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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에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한참 선배였다. 그리고 두 명은 르네상스 최고의 천재이자 라이벌이었고 작업 방식에서 성격까지 매우 상반되었다.

두 거장의 콤플렉스

미켈란젤로는 어렸을 때 기를린다요 공방에서 그림을 배웠다. 이 시절 동료들과 피렌체 곳곳에 있는 거장들의 그림을 모사하며 연습했다. 그러다 브랑카치 예배당에서 마사초의 그림을 모사할 때 다른 친구의 그림이 형편없다며 독설을 날린다.

미켈란젤로보다 나이도 많고 덩치도 컸던 그 친구는 화가 나서 주먹을 날렸고, 미켈란젤로의 코뼈는 눌러앉았다. 그의 코뼈는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는 외모 콤플렉스로 이어졌고 그의 성격을 더 괴팍하게 만들었다.
 
미켈란젤로 흉상(바르젤로 미술관) 브랑카치 예배당에서 동료가 날린 주먹에 코뼈가 눌러 앉았다. 당시 의료 기술이 부족하여 눌린  코뼈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 미켈란젤로 흉상(바르젤로 미술관) 브랑카치 예배당에서 동료가 날린 주먹에 코뼈가 눌러 앉았다. 당시 의료 기술이 부족하여 눌린 코뼈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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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이런 독선적 성격 때문에 친구가 별로 없었다. 언제나 혼자서 작업을 했으며 제자도 없었다(조르조 바사리가 미켈란젤로의 제자라고 하지만 본인의 주장일 뿐이다). 천지창조 작업을 할 때도 조수들의 실력이 마음에 들지 않자 모욕적인 말로 모두 내쫓아 버린다. 그리고 그 큰 천장을 혼자 고집스럽게 작업한다.

미켈란젤로는 가족과도 그리 가깝지 않았다. 가족들은 미켈란젤로의 수입에만 관심이 있었다. 처음 다비드 조각을 맡았을 때, 아버지 루드비코 부오나로티는 보수가 너무 적다며 다른 일을 맡으라고 역정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평생에 걸쳐 미켈란젤로에게 돈을 요구한다. 이렇게 미켈란젤로는 가까운 친구와 가족도 없이 지독한 고독 속에서 영혼을 불태우며 작업했다.

반면 다빈치는 외모부터 훤칠한 미남이었다. 그리고 우아한 언행으로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하지만 다빈치는 출생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는 빈치라는 마을의 한 유력 가문에서 공증인으로 일하던 피에로 다 빈치와 어느 여관집 주인이자 농부의 딸인 카타리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이런 비천한 출생 이력 때문에 더 화려하게 자신을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미켈란젤로의 분노

미켈란젤로가 다비드를 완성해가던 1504년, 피렌체 정부는 청사 건물 내 대회의실의 벽화를 다빈치에게 의뢰했다. 세로 8미터, 가로 20미터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였다. 이 소식에 미켈란젤로는 매우 분노했는데 그 이유는 크게 예술가의 자존심, 다빈치의 이력, 그리고 금전적 문제였다.

1504년 다비드로 인해 가졌던 최고의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였다. 미켈란젤로와 다비드에 대한 찬사는 금방 잦아들었고 피렌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토스카나 제일의 예술가'로 칭송했다. 게다가 다빈치는 언제나 조각이 회화보다 아래라고 하니 예술가로서 미켈란젤로의 자존심이 온전할 리 없었다.

그리고 다빈치의 과거 이력도 미켈란젤로에게 큰 불만이었다. 회화 외에도 다방면에 재능을 발휘했던 다빈치는 벽화를 맡기 직전에 로마냐의 공작인 체사레 보르자의 군사 자문으로 일했었다. 그런데 보르자는 피렌체와 적대 관계였다. 그래서 미켈란젤로가 보기에 다빈치가 보르자의 군사 자문을 맡은 것은 이적 행위였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정부 청사 벽화를 그릴 수 있겠는가?

또한, 처우에 대한 격차 역시 미켈란젤로를 화나게 했다. 피렌체 정부는 청사 벽화를 2년 안에 완성한다는 조건으로 다빈치에게 1만 플로린을 약속했다. 그런데 미켈란젤로가 다비드를 조각하면서 받았던 보수는 총 400플로린 남짓이었다. 다빈치에게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미켈란젤로였기에 25배나 차이 나는 금액에 화가 나는 것은 당연했다.

미켈란젤로는 정부 수반인 소데리니를 찾아가 자기에게도 벽화를 맡겨달라고 졸라 댄다. 끈질긴 요청 끝에 결국 미켈란젤로는 다빈치가 맡은 벽의 바로 맞은 편 벽에다 프레스코화를 그릴 수 있는 계약을 따낸다. 이때 정부가 미켈란젤로에게 약속한 보수는 다빈치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3천 플로린이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흔쾌히 받아들인다. 다빈치보다 멋진 작품을 그린다면 정부의 처우 역시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빈치의 앙기아리 전투, 용병의 폐해

다빈치는 앙기아리 전투를, 미켈란젤로는 카시나 전투를 주제로 정했다.다빈치에게 앙기아리 전투를 요청한 것은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1527)였다고 한다.

마키아벨리는 당시 정부에서 국방과 외교 업무를 담당했는데, 1501년과 1502년에 체사레 보르자를 방문한다. 두 번째 방문에서 보르자의 군사 고문이었던 다빈치를 만나서 가까워진다. 그리고 비록 긴장 관계였지만 보르자의 리더십과 군사력을 높이 평가했다.

마키아벨리는 나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강한 군사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자체 군대를 보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피렌체는 용병으로 전쟁을 치렀다. 시민들의 희생을 줄이고 생업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용병 입장에서는 죽지 않고 최대한 전쟁을 끌어야 더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었다(관련기사 : 일부러 안 죽이는 '희한한' 전쟁).

이런 용병의 폐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1440년 앙기아리에서 벌어진 피렌체 동맹군과 밀라노 사이의 전투였다. 4시간에 걸쳐 수 천명이 맞붙은 전투 끝에 피렌체가 승리했지만 전사자는 말에서 떨어진 병사 한 명에 불과했다.

용병으로 구성된 양측의 군대가 싸우는 시늉만 했기 때문이다. 이때 밀라노의 용병대장이었던 니콜로 피치니노는 1422년 피렌체에 고용된 적이 있었다. 그때도 피렌체는 밀라노와 전쟁 중이었는데 피치니노는 밀라노가 더 큰 금액을 제시하자 피렌체를 배신해 버렸다.

이렇게 앙기아리 전투는 용병의 폐해를 알리기에 아주 좋은 사례였고 그래서 마키아벨리가 이 주제를 다빈치에게 부탁했다. 하지만 피렌체 지도층은 자체 군대를 만드는 것을 주저했다. 시민들에게 쥐어준 무기가 혹시라도 자신들을 향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또 용병 비용을 대기 위해 발행하는 국채는 부자들에게 좋은 투자처가 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카시나 전투, 용병의 효용성

미켈란젤로와 다빈치가 벽화를 그릴 당시에 피사가 독립을 선포하고 피렌체에 반기를 들었다. 피렌체에게 피사는 매우 중요한 수출 항구였기 때문에 반드시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

이때 고용한 용병대장에게 지급한 비용이 7만 플로린, 우리 돈 560억원에 달했다. 이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정부는 이율이 연 5~10%에 달하는 국채를 발행했고 부자들은 이 국채를 구입해 짭짤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용병 제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미켈란젤로에게 카시나 전투를 그리도록 요청한다.

카시나 전투는 과거 피렌체가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피사를 굴복시켰던 전투였다. 뜨거운 여름 날 피렌체군은 더위를 식히기 위해 목욕 중이었다. 이때 적의 공격을 알리는 경보가 울렸고 병사들은 허겁지겁 물에서 나와 전열을 정비한다. 미켈란젤로는 바로 이때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그리려고 했다.

그런데 이 경보는 병사들의 긴장을 유지하기 위한 사령관의 거짓 경보였다. 이렇게 군기를 철저하게 관리한 덕분에 피렌체 군은 피사를 굴복시킬 수 있었다. 이때도 피렌체 군대는 용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용병은 군기가 흐트러져 제대로 전투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측에게 카시나 전투는 좋은 반박 사례가 되었다.

사실 미켈란젤로가 카시나 전투를 주제로 잡은 것은 피렌체의 과거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본인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는 주장과 기득권의 의뢰라는 주장이 나뉜다. 어쨌든 용병제의 폐해와 효용성을 나타내는 그림이 나란히 그려지는 상황 자체만으로도 매우 흥미롭다.

하지만, 이 대결은 허무하게 끝나고 만다. 미켈란젤로는 과거 피에타를 조각할 때 교황과 맺었던 영묘 제작 계약을 완료하기 위해 로마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다빈치 역시 과거 밀라노의 한 수도원과 계약했던 '암굴의 성모'를 완성해야 했기에 피렌체를 떠나야 했다. 두 거장의 맞대결이 중도에 중단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몹시 아쉽다.
 
팔라초 델라 시뇨리아(팔라초 베키오)   원래 역대 정부 수반의 초상화가 있었던 이 건물 대회의실에서 두 거장의 대결이 있었다. 대결이 중간에 무산된 이후 바사리가 '마르시아노 전투' 벽화를 그렸고 지금까지 명작으로 남아 있다.
▲ 팔라초 델라 시뇨리아(팔라초 베키오)  원래 역대 정부 수반의 초상화가 있었던 이 건물 대회의실에서 두 거장의 대결이 있었다. 대결이 중간에 무산된 이후 바사리가 "마르시아노 전투" 벽화를 그렸고 지금까지 명작으로 남아 있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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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어빙 스톤, <르네상스인 미켈란젤로>, 이인철 옮김, 까치
조반니 파피니,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정진국 옮김, 글항아리
로스 킹, <미켈란젤로와 교황의 천장>, 신영화 옮김, 은나팔(현암사)
성제환, <당신이 보지못한 피렌체>, 문학동네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 권혁 옮김, 돋을새김
김경희, <마키아벨리-르네상스가 낳은 이단아>, 아르테
조르조 바사리,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 이근배 옮김,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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