이 감은사 쪽으로 다가온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래서 동해안으로 나가 보니, 작은 산이랄 수도 있고 작은 섬이랄 수도 있는 것이 바다에 둥둥 떠 있었다. 그 산은 거북이 머리처럼 생겼고, 산에는 대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대나무는 둘로 갈라졌다가 하나로 합쳐지곤 했다. 하나로 합쳐질 때면,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삼국유사>는 "산 역시 대나무처럼 낮과 밤으로 갈라졌다가 합쳤다는 말이 있다"고 소개한다.
 
신문왕은 신하와 함께 배를 타고 섬으로 건너갔다. 가보니, 용이 있었다. 신문왕은 용에게 "이 산이 대나무와 함께 갈라졌다가 합쳐지곤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물었다. 용은 "비유해서 말씀드리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라며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져야 소리가 나는 것이니, 성왕(聖王)께서 그런 소리로 천하를 다스리실 징조입니다"라고 예언했다. 군주께서도 그런 통합의 정신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될 거라는 말이었다.
 
그런 뒤 용은 "왕께서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부시면 온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라면서 "대왕의 아버지께서는 바닷 속의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다시 천신(天神)이 되셨으며,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하여 이처럼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물을 보내시어 저로 하여금 바치게 한 것입니다"라고 고했다. 문무왕과 김유신이 보낸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세상이 화평해질 거라는 예언이었다.
 
궁에 돌아온 신문왕은 피리를 만든 뒤 곳간에 보관했다. 그랬더니 기적들이 일어났다.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지면 날이 개며, 바람이 멎고 물결이 가라앉았다"고 <삼국유사>는 말한다.
 
신문왕 시대는 백제·고구려를 무너트려 대동강 이남을 확보한 뒤였지만, 새로 편입된 영토에 대한 지배권이 아직 불안정할 때였다. 백제·고구려 땅을 독식할 의도로 나당연합을 결성했던 당나라는, 신라와의 전쟁에 패해 백제 전역과 고구려 일부를 내준 일로 인해 치를 떨고 있었다. 고구려·백제 유민들의 동향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동맹국 당나라마저 배신했으니, 신라 왕실은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정권의 상징물로 내세운 만파식적


이런 상황에서 신문왕 정권이 만파식적을 국보로 지정하면서 백성들에게 위와 같은 스토리를 선전했다.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만파식적을 보유하게 됐노라고 백성들에게 홍보했던 것이다.
 
신문왕 정권이 그렇게 한 이유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합쳐져야 소리가 나는 대나무로 만든 만파식적을 정권의 상징물로 내세운 것은, 고구려·백제 유민과 신라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내야 했던 당시의 정치적 과제를 반영하는 것이다.
 
만파식적 스토리 속에는 그런 정치적 과제 외에 또 다른 통합의 과제도 담겨 있다. 바로, 종교적 화합의 필요성이다.
 
신문왕은 용에게서 계시를 받았다. 그 용은 천신을 거론했다. 또 문무왕 역시 용이 됐다. 용이나 천신은 무속과 친숙한 전통 신앙과 관련된 개념들이다. 따라서 불교와는 잘 맞지 않았다. 그런데 만파식적 스토리에서는 용이 탄 작은 산이 감은사로 다가간다. 또 감은사에서 추모되는 문무왕이 용이 된다. 전통 신앙과 불교의 화합을 촉구하는 메시지라고 볼 수 있다.
 
527년 이차돈 순교를 계기로 신라 왕실은 불교를 믿었지만, 지방세력들은 여전히 전통 신앙을 고수했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불교가 점차 강해졌지만, 전통 신앙 역시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자는 메시지도 만파식적 스토리에 담겼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통합의 메시지도 만파식적에서 찾아낼 수 있다. 문무왕과 김유신이 각각 용신과 천신이 되어 신문왕 정권을 돕고 있다고 했다. 신문왕의 할아버지인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비주류 왕족인 김춘추 자신과 비주류 귀족인 가야계 김유신의 동맹을 발판으로 왕이 됐다. 이 동맹은 김유신 동생 김문희가 김춘추와 결혼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왕실 내의 근친혼 풍속으로 인해 왕실 밖 여성이 왕후가 될 수 없었던 시대에 가야 핏줄을 가진 여성이 왕후가 되고 거기서 문무왕과 신문왕이 배출됐다. 그래서 당시의 신라 왕실은 이전의 왕실과 차별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덕여왕 편에 따르면, 신라인들은 진덕여왕까지를 성골 임금, 김춘추부터를 진골 임금으로 분류했다. 김춘추의 결혼은 그처럼 중대한 일이었다.
 
이처럼 김춘추 이후의 신라 왕실은 새로운 혈통을 기초로 했다. 김춘추계와 김유신계의 동맹을 기초로 하는 혈통이었다. 그래서 두 혈통이 통합해야만 정권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런 메시지가 만파식적 스토리에도 담겼던 것이다.
 
이처럼 이 스토리에는 고구려·백제 유민과 신라 백성들의 통합, 전통 신앙과 불교 세력의 통합, 김춘추계와 김유신계의 통합을 희망하는 신문왕 정권과 신라 왕실의 비원이 담겨 있다. 분열의 소지를 안고 있는 신라라는 나라를 통합해 대동강 이남을 안정적으로 다스리겠다는 염원을 담은 스토리다.
 
남북 간, 지역 간, 계층 간, 노사 간의 갈등을 겪고 있는 대한민국처럼 고대의 신라도 국가통합을 항상 고민했다. 그런 고민의 산물이 바로 만파식적의 국보 지정과 그 스토리의 생성이었다. 그런 통합의 정신으로 나라를 다스린 결과로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지면 날이 개며, 바람이 멎고 물결이 가라앉았다"고 <삼국유사>는 말한다.
 
위 문장은 그런 일들이 실제로 똑같이 벌어졌음을 서술한 것이라기보다는, 만파식적 정신으로 다스리다 보니 임금의 직분이 성공적으로 수행됐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만파식적을 드라마 <더킹>은 제1회 방송분에서 두 동강 냈다. 통합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만파식적을 부러트리는 것으로부터 드라마가 시작된 것이다. <삼국유사> 스토리대로라면 만파식적은 반드시 합쳐져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소리를 낼 수 있다. <더 킹>이 이 과제를 어떤 식으로 해결할지 지켜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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