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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의 이동준은 인생의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다. 4선 의원이자 집권당 사무총장의 자격으로 자신이 만든 것이나 다름 없는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고 있다. 자신의 희망이자 분신인 아들은 착실하고 계획적으로 정치인이 되기 위한 코스를 밟고 있다. 정권의 실세가 된 그에게 줄을 대기 위해서 가져다주는 돈뭉치도 거절하는 청렴결백함도 과시한다.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고 부러운 것도 없는 결정적 순간에 괴상한 문자가 날아온다. 

그것도 단 세 사람만 알고 있는 비밀 휴대폰으로 말이다. 16년 전 자신이 저지른 살인의 진상을 알고 있다는 암시를 하는 괴 문자 메시지는 평온하고 화려한 그의 일상을 무너뜨리기 충분했다. 인생의 절정기에서 엉뚱한 일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스토리는 흔한 대중 연예 매체의 상투적 수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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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티비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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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앙 작가의 소설 <산매리 저수지>는 이 흔한 포맷으로 비범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368쪽의 적지 않은 분량의 이 소설은 한번 손에 쥐면 내리기 힘들 정도로 독자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어떤 점들이 독자들을 끌어당기는지 이 소설에 배치된 여러 가지 설정과 배경을 살펴보자.

<산매리 저수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한국 추리 소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독특하고 매력적인 지형을 가지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쫓는 자'가 아니고 '쫓기는 자'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추리 소설의 전형은 의문의 사건이 발생하고 그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담는 것이다. 범인이 비록 주변에 있거나, 일찍 소설 속에 등장했더라도 그가 범인이라는 사실은 후반부에나 드러나는 것이 일반적인 추리 소설의 기법이다.

<산매리 저수지>는 철저하게 살인을 저지른 범인의 이동 경로와 심리 상태의 변화에 따라 진행된다. 마치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처럼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심리 상태와 행동에 대한 자세한 분석과 묘사가 뛰어나다.

<산매리 저수지>는 다른 추리 소설처럼 형사는 추적하고 범인은 도망을 다니는 단순한 구조가 아니다. 살인자는 자신의 범죄를 암시하는 문자를 받고 그 문자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집요하게 추리하고 추적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범인이 누구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도대체 누가 범죄 사실을 알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리라.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에 감정이입 되어서 마치 자신이 괴 문자 메시지를 받는 것 같은 공포를 느끼기도 할 것이다.

<산매리 저수지>는 독자들의 궁금증과 흥미를 전방위적으로 펼치고 끌어들인다. 사법시험에 실패하고 은행원이 된 평범한 남자가 어떻게 은행을 그만둔 지 4개월 만에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는지, 여당의 실세에게 감히 누가 괴 문자 메시지를 왜 보내는지, 범인이면서 주인공인 이 남자는 왜 살인을 했는지 그 살인과 출세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수백억 원의 비자금을 어디에 어떻게 숨겨 두었는지 등 이 소설을 다양한 갈래로 독자들의 시선과 궁금증을 자아낸다.

범죄자이기도 하면서 추격자이기도 한 주인공의 이중적인 정체성과 여러 갈래로 분산된 스토리 전개가 복잡하지만, 톱니바퀴처럼 짜임새 있는 전개 덕분에 <산매리 저수지>를 읽으면서 한 단어조차 놓치지 않게 되는 몰입을 하게 된다. 

추리 소설이라고 하면 오로지 피비린내가 진동해야 한다는 상투적인 설정도 이 소설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추리소설로도 삶에 대한 철학과 메시지를 담을 수 있다는 저자의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이 소설 속에서 드러난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살인을 저지른 자의 심리 묘사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탐내는 사람에게 살해당하는 사람이 죽기 직전에 '돈은 종이에 지나지 않는다'며 절규를 하는 모습, 20살 연상의 남자에 대한 애정이 상황에 따라서 어떻게 변모하는지에 대한 묘사만 살펴보더라도 <산매리 저수지>를 추리소설에 묶어 둘 수 없다.

<산매리 저수지>는 저자가 정치학을 전공했고, 정당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한데 그만큼 정치계 주변에서 일어나는 실감 나는 상황이 많다. 존 그리샴의 법정 스릴러에 버금가는 김주앙의 정치 스릴러는 뛰어난 전문성 덕택에 또 다른 몰입 요소를 제공한다. 

정치자금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기업에 거절당했을 때는 분노와 전투력을 배가시켰지만 가진 것 없는 시골 노인에게 용돈을 건네다가 거절당했을 때는 위축되었다고 기술하는 부분은 작가의 상상력으로는 나올 수 없는 대목이다. <산매리 저수지>는 단숨에 읽히지만 여운은 길다.

산매리 저수지

김주앙 (지은이), 비티비북스(2020)


태그:#김주앙, #비티비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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