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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는 바람이라 했던가. 21대 총선, 어김없이 바람이 휘몰아쳤다. 경제 논쟁도, 복지 논란도 아닌 바이러스가 몰고 온 바람. '코로나19'라는 초대형 태풍은 모든 이슈를 삼켜버린 블랙홀이 돼 국민의 시선을 붙잡아둔 채 정치판과 선거판을 쓸어버렸다.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긴급재난 시대의 선거. 유권자들이 마스크를 쓰고 위생장갑을 낀 채 투표에 나서야 했던 2020년 4월 15일 21대 총선. 그럼에도 21세기 들어 가장 높은 총선 투표율을 보였던 선거. 그 결과가 역사 앞에 얼굴을 내밀었다. 

방역의 성공, 승부를 가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4일 오후 청와대 집무실에서 '아세안+3 화상정상회의'를 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4일 오후 청와대 집무실에서 "아세안+3 화상정상회의"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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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선거는 문재인 정부의 3년에 대한 심판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정부의 정책적 과오가 덮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주말을 통해 표심이 변할 것이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총괄선대위원장이 선거 직전 주말을 앞두고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한 발언의 요지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실현되지 못했다. 유권자들은 심판 대신 정부에 대한 지지를 선택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는가. 물론 코로나19라는 특별한 상황 때문이다. 3개월째 진행되는 코로나19는 신체적·정신적·경제적 트라우마를 낳았고, 이는 사람들이 의지처를 요구하는 계기로 작동했다. 국민에게 의지처는 '정부'일 수밖에 없었다. 김종인 위원장이 말했던 정부에 대한 평가가 과거 3년에 대한 중간 평가가 아닌, 감염병에 대한 위기대응 능력 평가로 바뀐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대처는 다른 나라에 비해 비교우위를 인정받고 있다. 이제 세간의 고정관념은 바뀌었다. '양심적이지만 무능한 진보' '아마추어' 이미지가 사라졌다. '개방적이고 유능한 진보' '의지할만한 진보'로 치환됐다. 이런 평가는 당연히 상대 측인 보수야당에 대한 평가를 동반한다. 미래통합당으로 대표되는 보수야당은 코로나19 사태 초기부터 중국인 입국금지 조치에 집착했다. 나중에 입국금지 조치를 취한 다른 나라들이 코로나19에 취약한 모습을 드러내도 보수야당의 태도는 그대로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선거 막판에 터진 몇몇 후보들의 막말 파동은 화룡점정이었다. 극우와 보수의 선을 분명하게 긋지 않았기에 '부패하지만 경제엔 유능한 보수' 이미지는 무너졌다. 결과는, 모두 알다시피 민주당 대승, 통합당 참패.

민주당 앞엔 꽃길만 놓여 있을까?  
 
더불어민주당이 21대 총선 결과 대승을 거둔 가운데 16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중앙선대위 회의에서 이해찬 상임선대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21대 총선 결과 대승을 거둔 가운데 16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중앙선대위 회의에서 이해찬 상임선대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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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모든 게 끝난 걸까? 승리한 여당 앞엔 꽃길만 놓여 있는 걸까? 안정적 국정 운영, 적폐 척결, 중단 없는 개혁의 수행, 이런 것이 가능할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떠 있던 모든 것이 다시 내려와 자리를 잡는 법이다. 바람이 지나간 21대 국회,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가. 이것을 따지는 건 앞으로 걸어갈 길의 모양을 그리는 일이다.

변한 것은 의석수다. 여당이 과반을 훨씬 넘는 의석을 얻었다. 그러나 의석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짐을 지게 된다. 압도적으로 표를 몰아준 국민은 물을 것이다. 그 많은 의석을 가지고 대체 뭘 하고 있는가? 의석수가 적다, 야당이 어땠다는 핑계는 이제 발붙일 공간이 없다.

하지만 상황은 마냥 녹록지 않다. 변하지 않는 요소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참패했을망정 보수야당은 뿌리가 깊다. 강력한 지역 연고와 지지하는 세대층이 확고히 있다. 영남 지역에서 선전한 통합당의 성적표와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의 비례대표 의원 배출 수를 보면 알 수 있다.

혹자는 개혁입법이 좌초 위기에 놓인다고 해도 의원 2/3가 동의해 패스트트랙을 활용하면 된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패스트트랙 안건이 처리될 때까지는 최소 270일에서 330일이 걸린다. 선거법 개정, 고위공직자범저수사처법 등이 처리될 때를 복기해 보자. 열세에 몰린 쪽이 시간을 끌면서 법안 처리에 발목을 잡는 것을 봐왔다. 일 안하는 국회가 재현될 수 있다.

여전한 표심 왜곡
  
정의당 비례2번 장혜영 후보와 수원병에 출마한 박예휘 후보가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정의당사에서 제 21대 총선출구조사 발표를 본 뒤 포옹을 하며 위로하고 있다.
▲ 서로 위로하는 정의당 두 청년 후보 정의당 비례2번 장혜영 후보와 수원병에 출마한 박예휘 후보가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정의당사에서 제 21대 총선출구조사 발표를 본 뒤 포옹을 하며 위로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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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문제인 걸까. 의석수 불비례 현상이 문제다. 원래 지역구 선거 득표율은 제대로 된 민심을 반영한 지지율이 못 된다. 한 선거구에서 한 후보자만 당선되는 소선거구제의 특성상 사표 방지 심리가 작동한 표 쏠림 현상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유권자의 민심은 정당득표율에서 정확하게 드러난다. 이번 총선에서 범여권(민주당의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과 열린민주당)은 총 38.7%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민주당의 지역구까지 합치면 183석이다. 미래한국당은 33.8% 득표율로 비례 19석을 차지, 통합당의 지역구와 합치면 103석이다.

반면 정당득표율 9.6%인 정의당은 비례에서 5석(지역구 포함 총 6석), 6.7%인 국민의당은 3석이다. 유권자의 표심 왜곡은 여전하다. 이 같은 표심 왜곡은 거대 양당의 승자 독식 구조, 과점 체제를 더욱 강화시킨다. 그 결과 완충지대 없는 진영 정치를 만들며, 궁극적으로 정치개혁의 동력을 실종시킨다.

진영화 된 두 세력 사이엔 애시당초 '협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국민들은 욕할 수도 있다. 발목 잡는 보수야당도 탓하겠지만, 의석을 몰아준 집권여당에 대한 비난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됐다 하더라도, 거대 양당의 비례용 위성정당의 출현으로 또다시 거대양당의 일대일 구도가 만들어졌다. '여전한 승자독식 구조, 변함 없는 거대양당의 과점체제'라는 결과를 낳았다.

다원적 가치가 희생되다

가정해 보자.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거대 양당의 비례용 위성정당 없이 작동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녹색당·미래당 같은 소수정당들이 원내 진출의 꿈을 이뤘을 수 있다. 정의당처럼 이미 원내에 진출해 있던 정당은 단독이든 공동이든 교섭단체를 꾸렸을지 모른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21대 국회의 모습은 이전 국회의 모습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국회 자체의 개혁이 시작됐을 것이다. 270~330일이나 걸리는 패스트트랙 제도도, 아무 법안에나 다 걸어놓을 수 있는 필리버스터(무제한토론)도, 유명무실한 국회청원제도도, 제 식구 감싸기로 일관한 국회의원 징계시스템도... 모두 수정하고 새롭게 만드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국회 개혁뿐이겠나. 독일식 연동형비례제 같은 선거제도 개편, 민주적 정당시스템 개혁, 나아가 개헌까지. 묵은 정치 개혁 과제 해결을 위해 큰 걸음을 성큼성큼 내딛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회개혁 가능성도 높아졌을 것이다. 환경정치, 청년정치, 소수자정치 등 다원화된 정치의 씨앗 역시 뿌릴 수 있었을 것이다.
 
2019년 12월 27일, 문희상 국회의장이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찬성 156, 반대 10, 기권 1표로 통과시키켰다. 당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피켓을 던지며 항의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고 이 제도의 빈틈을 이용한 건 미래통합당과 더불어민주당이었다.
 2019년 12월 27일, 문희상 국회의장이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찬성 156, 반대 10, 기권 1표로 통과시키켰다. 당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피켓을 던지며 항의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고 이 제도의 빈틈을 이용한 건 미래통합당과 더불어민주당이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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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실은 참담했다. 선거 역사상 최초로 도입된 연동형비례대표제는 소수정당의 원내진출 가능성을 높이자는 애초 취지와는 달리 50%만 적용되고, 캡까지 씌워지는 등 누더기가 됐다. 그나마 이것이라도 온전히 시행됐다면 한국 정치사에 기념비적 사건이 될 수 있었겠지만, 그조차도 이뤄지지 않았다. 거대양당의 무분별한 탐욕이 위성정당을 출현시켰고, 위에 언급한 여러 가지 개혁의 가능성은 차단됐다.

아직 역량이 부족한 소수정당은 희생자가 됐고, 예전의 관습을 유지해달라는 거대양당의 전략에 유권자들은 부도덕한 행태를 비판하지 못했다. 왜곡된 시스템이 유권자의 왜곡된 참여를 강요했고, 한국 사회의 다원적 가치는 뒤로 밀려났다.

자유한국당(현 미래통합당)이 비례용 위성정당을 만든다고 했을 때 민주당이 비판했던 것도, 60%가 넘는 국민이 비례용 위성정당에 반대했던 것도,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원칙을 지켜달라'고 호소했던 것도 모두 옛일이 됐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라는 정치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태그:#4.15총선, #준연동형비례대표제, #비례대표, #거대양당, #정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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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로 이란 학생 김민혁군과 김민혁군의 아버지 난민 인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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