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1 07:46최종 업데이트 20.04.01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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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우리는 전에 없던 세계를 경험하는 중이다. 수능시험 듣기평가 시간에 비행기가 안 뜨는 걸 당연하게 알고 살아온 한국 사람들에게 이렇게 4월이 넘어서야 학교가 온라인 개학을 한다는 것은 보통 낯선 광경이 아니다. 손님 그칠 일 없을 줄 알았던 대박집들이 월세 걱정을 하고, 사드 사태, 한일 무역 마찰 때에도 살아남았던 관광지 명소들조차 문을 닫아걸고 있다.

서방 선진국들이 우리의 방역 시스템과 높은 시민의식을 칭찬하는 게 자랑스러운 한편, 우리가 늘 따라가려 했던 그 나라들이 이토록 우왕좌왕하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낯설다 못해서 공포스럽다.


사회학자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가 말한 것처럼, 한국은 특유의 속도감으로 빨리빨리 잘 사는 나라가 됐다가 남들보다 앞서서 망하기 시작한 선망국(先亡國)이 맞는 모양이다. 내리막길을 가는 행렬의 맨 앞에서 더듬어서 길을 찾아야 하는 역할을 이제 막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예전 위기 때와는 다른 점들이 보인다. '일'과 관련해서 우리사회에서 어느새 달라져 있는 점 세 가지를 꼽아봤다.

① IMF 때 첫번째 방법은 '해고'였건만
 

IMF 외환위기 당시인 1997년 12월 1일 방송된 KBS 뉴스 화면 ⓒ KBS

  
첫째는 '해고'가 이 위기를 타개하는 첫 번째 수단이 아니라는 점이다.
  
IMF 외환위기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 때 TV 뉴스에서 가장 많이 나오던 단어가 뭐였는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구조조정'이다. 이 말은 그 자체로는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사업 및 구조를 개선하는 것'이라는 의미지만,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유독 노동자를 대량으로 해고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 때를 기점으로 많이 쓰인 말 중에는 '고용유연성'도 있다. 이  말도 본래 그런 의미만은 아닌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쉬운 해고'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이 때 이후로 노동자 해고를 쉽게 해 줘야 기업이 살 수 있다는 주장이 경영계뿐 아니라 언론과 학계에서도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그 근거가 된 선진국 사례가 미국이었다.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의 위기를 거치면서 미국은 노동자 해고가 쉬웠던 덕분에 기업들이 경쟁력을 회복하고 다시 일자리가 늘어났는데, 유럽은 해고가 어려워서 경제가 정체됐고 일자리 수가 늘지 않았다는 식의 주장이 계속됐다.

2008년 금융위기로 그렇게도 우리가 선망(羨望)해온 미국도, GM 같은 글로벌 기업들도 헛점 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됐지만, 그럼에도 '고용유연성'이 있어야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된다는 주장은 거의 그대로 반복됐다.

2020년, 우리는 또 위기를 맞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말이 거의 들려오지 않는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가 최근 국회에 전달한 건의안에 어김없이 '쉬운 해고'가 포함돼 있기는 했지만, 거의 회자되지 않았다. 총선을 앞둔 정치인들 중에도 이 주장을 앞세우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그보다는 각 가정과 개인들이 위기를 잘 넘기게 할 수 있는 방안, 즉 재난기본소득 또는 긴급재난지원 제도에 대한 토론이 더 많이 이뤄진 것이 사실이다. 

이미 정부는 노동자를 해고하지 않는 기업에게 휴업 또는 휴직 수당 일부를 지원하는 고용유지지원제도의 대상과 범위를 발빠르게 확대했다. 소규모 업체들의 무급휴직자, 특수형태고용노동자, 프리랜서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방안도 마련됐다.

정의당은 기업에 투입될 예정인 100조 규모의 긴급 자금에 대해서 "해고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기업에만 투입하라"고 요구했다. 정의당은 이전에도 기업 내 최고 연봉을 제한하는 '살찐고양이법'을 등을 내놓았지만 현실화 시키지 못 했는데, 이번 요구는 그간의 흐름이 있어서인지 상당히 현실성 있게 들린다.

물론 코로나19 사태가 길어지고 매출하락이 지속되면 기업들이 고용을 줄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미 명예퇴직, 희망퇴직 방안을 마련한 기업들이 적지 않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렇더라도, 적어도 이번에는 노동자들에게 가장 먼저 희생을 요구하는 분위기는 없다. IMF 사태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세상이 달라졌다는 실감이 들 만하다.

② 소득이 꼭 노동의 대가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로 '일'과 관련해서 우리 사회가 예전과 달라진 점은 소득을 꼭 노동의 대가로만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에게는 "주된 소득은 반드시 일에서 나와야 한다"는 암묵적인 원칙이 있었다.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 그냥 앉아서 누군가에게 돈을 받는 것은 부도덕하다는 생각을 어렵게 말하면 '노동 윤리'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청교도 정신에 기반해서, 사람들이 노동이 천한 것이 아니라 숭고한 것이고 이를 통해서 부를 획득하는 것이 신의 축복이라고 깨달은 것이 자본주의 형성의 중요한 동력이었다고 했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지런하게 노동을 하는 사람이 존중과 존경을 받게 되며, 이런 윤리가 퇴색할수록 자본주의는 활력을 잃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도 이런 노동 윤리가 강한 탓에 정부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사정이 있는 경우에도 미성년자와 장애가 있는 사람의 경우만 제외하고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에 '일'을 해야 한다. 스스로 일을 못 찾으면 정부가 지정한 일, 즉 공공근로라도 해야 한다. 만일 그런 일도 마땅히 없으면 어딘가 지정된 장소에 나와서 앉아 있기라도 해야 한다. 실업자라면 정부가 지정한 교육을 받거나 이력서 쓰고 면접 보는 데 시간을 써야 한다. 그러지 않고 자기 시간을 자유롭게 쓰면서 소득 보조를 받는다는 것은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 이후로 논의된 재난기본소득, 긴급재난지원금 등에는 그와 같은 '노동 조건'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례적인 상황 하에서의 한시적인 지원이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이런 사회적 경험이 생기는 것은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사실상 그와 같은 '노동 조건'이 실제로는 사람들이 진짜 원하는 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데 제약이 됐기 때문이다.

청년 세대에 대해서는 더 그랬다. 1980년대 이후 출생자들을 일컫는 '밀레니얼 세대'는 대체로 교육 수준이 높고, 적성과 가치관에 맞는 일을 찾고자 하는 열망도 높다. 그런데 제대로 탐색하고 도전할 만한 시간과 재정적인 여유가 없어서 원하는 진로로 가지 못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청년들이 이용할 수 있는 제도인 내일채움공제, 근로장려금 등은 '지금 하는 일을 계속 해야 지원해 준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취업성공패키지, 청년구직활동지원금도 '성실하게 노력해서 최대한 빨리 취업하라'는 메시지를 준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이번 긴급재난지원제도는 그저 '부족한 소득을 채워준다'는 메시지만 담고 있다. 지금 하는 일을 계속 해야 할지 접어야 할지, 지금 하는 일이 없으면 바로 취업을 시도해야 할지 나중에 할지 등은 개인들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일 뿐이다. 정부는 그저 누구도 최저선 밑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떠받쳐줄 뿐이다. 비유하자면 일일이 간섭하고 지시하는 '헬리콥터 부모'가 아니라, 엇나가지 않을 정도의 울타리만 쳐주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자라게 해주는 부모 같은 태도다.

후자의 부모에게서 자란 자녀가 더 독립적이고 자기주도적이라고 하듯이, 이런 정부를 경험한 시민들도 그렇게 더 성숙한 태도로 자기 삶을 개척할 수 있다. 이번 긴급지원을 그냥 이례적인 일로 넘기지 말고, 정부의 역할을 바꿔나가기 위한 '정책 실험'(policy experiment)의 기회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란다.

③ 좀 쉬면 좀 어때서
 

몇달 전만 해도 재택근무가 이렇게 확 늘어나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 했다. ⓒ 연합뉴스

  
셋째, 이번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시작된, 아마도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줄 만한 변화 하나는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이 했던 말 속에 있다. "'아파도 나와야 한다'는 문화를 '아프면 쉰다'로 바꿔야 한다"는 말이다. 조금 더 확대해서 말해본다면 '쉬고 싶으면 쉰다'고 할 수 있는 사회여야 한다.

그동안 한국사람들은 마치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려진 것처럼, 초·중·고등학교를 거쳐서, 혹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고 직장을 다니는 내내 쉬지 않고 쭉 달려야 한다는 생각에 짓눌려 살아왔다. 그것도 졸업 전에 취업을 해야지 졸업 후 약간이라도 공백이 있으면 경쟁력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그렇게 공백이 없는 사람에게만 안정적인 직장에 정규직으로 들어갈 기회가 약간 열리고, 나머지에게는 열악한 일자리로 가는 길만 허락된다. 또 그 좁은 기회를 통해서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조차 어떤 이유로든 그 경로에서 이탈했다가는 바로 그 열악한 일자리로 가는 길로 안내된다. 대체로 출산과 육아를 거치는 여성들이 이 경로를 따르지만, 남자라 해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렇게 쉴 새 없이 달리는 동안에는 '아프지도 지치지도 않는' 초인이어야 한다. 본인이 아플 겨를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가족이 아플 때도 쉴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간절하게 보고 싶어 하고 돌봄을 필요로 할 때도 가지 못 하는 경험은 정신적 상처를 남긴다. 한국 사람들이 이토록 불행한 이유 중에 하나는 틀림없이 여기에 있다.

왜,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모두가 '쉬지 않고 달리며' 살아야 하는지를 이번 기회에 돌아봤으면 좋겠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하기 전까지 사이에 공백이 있으면 왜 안 되는 것일까? 그런 사람을 면접 보면서 "왜 아직까지 취업을 못 했다고 생각하세요?" 같은 질문만 하지 말고, "그 기간 동안의 경험에서 배운 것이 있나요?"라고 질문하면 왜 안될까?

출산, 육아, 가족 돌봄, 혹은 자기 자신의 휴식과 재충전을 위해서 일정 기간 일을 쉰 사람이라고 해도, 딱 그 만큼의 경력만 손해볼 뿐 나머지는 똑같은 조건에서 다시 일 하면 왜 안될까? 아이를 키우면서 한 경험이 일을 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또 직장을 그만두고 일정 기간 여행을 하거나 휴식을 취한 뒤에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진 사람을 '더 경쟁력 있는 사람'으로 봐줄 수는 없을까?

그런 흐름이 조금씩 생기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전 국민이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면서 재택근무도 해보고, 일을 쉬어보기도 하면서 공통의 경험이 생긴다면 더 빨리 사회가 달라질 수 있다.

내가 다니는 직장은 일주일에 이틀만 사무실에 나가면 나머지는 재택근무를 할 수 있다. 얼마 전까지 이런 얘기를 듣고 신기해 하는 사람이 많았다. 재택근무 하면 어떨지 한 번만 체험해 보고 싶다면서 부러움을 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때만 해도 이렇게 재택근무 경험자가 확 늘어나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 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재택근무에 대한 반응이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느 언론에서 다룬 사례를 보니, 사무실에서 다 같이 점심을 먹으러 나갈 때는 여유로운 편이었는데, 집에서 단 한 시간 안에 스스로 밥상을 차려서 먹고 치우기까지 하려니 더 빠듯하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도 있다. 역시 코로나19 때문에 학교에 안 가고 집에 있는 자녀들을 돌보기도 해야 하는데, 업무를 계속 하는지 아닌지 관리자가 원격으로 계속 체크를 하기 때문에 괴롭다는 반응도 있었다.

이례적인 상황에서 준비 없이 재택근무를 경험하다보니 조직도 개인도 혼란을 겪는 중인 것이다. 그동안 재택근무, 원격근무 등에 대한 필요가 커지고 확대돼온 것은 일 하는 사람에게 좀 더 '자유'를 주기 위한 취지였다. 각자가 업무를 재량껏 조율하면서 할 수 있는 직군에서 이런 제도가 더 빨리 도입돼온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저 월급 받고 하는 일이란 지정된 장소에서 상급자의 감시와 통제 하에서 하는 게 당연하다는 사람들로 이뤄진 조직에는 이런 제도가 도입될 이유도 없고, 도입된다 하더라도 잘 유지될 수도 없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기왕 재택근무의 실험을 한다면 '일 하는 개인에게 좀 더 자유를 줘도 된다'는 것을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자유가 있을 때, 자기 스스로 의미를 찾을 수 있을때, 자기 삶에 만족하고 있을 때, 더 일을 잘 할 수 있는 존재다.

그에 대한 믿음이 있고, 좀 더 자율성을 줘도 책임 있게 일을 할 수 있다는 신뢰가 있을 때, 더 성과가 나올 수 있다. 기업들이 그렇게도 원하는 '노동생산성' 제고도 이뤄질 수 있다. 이것이 단위 생산량 대비 노동자 수를 줄임으로써 높이는 방법 말고 진짜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이다.

비록 코로나19는 폭탄처럼 떨어졌지만

이렇게 돌아보면 이 변화들이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다. 비록 코로나19 바이러스는 폭탄처럼 떨어졌지만, 그로 인해서 사회가 뒤집어졌다기보다는 땅 밑에 차근차근 쌓여오던 작은 변화들이 이런 큰 충격을 계기로 쑥 지표를 뚫고 올라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우리에게는 이런 생각, 이런 열망이 자라왔던 것이다. 노동자는 단지 경제를 구성하는 한 단위로 필요에 따라 줄였다 늘였다 하는 대상이 아니라, 일 하는 우리 모두를 의미한다. 그리고 일 하는 우리 모두는 바로 이 사회에서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는 시민이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자기 삶도, 가족들도 더 돌볼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일에 대해 좀 더 자율성을 가질 수 있어야 하고, 일과 삶을 잘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아프면 아무 변명도 핑계도 없이 당당하게 쉴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교훈을 제대로 남길 수 있다면, 한국이 정말 선진국들보다 앞서서 해법을 찾아가는 선망국(先亡國), 아니 선망국(羨望國)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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