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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오래된 미래>의 배경이 되는 곳은 '라다크'이다. '라다크'는 '산길의 땅'이라는 뜻으로, 히말라야 산맥들 사이에 둘러싸인 고원지대에 있는 마을이다.

그곳에서는 굳이 분 단위의 시간을 잴 필요가 없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느긋하며 여유롭게, 흘러가는 대로 하루를 보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게으르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루를 몸의 기억에 따라 분류하고, 거기에 맞춰 그날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낸다. 그래서인지 시간을 나타내는 표현 또한 굉장히 시적이다.
 
라다크 사람들은 "내일 낮에 찾아올게" 혹은 "저녁쯤 찾아올게"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라다크 사람들의 언어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표현들이 많이 있다. '공고로토gongrot'는 '어두워진 다음부터 잠잘 시간까지'라는 뜻이고 '나이체nyitse'는 '해가 산꼭대기에 걸려있는 한낮'을 말한다. 또 '새의 노래'라는 뜻의 '치페 치릿chipe-chirit'는 해가 뜨기 전 새들이 지저귀는 이른 아침을 뜻한다. 이 모두가 친숙한 느낌을 주는 표현이다. - <오래된 미래 >  93p.
 
<오래된 미래>의 저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유럽 출신의 언어학자로 라다크의 언어를 배우고 민담을 수집하기 위해 라다크에 왔다가 그곳의 전통과 문화에 반해서 오랜 세월 라다크인과 함께 마을에 머물며 그들의 전반적인 삶의 모습을 기록했다.
 
'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우다' 한국어판 표지
 "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우다" 한국어판 표지
ⓒ 중앙books(중앙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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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기술에 익숙한 서구인의 눈으로 처음 바라본 라다크는 평화롭지만 가난하고 불편한, 어찌 보면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소외된 제3세계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저자는 라다크인의 삶을 관통하는 것은 가족과 이웃이 더불어 사는 공동체 의식, 그리고 자급자족을 통해 욕심 없이 삶을 꾸려나가는 겸허한 태도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라다크인이 행복한 이유였다. 그래서 저자가 서구에서는 불행하기 때문에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을 했을 때, 그것을 들은 라다크인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라다크인들에게는 전기와 수도시설, 의료보험이나 교통신호와 같은 체계화된 사회 구조가 낯설다. 현대의 문명을 누리고 사는 우리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측은한 마음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그들의 생활 방식을 조금도 불편해하지 않는다. 해가 뜨고 질 때까지 밭을 일구고 가축을 돌보다가, 어둑어둑해진 다음에는 가족과 이웃이 두런두런 모여앉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마을에는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의술을 행하는 '암치amchi'가 있고, 먼 거리는 천천히 걸어가다 지치면 쉬었다 가면 그만이라는 게 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라다크인들은 가난에 대해서도 관대하다. 우리는 늘 제3세계의 빈곤 문제를 걱정하지만, 정작 그들은 서구 문명의 침범을 받기 이전에 훨씬 더 풍족한 삶을 영위해왔다. 나눠 먹는 것이 익숙한 데다가, 자신의 것은 곧 마을 공동의 소유라는 인식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먹을 것이 있다면 모두에게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그들은 늘 먹을 것이 있고, 농사를 지을 땅이 있고, 가축이 있다. 그러므로 가난하지 않다. GNP를 운운하며 우리가 누구보다 얼마나 더 가난한지, 혹은 얼마나 부유한지를 재고 비교하며 주눅 들거나 자만하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인 일이다.

흔히들 "세상 참 좋아졌다"라고 말을 할 때, 그것은 사회적 시스템과 기술력이 뒷받침되어 세상이 더 나은 쪽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하지만 그로 인해 파괴되어 가는 전통과 문화와 환경을 떠올린다면 씁쓸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이 빨라졌고, 편해진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이 '좋아졌다'라는 말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척박한 자연환경에 놀랍게 적응한 라다크 사람들의 모습에 존경심을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내가 속해 있던 서구의 생활양식에 대해 재평가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자연을 좀 더 가깝게 지켜보게 된 내가 가장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고원지대 '푸'에서의 경험이라 할 수 있다. 그곳에 사는 동물들에게도 푸는 정말 약속의 땅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이른 봄이 되면 농부들은 동물들에게 앞으로 다가올 기쁨에 대해 노래해준다. 오, 아름다운 짐승이여. 강인한 짐승이요. 네 꼬리는 길고 네 뿔은 하늘까지 뻗어 있구나. 우리의 밭을 갈아다오. - <오래된 미래>  77p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전통에 관하여'에서는 라다크가 아직 서구세계의 영향을 받기 전, 그들만의 방식으로 살고 있던 평화로운 시절의 모습을 소개한다. 제2부 '변화에 관하여'에서는 세대가 거듭되는 동안 서구의 문명이 차츰 라다크를 잠식해가면서 불가피하게 따라오는 전통과 문화, 환경의 파괴 현상을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1부를 다 읽고, 2부로 넘어갈 때, 독자의 마음은 점점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3부 '미래에 관하여'에서는 전통과 문화를 파괴하는 대신, 타협과 소통을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라다크인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방법을 찾기 위한 저자의 고민을 담겨 있다. 쉽게 말해 '우리는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이 축을 이룬다. 라다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관한 성찰은 비단 라다크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고민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나는 개발이라는 것이 꼭 파괴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라다크 사람들이 수세기 동안 영위해 온 사회적, 생태학적 균형을 희생하지 않고서도 그들의 삶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 그들은 관습화된 개발의 방향을 답습하여 고유의 것들을 해체해 버리기보다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그 기반 위에 새로운 것들을 건설해야 할 것이다. - <오래된 미래> 257p.
 
눈을 감고 히말라야 고원 위 아름다운 '라다크'를 상상하면 마음이 어쩐지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가난하지만 부족함을 모르고, 불행하기에 병원을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라다크인들의 그 순박함이 지친 마음을 위로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결국, '느리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 하고 있는 셈이다.

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양희승 옮김, 중앙books(중앙북스)(2015)


태그:#오래된 미래, #현대 문명에 대한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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