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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남미 삼개국(파라과이, 브라질, 아르헨티나)에서 일하며 보고 느낀 세계의 문화 이야기입니다.[기자말]
이과수 폭포, 부에노스아이레스, 파타고니아, 엘 칼라파테, 피츠로이... 요즘 방영 중인 여행 프로그램 <트래블러- 아르헨티나>편은 어쩌다 일하러 갔다가 일 마치고 운 좋게 여행을 다닌 내 여정과 너무나 비슷해서 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남아메리카 최남단의 파타고니아는 남극 대륙과 일부 섬을 제외하면 지구상 가장 남쪽의 아르헨티나와 칠레가 양분한 '여행자들의 지상낙원'이라 불리는 땅이다. 낙원의 중심에 엘 칼라파테가 있다.

엘 칼라파테는 광대한 자연 속 인구 2만의 소규모 도시다. 관광으로 먹고 사는 이곳은 1년에 3, 4개월(11~3월) 날씨가 좋을 때만 호황이라고 한다. 나는 운 좋게 11월 말 이곳에 들렀다.

1년에 단 한철 밖에 장사를 못하고 연중 기후는 낮고 거센 바람이 부는 폭풍의 대지일지라도 먹고 살거리가 있다면 사람은 지구상 어디라도 흘러 들어간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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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첫날 숙소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밤이 오지 않았다. (잠이 아니라 밤) 술과 음식을 준비해 놓고 밤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저녁(?) 10시가 되어 해가 지고 달이 떠올라 그제야 나는 지구의 남쪽 끝 남극에 가까이 온 것임을 실감하였다. 
 
밤 10시인데 초저녁 풍경이다.
▲ 엘 칼라파테. 밤 10시인데 초저녁 풍경이다.
ⓒ 손승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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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볼거리는 단연 로스 글라시아레스(Los Glaciare) 국립공원. 말 그대로 빙하국립공원이고 그 중 백미는 페리토 모레노 빙하이다. 모레노라는 사람이 발견하여 붙여진 발견자 우선식 명명인데 이건 참 특색이라곤 알 수 없는 싱거운 작명이 아닌가.

재미나는 건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하고도 자기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는 것. 그것은 자신이 발견한 땅이 '인디아'라고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약간 후배인 이탈리아 선원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여러 차례 아메리카 탐험대에 참가한 뒤 탐험 내용을 문서로 출간했다. 콜럼버스가 새로 발견한 섬들이 사실은 동아시아 연안이 아닌 새로운 대륙이었다는 내용이다.

이 주장을 확고히 믿은 한 지도 제작자가 최신판 세계지도를 출간하며 이 대륙에 아메리고를 기리는 이름을 붙여 아메리카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 발의 차이와 지도 제작자의 실수로(?) 우리가 수없이 마시는 아메리카노는 콜럼버스노가 아닌 아메리카노가 된 것이다. 캡틴 아메리카도 캡틴 콜럼버스가 될 뻔 한 것이었고. 
 
파타고니아의 최고 명소중 하나.
▲ 페리토 모레노 빙하. 파타고니아의 최고 명소중 하나.
ⓒ 손승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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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레노 빙하를 보기 위해 시내의 여행사 몇 군데를 들러 가격을 비교해 보니 별반 차이가 없다. 몇 가지 상품 중 빙하 위를 걷는 미니 트레킹을 선택했다.

이른 아침 여행사에서 마련한 관광버스는 80km 남쪽의 빙하를 향해 쉼 없이 달렸다. 가는 내내 풍경은 황량했다. 가끔씩 나지막한 산자락들이 보였고 그 산의 나무들은 자신들의 전 생애를 거센 바람에 내맡기고 살았음을 가지들의 방향이 일러주고 있었다. 바람의 세기는 부지기수로 쓰러진 아름드리나무들로 가늠할 수 있었거니와...

두 시간여를 달린 버스가 목적지와 가까워지자 빙하가 조금씩 보이더니 도착과 함께 두둥, 연하면서도 짙은 사파이어의 푸른빛을 머금은 거대하고 널찍한 하얀 조각이 온 시야에 들어왔다(그것은 조각이었다. 조각한다는 마음이 없이 저절로 조각된. 스스로 그러한 조각이다). 그런데 내 눈이 받아들인 빙하의 크기가 내 예상을 뛰어 넘는 스케일이었기 때문인지 말할 수 없는 감흥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나는 저절로 바보가 된 듯 멍하니 그곳을 바라보며 마냥 미소를 짓고 있어야 했다.   
 
상상을 띄어넘는 크기에 웃음이 절로 난다.
▲ 모레노 빙하. 상상을 띄어넘는 크기에 웃음이 절로 난다.
ⓒ 손승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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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의 짧은 설명 후 1시간가량 자유 투어와 식사시간이 주어졌다. 투어는 여기저기 흩어진 뷰 토인트를 찾아다니는 것인데 나는 그곳들을 향해 계단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소리 없는 조각은 점점 가까워져 처음의 미소는 웃음으로 웃음은 탄성으로 이어져갔다.

일대는 너무도 고요했다. 드문드문 작은 새의 지저귐이 고요한 공간의 광대함을 일깨워 주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한 번씩 '꽝~' 하고 벼락 치는 소리가 절대 침묵을 깨트렸으니 이 거대 조각이 스스로를 조각내며 수면으로 떨어져 생기는 굉음이었다. 소리 없는 조각이란 말은 취소다. 이 조각품은 현재 진행형의 살아 움직이는 조각인 것이다.

수면 위엔 떨어져나간 얼음 조각들이 또 다른 조각품으로 불규칙하게 부유하고 있었다. 미루어보아 이 작가의 작품 성향은 아폴로 식 질서 정연함과는 거리가 먼 디오니소스식 카오스 미학을 추구하는 듯 했다. 
 
조각이 조각한.
▲ 떨어져 나온 빙하 조각들. 조각이 조각한.
ⓒ 손승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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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아서 사라지는 자연 예술품.
▲ 빙하 조각. 녹아서 사라지는 자연 예술품.
ⓒ 손승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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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작가는 고정된 모양 없음을 지향하여 매년, 매월, 매일의 형태가 달라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극히 사양하고 있었다. 언제나 새롭게는 이 작가의 슬로건인 듯 4~5년에 한 번씩은 특별히 대규모 붕괴 이벤트를 펼친다고 한다.

모레노 빙하의 전체 길이는 35km 폭은 약 5km 높이는 60~70m인데 매일 2m씩 전진한다. 이로 인해 아르헨티나 호수의 브라스리코 해협을 막아 물이 흐르지 못하게 되고 엄청난 압력이 쌓여 4~5년이 경과되면 강물이 빙하댐을 뚫고 흘러 이런 대장관의 퍼포먼스가 마련되는 것이다. 내 눈으로 직접 그 광경을 보진 못했으나 그것은 그야말로 파괴되는 것의 아름다움이란 어떤 것인지를 온몸으로 체득하는 시간일 것이다.

절경이 배고픔을 채워주지 못하는 법이라 호텔에서 사온 도시락을 꺼내 식도락 시간을 가졌다. 식사가 밋밋하여 준비해간 소주를 꺼내었다. 조촐한 음식에 소주 한잔 기울이며 빙하를 바라보니 너무나 잘 어울려 기분이 한층 좋아졌다.

나는 소주 한잔 덕에 한껏 업 되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거닐었다. 그러다 7쌍의 어르신들이 쪼르륵 모여 앉아 만개한 꽃처럼 환하게 웃음 지으며 식사를 즐기시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광경이 보기 좋아 "어디서 오셨어요?" 라고 물으니 "프랑스" 라고 하셨다. 보기 좋아 그러니 사진 좀 찍어도 되느냐고 다시 물으니 "물론이지" 하셔서 몇 컷을 후다닥 찍었다. 
 
이 사진을 찍은후 이들의 카메라를 하나 하나 들어야했다.
▲ 빙하를 관람하며 식사하는 프랑스 관광객들. 이 사진을 찍은후 이들의 카메라를 하나 하나 들어야했다.
ⓒ 손승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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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중 한 분이 내게 어디서 왔냐고 물으셨기에 "코리아" 라 답하니 자신의 사진기를 건네며 자신들을 찍어 달라 부탁하시어 들어 주었다. 그러자 그 다음 분, 그 다음 분이 사진기를 줄줄이 알사탕으로 건네어 결국 그들이 가진 모든 사진기로 사진을 찍어 드려야 했다. 짧은 순간 그 많은 카메라를 만지고 집중하여 찍고 나니 알딸딸한 술기운이 훅하고 달아나 버렸다.   

유 투어를 마친 뒤 버스를 타고 선착장으로 이동, 배를 타고 바다인지 강인지 호수인지 모호한 물가를 건너갔다. 그 뒤 관광객들은 스페인어권과 영어권으로 나뉘어 길을 걸었고 빙하에 이르자 묵직한 아이젠을 신겨주었다.

빙하 트레킹을 시작한 것이다. 믿음직한 얼굴의 가이드를 따라 거대한 조각품인 빙하에 첫 발을 내디디자 오묘한 기분이 일었다.  
 
빙하에 계곡이 있고 산이 있고 샘도있다.
▲ 빙하 트레킹 출발점. 빙하에 계곡이 있고 산이 있고 샘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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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행성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 빙하 트레킹. 다른 행성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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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 위를 걷고 또 걷자 얼음산들이 나왔다. 그 산들 사이로는 얼음 계곡이 있고 계곡 여기저기에서는 물이 솟아 흘렀다. 가이드는 그중 가장 깊고 맑은 샘물을 우리에게 맛보게 했다. 물맛은 더없이 시원하고 깨끗하여 자연 그대로의 순수한 성수를 마신 듯 홀리 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 공간의 현묘함과 물맛 때문인지 우리 일행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 하나같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 또한 그 시공간의 신선함에 흠뻑 취해 추위도 잊은 채 카메라에 풍광을 담아 가려고 분주히 들이 댔다.

그러다 미술가의 직업병이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멋진 얼음산들을 통째로 라이브 캐스팅하거나 3D단층 촬영을 하여 3D프린트로 뽑은 뒤 부산 해운대 또는 광안리 바닷가나 도심 빌딩숲 여기저기에 설치한다면 멋진 환경 모뉴멘트가 되지 않을까?

공상의 나래를 펼치다 이곳보다 생생한 작품이 없는 것을 깨닫고 공상으로 만든 얼음산을 공중에 띄워 깔끔히 녹여 버렸다. 
 
얼음이 녹아 샘물이 됐다.
▲ 빙하 샘물. 얼음이 녹아 샘물이 됐다.
ⓒ 손승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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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허무한 공상 놀음에 빠져 일행들과 뒤처지는 바람에 나는 열심히 뒤를 쫓아야만 했다. 그렇게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계곡과 능선을 넘고 또 넘자 마치 어떤 계시를 따라 세상 너머 피안의 세계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일어 가이드에게 불현 듯 이런 질문을 던졌다. '이렇게 자꾸 가다보면 혹시 천국이 나오는가요?' 내 질문이 당황스러웠는지 아님 할 말이 없어서인지 그는 말없이 환한 미소로 답했다.

이날 트레킹 중 가장 훌륭한 전망대의 정상에 오르자 가이드가 짧은 강연을 해 주었다.

"이곳은 원시 시대 이래로 물의 세변신이(액체, 고체, 기체) 끝없이 이어지는 자연의 대순환을 극적으로 볼 수 있는 곳입니다. 태평양의 바닷물이 수증기가 되어 안데스를 넘어 만년설을 펑펑 쏟아 쌓인 눈은 만년빙이 됩니다. 그리고 빙하로 흐러고 흘러 호수와 만나 녹아서 바다로 가는 것입니다. 자연이 윤회하는 것으로 인도 사람들이 믿는 윤회와 비슷하지요." 
 
오묘한 풍경속을 걷노라면 피안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든다.
▲ 빙하 트레킹. 오묘한 풍경속을 걷노라면 피안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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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설과 위스키의 만남.
▲ 만년의 맛, 빙하 위스키. 만년설과 위스키의 만남.
ⓒ 손승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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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트레킹의 대미는 빙하 위스키였다. 풍미가 훌륭한 위스키에 만년 빙하를 잘게 부숴 넣어 한잔씩 마시게 해 주었는데 그 분위기에 맛과 멋이 어우러져 우리 일행 모두는 즐거운 함성을 지르며 '한잔 더 한잔 더'를 외쳤다.

해산과 함께 나는 해설 가이드에게 몹시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왜 빙하는 저렇듯 푸른빛을 품고 있느냐고? 그러자 그는 아주 좋은 질문이라며 찬찬히 설명하길.

"빛은 투명한 물체를 통과할 때 파장이 짧은 빛일수록 잘 통과하는데 파란색이 파장이 가장 짧아. 하여 빙하에 빛이 통과할 때 안에 있는 잡티나 미세 분자들의 영향으로 다른 빛은 차단되지만 가장 영향을 적게 받는 파란색만이 통과해서 푸르게 보이는 거지. 하늘이 푸른 것도 공기를 통과하는 빛이 파란색이 가장 많기 때문이고. 이해돼?"

나는 알 듯 말 듯 한데 하여간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렇게 모레노 빙하 투어는 끝이 났다.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 안, 함께한 여행자들은 누가 먼저라 할 틈 없이 잠이 들었다. 만년 빙하는 짧은 한 낮의 꿈처럼 사라져 갔다.

태그:#어쩌다 남미,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엘 칼라파테, #모레노 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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