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9 19:46최종 업데이트 20.04.19 19:46
  • 본문듣기
와인도 인간처럼 나이를 먹는다. 장기 숙성이 가능한 고급 와인은 최소 10년 이상 숙성되어야 비로소 진가를 드러낸다. 태어난 지 몇 년 안 된 아기 와인과 20년간 병 속에서 나이를 먹은 중장년 와인은 맛과 향의 풍부함과 깊이에 큰 차이가 있다. 그 맛을 경험한 혀는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나 역시 그 맛을 아는 혀가 되어버렸다.

어린 와인이더라도 좀 오래 브리딩을 하면 나름 마시기 괜찮지 않냐고? 지극정성으로 브리딩(와인을 미리 개봉해 공기와 접촉시켜 맛을 부드럽게 하는 것)을 해봐야 성숙한 와인의 느낌은 나오지 않는다. 아이에게 성장촉진제를 투여한다고 순식간에 성인이 될 리가 없지 않은가. 숙성 와인의 매력을 경험하는 것은 와인 애호가에게 일종의 성인식과 같다.
 

나에게 숙성 와인의 매력을 깨닫게 한 다섯 와인. ⓒ 고정미

 
나에게 숙성 와인의 매력을 깨닫게 한 다섯 와인을 소개한다. 참고로 말해둔다. 장기 숙성이 가능한 와인은 대체로 고가다. 아무리 내가 와인에 미쳤어도 사회과학 책 써서 그냥저냥 먹고사는 살림이라 고가 와인 경험은 많지 않다. 그 빈약하고 협소한 콘텐츠를 토대로 작성한 내용임을 염두에 두고 너그럽게 읽어주기 바란다. 대신 와인을 사랑하는 내 감각과 기억을 신뢰하며 최대한 편견 없이 솔직하게 쓴다.

■ 샤토 레오빌 바르통(Château Léoville Barton)
1995 빈티지 (시음일: 2016년 3월 11일 획득경로: 해외직구)
2009 빈티지 (시음일: 2019년 6월 21일 획득경로: 해외직구)

 

샤토 레오빌 바르통 1995 ⓒ 고정미

 
 

샤토 레오빌 바르통 왼쪽부터 1995, 2009 빈티지 ⓒ 임승수

   
프랑스 보르도의 생 줄리앙 지역 와인이다. 생 줄리앙은 히딩크가 좋아한 와인으로 유명한 샤토 딸보가 생산되는 지역이다. 샤토 레오빌 바르통은 샤토 딸보보다 더 높은 급으로 평가받는다. 1995 빈티지의 첫 잔 느낌은 탑골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백발의 노인 같았다. 20년 동안 타닌이 녹아들어 노인이 떠오를 정도로 부드럽고 차분해진 것이다. 숙성 와인은 부드러워진다더니 과연 그러했다.

공기와 접촉하면서 서서히 꽃봉오리가 열리기 시작했다. 첫 잔에서 힘없는 노인 같던 와인이 시간이 지나니 말끔한 양복을 입은 중장년으로 바뀌더라. 숙성된 와인 역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마셔야 뽕을 뽑겠구나. 마시는 내내 믿을 수 없을 만큼 목넘김이 부드럽고 매끄럽다. 브레이크 없이 술술 넘어가니 너무 빠르게 한 병을 비웠다. 지금 마신다면 더 천천히 마시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음미할 텐데.


2009 빈티지는 2019년에 마셨다. 보르도의 2009년은 역사상 최고의 작황으로 유명한 해이다. '와인 애드버컷'(Wine Advocate)이라는 와인 잡지에서 제공하는 빈티지 차트(1970~2019)에서 2009년 보르도 생 줄리앙 지역의 포도 작황은 100점 만점에 무려 99점이다. 얼마나 기대하며 마셨겠는가.

그런데, 아뿔싸!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너무 어리다. 작황이 좋은 해의 와인은 방부제 역할을 하는 타닌이 풍부해서 숙성에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물론 제대로 숙성되었을 때의 맛과 향은 엄청나지만, 그걸 느끼려면 최소 2030년까지는 보관했다가 마셔야 한다. 그런 인내심이 있었다면 애초에 와인에 빠지지도 않았겠지. 물론 맛은 있었지만 너무 어려서 그 안에 내포된 거대한 잠재력을 제대로 느낄 수는 없었다.

■ 샤토 뽕떼 까네(Château Pontet-Canet)
2012 빈티지 (시음일: 2016년 5월 1일 획득경로: 마트 구매)
2007 빈티지 (시음일: 2017년 11월 4일 획득경로: 지인 선물)
2004 빈티지 (시음일: 2018년 5월 21일 획득경로: 해외직구)
2013 빈티지 (시음일: 2018년 9월 14일 획득경로: 마트 구매)

 

샤토 뽕떼 까네 2004 ⓒ 고정미

 
 

샤토 뽕떼 까네 왼쪽부터 2004, 2007, 2012, 2013 빈티지 ⓒ 임승수

 
보르도 뽀이악 지역 와인이다. 뽀이악은 샤토 라피트 로칠드, 샤토 라투르, 샤토 무통 로칠드 등 이름만 들어도 아찔한 최고의 와인이 생산된다. 보르도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와인 산지다. 샤토 뽕떼 까네는 이런 괴물들이 존재하는 곳에서도 기죽지 않고 나름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와인이다. 2016년에 접한 2012 빈티지는 솔직히 크게 인상에 남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마시기에 너무 어렸던 것 같다.

그러다가 2017년에 2007 빈티지를 지인에게 선물로 받아 마셨다. 보르도 2007년은 작황이 매우 좋지 않은 해라 별 기대감 없이 마셨는데, 맛과 향이 상당히 맘에 들어 깜짝 놀랐다. 작황이 안 좋을 때 만든 와인은 타닌이 부족해 여타 빈티지보다 더 빨리 숙성된다. 그러다 보니 10년 만에 충분히 숙성이 진행되어 마시기 좋았던 것이다. 고급 와인은 작황이 안 좋은 빈티지라고 무시할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와인은 빈티지에 따라 가격이 크게 차이가 난다. 샤토 뽕떼 까네도 2007년보다 2009년이 세 배 가까이 비싸다. 그만큼 빈티지에 따라 품질의 차이가 크다. 하지만 지금 2009 빈티지를 마신다면 여전히 거칠고 어린 와인을 만나게 될 것이다. 빨라도 2030년 이후에나 진가를 느낄 수 있겠지. 하지만 2007 빈티지는 숙성 속도가 빨라 지금이 최고 전성기다. 가격도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그럭저럭 숙성된 와인의 매력을 느끼기에도 좋다.

2018년에 마셨던 2004 빈티지도 숙성된 와인의 특징을 잘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2013 빈티지는 2018년에 열었지만 의외로 꽤 맛있게 마셨다. 2013년은 2007년보다도 더 망한 보르도 최악의 해라 오히려 지금 마시기에 괜찮았던 것 같다. 마트나 백화점에서 샤토 뽕떼 까네 2013 빈티지를 발견한다면 구입해서 지금 마셔도 좋은 선택이라 생각한다.

■ 샤토 꼬스 데스뚜르넬(Château Cos d'Estournel)
2004 빈티지 (시음일: 2016년 8월 25일 획득경로: 백화점 구매)
2003 빈티지 (시음일: 2019년 3월 23일 획득경로: 해외직구)
2013 빈티지 (시음일: 2019년 9월 28일 획득경로: 마트 구매)


 

샤토 꼬스 데스뚜르넬 2003 ⓒ 고정미

 

샤토 꼬스 데스뚜르넬 왼쪽부터 2003, 2004, 2013 빈티지 ⓒ 임승수

   
제대로 숙성된 보르도 와인을 마시면 극락행이다. 나는 샤토 꼬스 데스뚜르넬을 통해 맛의 극락을 보았다. 샤토 꼬스 데스뚜르넬은 프랑스 보르도의 생 테스테프 지역을 대표하는 와인이다. 내가 지금까지 마신 와인 중에서 가장 내 취향과 잘 맞는, 진심으로 애정하는 와인이다. 마신 순서대로 2004, 2003, 2013 빈티지가 모두 좋았다.

2004 빈티지를 마셨던 순간이 여전히 생생하다. 백화점 단골매장에서 운 좋게 해외 거래가보다도 싸게 구입했는데, 잔에서 올라오는 그 폭발적인 향기가 진심 충격이었다. 입에 한 모금 머금어 맛을 음미하니 와인이 잘 숙성되면 이렇게 맛있을 수 있구나 싶었다. 생 테스테프의 2004년은 그렇게 작황이 좋지도 않은데, 좋은 해의 와인은 어떨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그래서 해외직구로 2003 빈티지를 공수했다. 빈티지 차트를 보면 2004년이 88점인데 반해 2003년은 95점이다. 이 2003 빈티지를 마시고, 나는 맛의 극락을 보았다. 감동까지 받았을 정도이니 말이다. 마시는 내내 감탄사를 연발했다. 오! 우와! 대박! 워메! 뿅 간다! 쑝 간다! 계속 이런 말만 하니 아내가 너무 호들갑 떤다고 뭐라 했던 것 같다.

2013 빈티지는 어린 와인이라 일부러 디캔터까지 사용해 오래 브리딩해서 마셨다. 숙성된 느낌은 없었지만, 어린놈도 정말 맛있었다. 샤토 꼬스 데스뚜르넬의 캐릭터 자체가 그냥 내 취향 저격인 것 같다.

■ 알마비바(Almaviva)
2011 빈티지 (시음일: 2019년 7월 19일 획득경로: 지인과의 술자리)

 

알마비바 2011 ⓒ 고정미

 
 

알마비바 2011 빈티지 ⓒ 임승수

   
알마비바는 칠레 굴지의 와인 회사 콘차 이 토로와 샤토 무통 로칠드로 유명한 프랑스의 바롱 필립 드 로칠드가 합작해 만든 칠레의 고급 와인이다. 워낙 유명한 와인인데 그동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언젠가 콘차 이 토로가 만든 또 다른 고급 와인 돈 멜초를 마시고 내 취향과 안 맞아 다소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지인이 술자리에 가져온 덕에 2019년에 2011 빈티지를 경험했다.

칠레 와인에 대한 편견을 한 방에 날릴 만큼 진심 맛있더라. 같은 가격대의 웬만한 프랑스 와인보다 더 낫다. 역시 가성비는 칠레구나. 생명력이 펄펄 넘치는 칠레산 자줏빛 액체가 제대로 숙성되어 코와 혀를 자극하니, 지인의 잔은 내팽개치고 내 잔에만 연신 와인을 따르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당시 술자리에서 상당한 긴장감이 조성된 것은 안 비밀. 인간의 사회성도 마비시키는 와인의 위력이라니!

■ 샤토 랭쉬 바쥬(Château Lynch-Bages)
2000 빈티지 (시음일: 2020년 1월 10일 획득경로: 해외직구)
2014 빈티지 (시음일: 2020년 3월 31일 획득경로: 마트 구매)


 

샤토 랭쉬 바쥬 2000 ⓒ 고정미

 

샤토 랭쉬 바쥬 왼쪽부터 2000, 2014 빈티지 ⓒ 임승수

   
샤토 랭쉬 바쥬는 보르도 뽀이악 지역의 와인이다. 앞서 언급한 같은 지역 와인인 샤토 뽕떼 까네보다 좀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 와인의 2000 빈티지를 마시고 샤토 꼬스 데스투르넬 2003 빈티지에 버금가는 감동을 받았다. 보르도의 2000년은 빈티지 차트에서 95점을 받을 정도로 작황이 매우 훌륭한 해였는데, 그런 양질의 포도가 20년 동안 잘 숙성되니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바로 극락행. 그날도 하도 감탄사를 뿜어내어 아내한테 핀잔먹었다.

2014 빈티지는 역시 마시기에 너무 어렸다. 세 시간 전에 열어서 브리딩을 했지만, 마시는 내내 충분히 열리지 않았다. 그나마 막잔에서 어느 정도 열렸지만, 잘 숙성된 2000 빈티지의 위력에 비할 바는 못 된다. 그래도 좋은 와인이라 꽤 만족스럽게 마셨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장기 숙성 가능한 고급 와인을 마실 때 고려할 점을 나름 정리했다.

- 웬만하면 셀러에 보관해 충분히 숙성되기를 기다려 마시자. 일찍 열면 후회한다.

- 굳이 못 참아서 어린 와인을 마시겠다면 충분히 시간을 들여 브리딩 한다. 필요하다면 디캔터도 사용하자. 하지만 분명 마시고 후회할 것이다.

- 지금 당장 숙성된 와인을 즐기고 싶다면 백화점이나 전문 와인 매장에서 숙성된 빈티지를 구매한다. 하지만 수량이 적어 구하기 어렵고 가격에 거품이 낀 경우가 많다. 원하는 빈티지를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매하려면 꽤 발품을 팔아야 할 것이다.

- 숙성된 와인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즐기려면 지금으로서는 해외직구가 최선책이다.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냐고? 잘 숙성된 와인의 맛을 경험하면 이 모든 수고가 이해된다.

- 그러면, 와인 해외직구는 어떻게 하냐고? 그건 조만간 따로 다루겠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