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작가로서 대가의 반열에 오른 김은숙의 신작 <더 킹: 영원의 군주>(이하 더 킹)가 방영 중이다. '더 킹'은 차원의 문(門)을 닫으려는 이과(理科)형 대한제국 황제 이곤(이민호 분)과 누군가의 삶, 사람, 사랑을 지키려는 문과(文科)형 대한민국 형사 정태을(김고은 분)이 두 세계를 넘나드는 공조를 그린 판타지 로맨스다. 6회분까지밖에 방영되지 않았음에도 반응은 어쩐지 싸늘하기만 하다. 김은숙 표 멜로가 더 이상 시청자들의 호응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멜로에 대한 고민 없는 '멜로 장인' 김은숙 월드의 확장

2004년 <파리의 연인>으로 스타 작가 반열에 오른 김은숙 작가는 '멜로 장인'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그러나 이 호칭은 김은숙의 꼬리표이기도 했기에 본인도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오래도록 애써왔다. 판타지와 멜로를 결합한 <시크릿 가든>(2010~2011)과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2016~2017, 이하 <도깨비>), 멜로 액션 블록버스터 <태양의 후예>(2016), 구한말의 항일 투쟁기를 다룬 시대극 <미스터 션샤인>(2018)을 통해서 멜로의 장르적 융합과 확장을 시도해왔다. 위 작품들을 통해 김은숙 작가는 서사적 확장에 대한 인정을 평단에서 얻어냈다.

동시에 김은숙 표 '멜로' 자체에 대한 비판은 매번 반복됐다. 앞에서 언급한 작품들은 남성 주인공에 의해 결정된 세계관이었고, 결국 남성 숭배 판타지가 넘치는 세계에 또 다른 서사를 부여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파리의 연인>(2004)에서 성인 여성에게 "애기야"라 칭하며 비주체적 인물로 대우하는 것을 로맨스로 등치했다. <도깨비>에선 916살 나이 차 나는 아저씨가 촛불을 끄면 나타난다.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 포스터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 포스터 ⓒ SBS

 
<더 킹>에서도 차원의 공간을 넘나드는 정말로 백마를 탄 황제가 일개 형사를 황후로 맞이한다. 고대 설화에서부터 내려오는 조력자 여성과 남성 영웅을 중심에 둔 서사를 김은숙은 2020년에도 끝내 소환한다.

본인의 세계관 확장에만 집중한 나머지 '멜로 장인'이라는 칭호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는 것이 자명해졌다. 자신의 멜로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할 때마다 여성 혐오의 유구한 스토리를 기틀에 세워놓고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봤자 매번 같은 비판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구원해 줄 남성, 남성 숭배를 뿌리로 하는 스토리를 화려하고 복잡한 세계관으로 덧칠해봤자 혐오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그렇기에 <도깨비>에서 "사과해요, 남자답게. 반지 따악, 백 따악, 카드 따악", <더 킹>에서 여성 총리가 "와이어가 없는 브라는 가슴을 못 받쳐줘서요" 등 필요치 않은 여성 혐오가 등장하게 된다. 최초로 여성 총리에 올랐음에도 끊임없이 스캔들을 자가증식하기 위해 애쓰고 황제의 사랑을 얻으려 하는 인물로 묘사될 뿐이다. 2010년대에 '멜로 장인'의 칭호를 2020년대에는 '신데렐라 스토리 장인'이라는 칭호로 구체화해야 할 때가 되었다.
 
성의 없는 로맨스와 멋대로 뽑힌 신데렐라

SF, 즉 과학 판타지에 또 멋진 왕자를 만나 신분 상승하는 판타지를 끼얹어버린 <더 킹>의 설정은 과도하다. 평행세계에 대해 언제 어디를 이야기하고 싶은 건지 시청자들은 당최 맥락을 잡을 수 없다. 드라마가 끝나야 세계관을 납득시키고 싶은 걸까.

"왜 그래, 맥시무스(이곤이 탄 백마의 이름)"라는 대사를 아무렇지 않게 읊던 이곤이 동시에 자신의 신분을 내세워 팔지 않는 시식 빵을 사려고 하거나 밀크티를 공짜로 사려고 하는 혼란스러운 캐릭터는 성의가 없다. 지구가 둥글다는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명제를 의문시하는 '문과형' 형사 정태을과 물리학에서도 가장 어렵다고 여겨지는 양자역학을 운운하는 '이과형' 수학자 이곤의 대사는 유치하다. 학자라고 하면서 다른 세계의 규칙을 알려고도, 규칙에 적응하려고도 하지 않고 반말을 계속하는 이곤이나, 그런 이곤을 빠르게 이해하는 정태을을 시청자는 이해할 수 없다.
 
 드라마 <더 킹> 스틸 컷

드라마 <더 킹> 스틸 컷 ⓒ SBS

 
세계관을 넓히고 싶은 작가 본인의 야망은 도리어 허름한 멜로에 대한 상상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2화에서 이곤은 직계가족이 평행세계에 없기 때문에, 25년 전 신분증이 정태을의 것이었기 때문에 "내가 자넬 내 황후로 맞이하겠다"라 선언한다. 이곤이 평행세계에 머무를 자리를 만들기 위해 정태을에게 중요한 자리를 내어주고 이용할 핑계를 로맨스로 위장한다.

왜 사랑에 빠지는지에 대한 설득도 상호의 감정 교류도 전혀 없이 얼결에 신데렐라가 된 정태을은 왕자의 의지에 따라 멋대로 뽑힌 트로피가 되었다. 그런 신데렐라를 보고 시청자는 당황할 뿐이다. 인간관계에 관한 이해를 보여주는 게 멜로물 임에도 <더 킹>은 관계의 이해를 포기해버렸다. 다양한 여성의 다채로운 욕망과 관계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여성은 그런 서로를 봐왔고, 왕자 없이도 사랑을 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더 킹>은 멜로의 주 시청 층인 여성에게 빈약한 이야기를 가진 채로 선보여졌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멜로 장인'이 필요하다.

17년 동안 제기된 여성 혐오에 관한 비판을 김은숙 작가가 모를 리 없다. 2017년 콘텐츠 인사이트에서 진행된 토크콘서트에서 김은숙 작가는 자신의 딸이 대본을 쓰는데 "남자 주인공이 전학을 왔는데 재벌 2세고, 여자 주인공은 고아"라며 본인이 "뭔가 큰 잘못을 한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하물며 자신의 딸이 영향을 받아온 스토리를 전 세계에 수출하고 있는데 작가로서 사회적 영향력을 한 번쯤은 고민해봤을 것이다.

김은숙 작가의 전작을 이 시대에 다시 보라고 한다면 고역일 것이다. 유치하고, 뻔한 스토리라인을 욕하면서도 볼 게 없어서 보던 시대는 지났다. 시청자의 취향을 분석하고 맞춤 영상을 제안하는 서비스가 늘어나면서 시청자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이 보고 싶은 콘텐츠를 찾아본다. 넷플릭스와 왓챠, 유튜브 등 수많은 OTT 서비스 속에서 소위 욕하면서도 보게 되는 드라마는 살아남을 수 없다.

불편함 없이 재미있는 콘텐츠만이 살아남는다. 할리우드 역시 세계의 흐름을 읽으며 여성 히어로가 주인공인 <캡틴 마블>(2019)을,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2019)를 만들었다. 여성 혐오를 기틀로 한 서사는 잊혀진다. <빨간 머리 앤>(넷플릭스, 2017), <작은 아씨들>(2019)들이 다시 제작되고 작년 10월 패딩턴을 만든 스튜디오캐널(Studiocanal)은 <말괄량이 삐삐>를 다시 영화화하겠다 발표했다. 여성서사가 재평가 받는 시대다. 이에 반해 김은숙 작가가 이때까지 써왔던 멜로의 유통기한은 한계치에 다다랐다.

김은숙 작가는 자신이 원하는 걸 쓸 수 있는 스타 작가이다.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게 이야기를 쓰지 않아도, 충분히 자신의 세계관을 방송국에 제안할 수 있으며, 방송국들은 앞다퉈 그 이야기를 사고 싶어 할 것이다. 아직 한국의 시청자들은 여성혐오를 불편해하면서도 김은숙의 세계관을 궁금해한다.

그러나 세계의 시청자들은 아니다. 욕하지 않고 볼 수 있는 드라마는 널렸다. 김은숙 작가라면 방송국의 관습을 떨치고 자신만의 멜로의 기틀을 혐오가 없는 곳에서 다시 세울 수 있다. 불편하지 않고도 재미있는 멜로를 마음껏 쓸 수 있다. 다시 한 번 처음 글을 썼던 때로 돌아가서 멜로물에 집중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새로운 '멜로 장인', 오래도록 상기할 수 있는 고전을 남기는 김은숙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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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장애, 동물, 환경 등 교차성 운동에 서서 가치로운 일들을 퍼트리는 아티비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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