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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린 화가의 이야기와 생각을 들여다보는 것은 그림에 대한 이해를 넘어 예술가, 그리고 한 인간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인간과 사물, 세상에 대한 그들의 철학과 고민을 엿보고 인간으로서의 좌절, 고통, 자부심, 고집을 조명해보면서 그림이 전달하는 의미와 그 너머 화가의 존재를 인식해보고자 한다. - 기자 말

어떠한 구속도 싫어하고 오로지 자유와 자연을 갈망하며 자신과 자신의 그림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다소 과장되고 연극적인 존재감을 과시한 구스타프 쿠르베. 자신의 생각이 확고하고 자기애가 강한 사람들의 특징이 그러하듯 그는 언제나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남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고 싶어했다.

경제적으로는 물론 특히, 정치적으로도 근대적 사고의 기운이 꿈틀대면서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던 쿠르베에게 자신의 이러한 성격은 더없이 적절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대의 부침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던 탓에 과도한 책임을 떠안게 되면서 그의 말년은 안타까움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리얼리즘의 총아인 쿠르베는 어떠한 이론이나 스타일을 떠나 오로지 자신의 그림을 통해서만 리얼리즘을 보여주었다. 아카데미의 역사화에 해당하는 신화, 성경, 역사의 이야기가 과거와 이상에 매달리는 것에 반발해 쿠르베는 '지금, 여기'에 주목했다. 즉, 쿠르베의 리얼리즘은 당대를 살아가는 동시대 예술가로서 지나간 과거, 이상화된 허구가 아닌 '살아있는 역사'를 담아내야 하는 임무를 의미했다.

그리고 살아있는 역사는 신이나 성인, 영웅, 지도자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보통의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 마을 주민들의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보통 사람들이 때마침 역사의 전면에 새롭게 등장하는 주요한 세력으로 자리하면서 기득권들에게는 위협적인 요소로 여겨졌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다소 낭만적이면서도 서정적이기도 한 시골 사람들의 모습으로 아카데미의 호감을 받았지만 1849년부터 쿠르베의 그림은 점점 칙칙하고 거칠며 불편하고 음흉한 그림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오르난스의 장례식'이 대표적이었다. 그림 속에는 동네 주민의 장례식에 참석한 마을 사람들이 빼곡히 그려져있다.
 
오르난스의 장례식(1850) 구스타프 쿠르베 Source:  Wikimedia Commons
▲ 오르난스의 장례식(1850) 구스타프 쿠르베 Source: Wikimedia Commons
ⓒ 오르셰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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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누구의 장례식인지, 심지어 장례식이라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그곳이 오르난스라는 사실만이 중요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들이 모여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삶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 그들이 살아가는 마을을 둘러싼 자연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을 뿐이다.

즉, 아무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아무 곳도 아닌 그림을, 그것도 역사화의 크기에나 어울릴 법하게 어마하게 큰 그림으로 그려낸 쿠르베는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깨달았던 것 같다. 바로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어떠한 편견이나 차별없이 있는 그대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존재로 그리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 주변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 그림들은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논란을 불러왔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바꾸려는 전복적인 의도로 이러한 그림들을 그렸다고 하기는 어렵다. 단지 어떠한 것을 그려야한다 라든지 그리지 말아야 한다 라는 제한과 구속이 싫었을 뿐이다. 눈에 보이는 대상 중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무엇이든 그리겠다는 생각 자체가 전복적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리라.

쿠르베는 자신이 만들어낸 오해와 소란을 잠재우기 보다는 오히려 허풍스럽게 더욱 부추기는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곤 했다. 이러한 탓에 그의 존재는 위협적인 동시에 풍자와 놀림의 대상이 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뚝심과 고집만은 대단해서 쿠르베는 어떠한 비난이나 조롱에도 끄떡하지 않고 줄기차게 자신의 길을 밀어부쳐 나갔다.

"나는 어떠한 종류의 제도에도 속하지 않으며 고대의 예술이나 현대의 예술이나 그 무엇에 어떠한 편견도 없다. 나는 단지 그 어떠한 것도 모방하거나 복사하고 싶지 않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안일한 목표를 갖고 싶지도 않다. 나는 단지 전통에 대한 완벽한 습득에 근거하여 나만의 개성을 분별하고 이해하여 독자적으로 발현하고 싶었을 뿐이다.'"

과연 쿠르베는 자신을 얽어매는 어떠한 제도, 제한, 편견에 맞서 끊임없이 싸워나갔고 이러한 과정에서 일어나는 온갖 불협화음을 오히려 즐기기라도 하는 듯 조금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물론 1855년 유니버설 엑스포지션에 출품되지 못한 자신의 대표작을 포함한 44개의 작품으로 개인 전시를 연 것이 성공은 커녕 실패에 가까웠던 탓에 개인적 손해를 면치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 이후로 쿠르베는 더 이상 어마한 크기의 선언적인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지만 세상의 근원이자 원시성을 느낄 수 있는 순수함으로서 자연과 동물, 생명력이 가득한 날 것 그대로의 여성성 등을 여과없이, 다시 말해서 진실되게 보여주는 그림들을 계속해서 그려나갔다.

그 중에서도 자신의 고향 마을의 숨겨진 곳곳을 찾아다니듯 그려낸 바위, 시내, 나무, 동굴 그림들과 사냥을 하면서 마주한 야생 동물의 은신처나 치열한 먹이 싸움 현장 등을 담아낸 그림들은 대중들에게도 꽤나 인기가 높았다. 쿠르베가 그린 여성들의 누드 또한 당시 은밀한 성적 방종이나 취향을 즐기는 수집가들이 개인 소장용으로 주문하고 모으면서 수요가 꾸준했다. 아카데미에도 계속해서 당선되고 대중에게 인기도 높아지면서 쿠르베는 과연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눈 위의 여우(1860) 구스타프 쿠르베 Source: Wikimedia Commons
▲ 눈 위의 여우(1860) 구스타프 쿠르베 Source: Wikimedia Commons
ⓒ Dallas Museum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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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저항성이 짙은 그림에 대해 쿠르베를 지지하던 비평가와 동료 예술가들은 쿠르베의 이러한 행보에 비판적인 평가를 내리며 그의 진정성을 깎아내렸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쿠르베의 진정성은 넘치는 생명력으로서의 자연과 인간에 있었다.
쿠르베가 거부하는 것은 생명력을 좀먹는 어떠한 형태의 구속이나 제한이었다. 그것이 자유로운 예술을 제한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아카데미든 정부든 하다못해 결혼이든, 애인이든, 자식이든 쿠르베는 용납하지 않았고 그 어떠한 것도 예외가 없었다.

따라서 쿠르베를 정치적이라고 하는 것은 단편적인 평가에 지나지 않으며 쿠르베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 셈이 된다. 자신들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한 것일 뿐이었으며 자신들이 평가하고 싶은 대로 평가한 것일 뿐이다. 지극히 인간적이면서도 자연적이고, 자유로우면서도 진솔한 그의 성향과 철학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쿠르베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단편적인 큰 오해 중 하나는 그의 인생 말년에 크나큰 족쇄로 작용하고 말았다. 제2제정, 파리코뮌을 거치며 예술 분야에서 권력의 핵심으로 잠깐 활동했던 쿠르베는 이후 들어선 정부에 의해 방돔 기둥이 무너진 것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받게 되어 1871년 6개월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된다.

하지만 그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방돔 기둥을 다시 짓기로 결정한 정부는 쿠르베에게 자금 충당의 부담을 지웠고 이를 거부하거나 피할 수 없게 된 쿠르베는 1873년 황망하게 고국을 떠나 스위스로 망명을 떠난다.

그곳에서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한 노력으로 돈을 벌기 위해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지만 이미 몸도 마음도 역부족이었다. 스위스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림에 담았지만 왠지 생명력이 결여된 듯하다. 그토록 사랑했던 고국과 고향 마을, 주변의 가족과 친구가 사라진 그곳에서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뮤즈는 물론이고 동력 또한 사라졌던 것이다.
 
송어(1873) 구스타프 쿠르베 Source: wikiart.org
▲ 송어(1873) 구스타프 쿠르베 Source: wikiart.org
ⓒ 오르셰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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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그린 'The Trout'(1873)은 미끼를 문 채 피를 흘리며 물 밖에 놓인 송어의 무기력하고 애처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감옥에 갇혀있던 당시 자유를 빼앗긴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었기에 그림에는 '결박된 상태에서 그려진' 것이라고 새겨져있다.

지칠 줄도 모르고 주눅들지도 않았던 아니, 오히려 더욱 힘을 내었던 과거의 몸부림은 이제는 더이상 가능하지도, 의미도 없게 되어버렸다. 송어의 눈은 차마 이대로 갈 수는 없다는 호소와 탄식으로 가득해 보인다. 자비없는 현실 앞에서 자신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아쉬움과 그리움 또한 가득한 것은 어쩔 수 없다.

태그:#쿠르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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