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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묘사화로 파직된 학포 양팽손이 고향으로 내려와서 지은 학포당. 양팽손은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기묘사화로 파직된 학포 양팽손이 고향으로 내려와서 지은 학포당. 양팽손은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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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란지교(芝蘭之交). 지초와 난초같이 향기로운 사귐을 일컫는다. 격이 다른 두터운 벗 사이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관포지교, 금란지계, 막역지우, 수어지교, 죽마지우도 매한가지다.

여기에 걸맞은 사귐이 있었다. 조선시대 개혁정치의 상징인 정암 조광조와 호남의 큰 인물 학포 양팽손의 만남이다. 덕과 예를 갖춘 두 사람은 서로 존경하며 그리워했다. 혹여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절의도 지녔다. 두 사람의 격이 다른 우정은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면서 회자되고 있다.
   
 정암 조광조의 영정. 조광조가 사약을 받은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유배지의 영정각에 모셔져 있다.
 정암 조광조의 영정. 조광조가 사약을 받은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유배지의 영정각에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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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1482∼1519)는 개혁정치의 상징이다.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언, 홍문관 부제학, 대사헌을 지냈다. 그는 유교를 근본으로 한 왕도정치를 주창했다. 도교를 추앙하던 기존 훈구파의 부패와 비리를 공격한 이유다. 위훈 삭제가 출발이었다. 중종반정으로 공신의 반열에 오른 103명 가운데 78명의 거짓 공적을 삭제했다. 전체 공신의 4분의 3이 해당됐다.

도교 주관 제사였던 소격서도 없앴다. 성리학의 이념을 세우는 데 필요했다. 사회 실천운동으로 덕업상권(좋은 행실 서로 권장), 과실상규(나쁜 행실 서로 규제), 예속상교(서로 사귐에 예의 지킴), 환난상휼(걱정거리나 어려운 일 서로 도와줌)을 4대 덕목으로 한 향약을 실시했다.

시문과 시가 중심의 기존 과거제 외에 학행과 덕행, 성리학적 소양을 보는 현량과를 실시했다. 요즘 쓰는 말로 혁신을 추진할 인재를 따로 뽑았다. 일부 토지를 국유화해 백성에 나눠주는 균전제도 도입했다.
  
 조광조의 삶을 적어놓은 조광조 적려유허비. 1667년 능주목사 민여로가 세웠다. 조광조가 유배돼 사약을 받은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 있다.
 조광조의 삶을 적어놓은 조광조 적려유허비. 1667년 능주목사 민여로가 세웠다. 조광조가 유배돼 사약을 받은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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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집 걱정하듯 하였네/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니/ 내 일편단심 충심을 밝게 비추리.’ 조광조가 사약을 받으면서 남긴 절명시다. 화순군 능주면 조광조 유배지에 있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집 걱정하듯 하였네/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니/ 내 일편단심 충심을 밝게 비추리.’ 조광조가 사약을 받으면서 남긴 절명시다. 화순군 능주면 조광조 유배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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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이 순조롭게 이뤄질 리 없었다. 반대세력의 저항이 거셌다. 훈구세력과 반정 공신들이 한데 뭉쳤다. 조 씨가 역심을 품고 왕이 되려 한다는 '주초위왕(走肖爲王)'이 꾸며졌다. 나뭇잎에 꿀을 발라 벌레가 글씨를 갉아 먹도록 한 사건이다.

1519년 기묘사화다. 조광조는 붕당을 지어 요직을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여 국정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투옥됐다. 사형을 겨우 면하고 그해 11월 전라도 화순 능주(능성현)로 귀양 보내졌다. 유배 25일 만에 사약을 받았다. 그의 나이 37살이었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집 걱정하듯 하였네/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니/ 내 일편단심 충심을 밝게 비추리.' 조광조가 사약을 받으면서 남긴 절명시다.

조광조가 유배됐던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 적려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조광조의 일생을 알려주는 비석이다. 1667년 능주목사 민여로가 세웠다. 비문을 우암 송시열이 짓고, 글씨를 송준길이 썼다. 조광조가 유배 때 생활했던 초가와 영정각이 복원돼 있다.
  
 학포 양팽손과 정암 조광조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화순 죽수서원. ‘죽수’는 현재 화순 능주의 다른 이름이다.
 학포 양팽손과 정암 조광조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화순 죽수서원. ‘죽수’는 현재 화순 능주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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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유배지에서 멀지 않는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에 죽수서원이 있다. '죽수'는 능주의 다른 이름이다. 서원에는 조광조와 함께 양팽손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조광조의 무덤이 있는 경기도 용인의 심곡서원에도 두 사람의 위패가 배향돼 있다. 죽수서원도, 심곡서원도 사액서원이다.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에서 태어난 양팽손(1488∼1545)은 글과 그림에 빼어난 재능을 지닌 학자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불렸다. '천지는 나의 도량이 되고/ 일월은 나의 밝음이 되니/ 천지와 일월은/ 도시장부의 일이라.' 양팽손이 7살 때 썼다는 시문이다. 16살엔 청백리로 이름난 지지당 송흠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양팽손은 조광조와 지초와 난초같이 향기로운 우정을 나눴다. 둘은 1510년 나란히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에서 공부했다. 정계에도 함께 나아가 사림 중심 개혁정치의 중심에 섰다.

둘 사이에 닥친 시련이 기묘사화다. 양팽손은 개혁정치를 지키기 위해 사림을 대표해 조광조의 무죄를 주창했다. 이 일로 파직을 당했다. 고향 화순으로 내려와 학포당(화순군 이양면 쌍봉리)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자신의 호 학포는 '포은 정몽주를 배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둘은 잠깐의 헤어짐 끝에 다시 만났다. 역모죄를 뒤집어 쓴 조광조가 화순 능주로 유배돼 왔다. 양팽손은 날마다 조광조를 찾았다. 말 동무를 하며, 세상과 학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활짝 핀 봄꽃만큼이나 향기로운 우정을 나누며 서로를 그리워했다.
  
 양팽손이 조광조의 시신을 거둬 무덤을 썼던 조대감골. 조광조의 주검이 묻힌 산골이라고, ‘조대감골’, ‘서원터’로 불린다.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다.
 양팽손이 조광조의 시신을 거둬 무덤을 썼던 조대감골. 조광조의 주검이 묻힌 산골이라고, ‘조대감골’, ‘서원터’로 불린다.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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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암 최익현이 세운 정암 조광조 추모비. 양팽손이 처음 조광조의 무덤을 쓴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 이른바 조대감골에 세워져 있다.
 면암 최익현이 세운 정암 조광조 추모비. 양팽손이 처음 조광조의 무덤을 쓴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 이른바 조대감골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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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는 유배된 지 25일 만에 사약을 받았다. 조광조의 주검은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했다. 그의 주검에 눈물을 흘리는 건, 역모에 동조하는 것으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양팽손은 주저하지 않았다. 조광조의 시신을 거둬 자신이 사는 데서 가까운 산골(화순군 이양면 증리)에 묻었다. 초라한 집 한 채를 지어 놓고 제사도 지냈다. 조광조의 시신은 이듬해 경기도 용인으로 옮겨졌다. 조광조의 주검이 처음 묻힌 산골이 '조대감골', '서원터'로 불리고 있다.

양팽손은 끝까지 조광조와의 지조와 절의를 굳건히 지켰다. 서슬 퍼런 권력과 죽음까지도 초월한 우정이었다. 덕과 예로 다스리는 개혁정치의 소신도 굽히지 않았다.
형형색색의 꽃이 만발한 봄날, 학포와 정암의 향기로운 만남을 그려본다. 500년을 이어오고 있는 그 향이 짙고 그윽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새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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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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