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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감염 사태를 재난이라고 합니다. 그 재난의 가장 취약한 고리에 놓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봅니다.[편집자말]
 
대리운전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 오늘도 고객의 귀가 길을 책임지고 있다.
 대리운전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 오늘도 고객의 귀가 길을 책임지고 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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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터는 거리와 도로 위다. 일하는 지역도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수도권, 대전권, 중부권 등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콜을 받으면 전국 어디든 간다. 출근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저녁 6시부터 일을 기다리기 시작해 첫차를 타고 귀가를 하니, 10시간 이상을 거리에서 보내야 한다. 코로나19로 일감이 반 토막이 난 상황이라 새벽 내내 길거리에서 콜을 기다리다 공치고 귀가하는 날도 있다.

그런 나를 요즘 플랫폼 노동자라고들 한다. 대리운전 노동자들을 부르는 새로운 말이다. 대표적인 플랫폼 노동으로 얘기되는 배달, 퀵 서비스, 대리운전, 가사노동 등은 이미 이전부터 존재했던 특수고용노동이고 한국 사회에는 250만의 특수고용노동자들이 있다. 언론에서는 급격하게 확산되고 있는 플랫폼 노동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들 하는데 정작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코로나19는 플랫폼 노동자들을 덮쳤고 우린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다.

지난 20년간 우리, 특수고용노동자들은 줄기차게 노동기본권 보장을 요구해왔지만 정부와 보수정치권에 의해 번번이 외면당해왔다. 간접고용과 기간제 노동은 회사(개별자본)가 사용자 책임을 회피하거나 임금을 줄이는 방식이라면, 특수고용노동은 회사와 함께 정부가 책임져야 할 사회안전망에서도 배제되어 고스란히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중의 차별이 낳는 문제점이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어렵고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노동자들에게 정작 사회안전망은 없다.'

산재보험가입 자격이 없는데, 산재보험가입자만 지원대상?

코로나19 위기가 지속되면서 특수고용노동자들의 절박한 절규와 항의가 계속되고 있다. 마스크조차 지급받지 못하는 간병인, 과로에 내몰린 택배와 배송노동자, 생계위기와 위험에 시달리는 학습지노동자, 보험모집인, 대리운전 노동자 등의 현실이 알려지면서 정부에서도 마지못해 대책을 내놓기 시작하였다.

고용노동부는 특수고용노동자에 대해 마스크 등 보호 장구를 지원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보호 장구가 필요한 대리운전노동자는 지급대상에서 제외되어있다. 또한 정부는 특수고용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생계지원대책을 펼치겠다고 발표하면서, 특수고용노동자 중에서도 산재보험가입대상만 지원하겠다고 한정했다.

특수고용노동자들은 다수가 산재보험에 가입하지 못한다. 학습지, 건설기계, 화물 등 일부 업종에 특례적용을 해서 산재보험에 가입할 수는 있다. 그런데 임의로 가입하는 방식이라 적용률이 저조하다. 업체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산재보험 가입한다고 했다가는 일자리마저 날라 갈 수 있는 상황에서 산재보험을 가입하는 배포가 큰 노동자가 얼마나 될까?

대리운전노동자는 산재보험이 적용되는 업종이긴 한데 '전속성'이라는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콜이 저녁 10시에서 새벽 2시에 집중되는 대리운전의 특성상 고객을 제시간에 운행하기 위하여서 업체들끼리 콜을 공유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공유하는 콜을 타면 전속성이 없다고 본다. 그러다 보니 전국 20만 명의 대리기사 중 겨우 5명 만이 가입(18년 기준, 근로복지공단)하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명확한 것은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산재보험 적용대상을 구분하여 전염될 정도로 진화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점들이 지적되자 정부는 지난 1차 추경예산안 지원 대상으로 고용보험을 적용받지 못하는 특수고용노동자들을 포함시켰다. 반가운 일이었다. 드디어 정부가 생계위기에 내몰린 특수고용노동자의 현실에 눈을 뜨는가보다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정부는 지원기준을 휴업상태에 있는 노동자만으로 한정했는데, 이는 수입이 반 토막 났어도 위험을 무릅쓰고 일을 해야 하는 대리운전과 학습지 등 특수고용노동자의 현실은 모르는 소리일 뿐이다. 정부의 지원기준발표는 결국 '생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일을 하지 마라'는 얘기다.

기사는 늘어나고 기사들 수입은 줄어들고 업체 수입은 늘고

한국사회가 코로나19라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는 동안 대리운전노동자들은 가장 어려운 조건에서 삶을 버텨나가고 있다. 그러나 대리운전노동자들을 옥죄고 있는 것은 오늘의 고통을 지나고 나면 맞이할 내일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자영업자들도 문을 닫게 될 것이고 삶의 일터를 잃은 사람들은 생계를 위하여 대리운전, 배달업으로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아니 이미 들이닥치고 있다. 일거리는 절반이상 줄어들었는데 기사들은 늘어나고, 생계위협은 대리운전노동자들을 옥죄어 오는데 업체들은 뒤에서 이를 즐기고 있다.

대리운전업체들은 20%가 넘는 과도한 수수료에도 불구하고 대리운전노동자에게 보험료와 프로그램비 명목으로 더 많이 갈취하고 있다. 심지어 출근비까지 부과하여 기사수입의 30%이상을 뜯어가고 있다. 그러다보니 대리운전 콜을 공급해야 할 업체들은 콜은 뒷전이고 기사장사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대리기사는 죽든 말든 등록기사가 늘어나기만 하면 업체들은 가만 앉아서 더욱 많은 이윤을 챙길 수 있는 기회가 오고 있는 것이다.

대리운전기사들은 스스로를 '乙 중의 乙'이라 자조한다. 대리운전 업계의 잘못된 시스템과 관행이 만드는 '업체와 프로그램사'의 착취 카르텔, 통제 속에 대리운전노동자는 생존의 위기에 빠져 있고 시민들의 안전마저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초반에는 대리운전노동자도 노동조합을 할 수 있었고 업체들과 교섭을 통해 최소한의 생계와 권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가 나서서 대리운전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을 부정했다. 정부는 IMF 이후 일상화된 해고, 과잉경쟁과 임대료에 시달리다 문을 닫는 자영업자들이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으로 대리운전을 활용했다. 대리운전은 일상화된 구조조정이 벌어지는 사회의 안전판으로 이용되었다. 노동기본권을 박탈하자 업체들의 전횡이 판을 쳤고 대리운전노동자의 생존권은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노조 할 권리와 실효성 있는 생계 대책이 필요

그래서 대리운전노동자들은 업체의 전횡에 맞서 생존권을 지키고 최소한의 권리라도 찾고자 노동기본권을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해 왔다. 문재인 정부는 '이상한 사장님',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을 약속했지만 허언에 그치고 있다. 3일이면 결정됐어야 할 대리운전노동조합의 노조신고필증은 1년이 다되도록 고용노동부 관료들의 책상에서 잠자고 있다.

현재까지 정부의 코로나19 대책은 현장의 대리운전노동자들에게는 말 뿐인 잔치상이고 언발에 오줌 싸기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정부 대책의 안일함 이전에 대리운전을 사회 안전판으로만 활용하고, 당사자가 스스로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단결권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국가폭력'이다. 장기화 되고 있는 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는 대리운전노동자들이 '노조 할 권리' '노동기본권 보장'을 외치는 이유이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말의 성찬이 아닌 최소한의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지금 당장! 대리운전노동자의 '노조할 권리 보장'과 실효성 있는 생계 대책이 필요하다.
 

태그:#대리운전기사, #김용균재단, #코로나19, #비정규직대책, #노조할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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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26일 출범한 사단법인 김용균재단입니다. 비정규직없는 세상, 노동자가 건강하게 일하는 세상을 일구기 위하여 고 김용균노동자의 투쟁을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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