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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시경(1876-1914)
 주시경(1876-1914)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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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지구상에 와서 살다 죽어 간  것이 100만 년이나 되었지만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6.000년밖에 되지 않았다." - 르네 에티앙블.

우리 민족도 다르지 않았다. 고유한 말은 있었으나 글자(문자)는 없었다. 이두(吏讀)가 있었으나 조선어를 기록하는 데는 한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대왕은 절대군주이고 총명한 데다 유능한 집현전 학자들이 있어서 정음의 창제가 가능했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한자에 길들여진 조선의 유생 기득권 세력은 쉽게 호응하지 않았다. 여전히 언문이니 암클이니 하며 천시하였다.

400여 년 뒤 한 무명의 청년이 세종의 정신을 이어 받았다. 그에게는 권력이나 집현전 학자가 있을 리 없었다.  홀홀단신이고 간혹 선학과 동지 몇명이 있었을 뿐이다. 그는 국난기에 한글이란 이름을 짓고 한글 연구와 보급에 모든 것을 걸었다. 세종이 한글의 생모라면 주시경은 유모라 할 것이다. 천대받고 소외된 훈민정음이라는 자식을 씻기고 다듬어 키운 것이다.

세종이 아니었으면 한민족은 돌궐문(突厥文)과 여진문(女眞文)과 거란문(契丹文)을 갖지(지키지) 못한 돌궐ㆍ여진ㆍ거란족처럼 중화문자(문화)에 동화되고 말았을 지, 주시경이 아니었으면 한민족은 일본(일어)이나 미국(영어)에 동화되었을 지 모른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하면서 강제로 맺은 조약에서 "조선을 보호한다"고 하여, '보호조약'이라 이름을 붙였지만 보호는 커녕 억압과 수탈로 시종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11년 10월 『중등 본국 역사』를 비롯한 중고등 학생용 역사ㆍ지리ㆍ국어 책의 출판을 금지시키고, 11월 경무총감부는 『조선』 등 각종 간행물을 금지시키고, 지방 사립학교 100여 개를 폐교시켰다.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단절시키려는 시도였다.

주시경은 국치 이듬해 서울 박동에 있는 보성중학교에 '조선어 강습원(일요 강습소)'를 열었다. 마지막 사업이었다.

"소식을 들은 한성사범학교, 계성보통고등학교 등 서울 장안의 각급 학교에서 몰려든 청년 학생들에게 일요일마다 무료로 국어 국문을 강의하고 애국사상을 고취시켰다." (주석 1)


총독부의 살얼음판에서도 그는 조금도 주눅들지 않았다. 그리고 민족의 얼은 지키며 국어 교육을 계속해 나갔다.  이 시기 주시경의 제자였던 한글 학자 장지영의 회고담이다.

선생은 한평생을 두고 양복이란 것을 걸쳐 보신 일이 없으시다. 언제나 무명 두루마기(여름에는 베같은 '도루마'라고 부르는 감으로 지은 두루마기)를 입으셨고, 물론 두루마기 아래에는 엷은 회색 바지저고리에 조끼를 바쳐 입으셨었는데, 모자는 제주 사람들이 말총으로 만든 총모자(중절모 같기도 하고 맥고모자 같기도 한, 그 때로서는 개화한 사람들의 모자)를 많이 쓰셨다. 더운 여름에는 맥고모자를 많이 쓰셨다.

신발은 그 당시 양해라고 부르던, 지금의 구두를 신으셨었는데, 새 구두 신으신 모습은 전혀 기억에 남지 않는다. 아마도 언제나 오래된 헌 구두를 신고 다니셨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그 때에는 양말이 없었기 때문에 비록 구두는 신식 가죽구두를 신고 다니셨지마는, 발에는 다른 사람들같이 꼭 버선을 신으셨다. 검소하고 청렴한 선비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선생의 모습에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커다란 책 보퉁이다.

그때, 세상은 개화의 물결이 한층 더 강하게 국민들의 교육열을 부채질해 주어서 서울에만도 배제학당, 이화학당을 비롯해서 정신, 보성, 숙명, 진명, 그러고도 융회, 기호(지금의 중앙), 서복 등 여러 중학교가 있었다. (소학교는 동네마다 있었다)

그런데, 이 많은 중학교의 국어 시간을 선생은 혼자서 도맡아서 국어시간 강의를 하고 다니셨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 당시 우리말을 학문으로 알고 올바로 연구한 사람이라고는 주시경 선생 한 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주석 2)


그는 가장 먼저 단발을 하고 개화운동에 앞장서면서도 양복을 거부하고 조선옷으로 시종하였다.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상징적인 모습이다.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배우더라도 정신만은 민족의 얼을 지키겠다는 결기였을 것이다. 조선 선비의 정맥을 이은 '개화선비'였다.

조선 선비의 본질은 불의한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무쌍한 변화에 휘몰리지 않고 잘못된 세태에 뇌동하지 않는 것이다. 얼어 죽더라도 겻불은 쬐지 않고 굶더라도 담을 넘지 않는 청빈을 지킨다.


주석
1> 『나라사랑』 제4집, 26쪽.
2> 장지영, 「지금도 눈앞에 뵈옵는 듯…」, 『나라사랑』 제4집, 54~55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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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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