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많은 한국인에게 피천득 선생은 <수필>이나 <인연>이라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선생에게는 억울한 일이다. 선생은 번역으로도 일가를 이룬 분이기 때문이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작품 중에서 황순원 선생의 <소나기>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이 바로 피천득 선생의 번역이었다. 명 번역이었다. 1910년생인 피천득 선생은 소금상인인 할아버지와 신기료 상인인 아버지를 두었는데 그의 집안은 구한말의 거부였다고 한다. 조부와 부친 모두 거상이었던 모양이다.

7살 때 유치원에 입학했고 동시에 서당에서 한문 공부도 함께 했다. 타고난 천재여서 10살이 되기 전에 당시 서당의 한문 교육의 입문서로 사용된 통감절요를 3권까지 익혔다. 서울고보 부속초등학교를 마친 후 무려 2년을 월반하여 1923년에 현재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인 서울 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선생의 나이가 13세였는데 고리야마라는 일본인 영어 교사에게 영시를 처음 접하게 된다.
 
표지
▲ 표지 사진 표지
ⓒ 샘터

관련사진보기

 
당시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이었던 이광수의 집에 거주하였고 그의 추천대로 많은 조선 유학생이 선택한 일본이 아닌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이광수는 영어 실력이 뛰어나서 영역된 러시아 문학을 탐독했는데 영어에 대한 중요성이 피천득 선생에게도 어느 정도 전파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피천득 선생의 필명 금아(琴兒)는 거문고의 아동이라는 뜻으로 이광수가 지어준 것이다.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는 등의 집안 사정 때문에 고보를 졸업하지 못하고 이광수 선생의 조언대로 상하이에 소재한 귀족학교 토마스 한베리 공립학교(Thomas Hanbury Public School)에 다녔는데 이 학교는 모든 과목을 오로지 영어로만 수업했다고 한다.

미국인 교사에게 혹독하게 영어 교육을 받은 피천득 선생은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뛰어난 영어 실력을 갖추었고 이것이 후일 뛰어난 번역가가 되는 토대가 되었다. 1929년 상하이 후장대학에 입학한 선생은 애초에 상업경영학을 선택하였지만 이내 '돈 버는 일에 관심이 없었고,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영문학과로 전과한다. 당시 후장대학의 영문학과 학생은 총 4명이었는데 그 중 여학생이 3명이었고 유일한 남학생은 피천득 선생이었다.

학생이 4명이다 보니 수업은 주로 교수의 자택에서 진행되었고 차나 케이크를 간식 삼아 먹으면서 셰익스피어와 토머스 하디, 찰스 디킨스를 비롯한 영문학을 공부했다. 학생이 4명이다 보니 수업은 밀도 있게 진행되었고 과제는 혹독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일대일 첨삭식으로 교수의 지도 아래 영문으로 작성된 과제를 고치고 또 고쳐야 했다.

실험적이고 자유분방한 피천득 선생의 번역

피천득 선생은 20세의 나이로 1930년 4월 7일 자 동아일보에 서정시 '차즘'을 발표한 시인으로서 문인이 되었다. 피천득 문학의 기본과 영혼은 시에 있다. 시를 사랑했던 피천득 선생은 영문학자로서 영시의 번역에 몰두했다. 샘터사에서 출간된 피천득 문학 전집 4권 중 2권이 번역 시집인 것만 보아도 그의 문학 인생에 차지한 번역의 비중을 알 수 있다.

애당초 시라는 장르는 해당 민족만의 고유한 정서와 배경을 담고 있기 때문에 완벽하게 번역하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진단했지만, 선생은 당신이 좋아했던 시를 좀 더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을 가지고 외국 시를 번역했다. 외국 시는 원문으로 읽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럴만한 외국어 실력을 갖춘 독자는 많지 않다는 현실을 감안한 것이다.

외국 시를 열심히 번역한 선생이 염두에 두었던 자신만의 번역 원칙은 다음 3가지다.

첫째, 원작자가 심어둔 원래의 의미를 손상하지 않으면서
둘째, 번역 시지만 마치 우리나라 시를 읽는 것처럼 친근한 느낌을 주고
셋째, 누구나 읽기 쉽고 재미있는 번역을 하자.

피천득 선생의 <내가 사랑하는 시>와 <셰익스피어 소네트 시집>은 이와 같은 원칙대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지나도 독자들에게 사랑받는다. <셰익스피어 소네트 시집>은 영문학자 피천득 선생의 가장 빛나는 업적 중의 하나이며 가장 공을 많이 들인 저작물이다. 우리나라 시를 읽는 듯 한 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있도록 직역보다는 의역에 충실했다.

선생은 자신이 정한 원칙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총 발휘해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마치 한편의 우리나라 시로 재창작하려고 시도했다. 소천할 때까지 무소유에 가까운 삶을 살았고 가족을 사랑했던 영문학자 피천득 선생은 외국 시를 번역할 때는 실험적이고 자유분방한 '홀로서기 번역'을 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많은 독자는 피천득 선생의 번역 시를 읽으면서 마치 우리나라 시를 읽는 듯 한 느낌이 들고 따로 알려주지 않으면 외국이라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피천득 선생의 번역시집이 우리에게 유독 친근하게 읽히는 또 다른 이유는 '내가 사랑하는'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영문학자로서 문학사적 작품성이 뛰어난 것보다는 시를 좋아하는 독자 개인으로서 좋아했던 시를 골라서 번역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琴兒 피천득 문학 전집 - 전4권 (10주기 한정판)

피천득 (지은이), 샘터사(2017)


태그:#피천득, #샘터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