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25 20:09최종 업데이트 20.03.25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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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성착취' 피의자들에 대한 신상공개 요청이 거세다. ⓒ peakpx

 
10살 때 처음 자위를 했다. 우연히 벌어진 일이었다. 내 몸이 이런 느낌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두려우면서도 신기했다. 그때부터 내 섹슈얼리티의 탐구가 시작됐다.

탐구를 한창 진행하고 있을 때, 친구들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다. 혹시 나만 이러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성관계란 어떤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친구들에게 대놓고 이야기하긴 어쩐지 쑥스러웠다. 인터넷 채팅에서 나와 같은 소녀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지만, 인터넷엔 13살 소녀와 만나고 싶어 하는 아저씨들밖에 없었다. 본능적으로 피했다. 저 아저씨들은 나를 해할 거라는 본능적인 감이 있었다. 


나는 나를 해할 것 같은 아저씨들이 아니라 또래 소녀들과의 대화가 필요했다. 가슴은 언제 커지는 걸까, 브래지어는 언제 하는 걸까, 생리는 언제 하는 걸까, 궁금한 게 많았다. 하지만 또래 소녀들과는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누구도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중학생이 되고 기술가정 시간에 '자위'라는 걸 배웠다. 내가 10살 때부터 해오던 걸 '자위'라고 부른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신이 났다. 학교에서 자위를 배우다니. 각자의 몸에 대해서, 안전하고 청결한 자위의 방법에 대해서 수업 시간에 마음껏 배우게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당시 남성이었던 기술가정 선생님은 자위에 유독 관심을 보이는 나를 부담스러워했다. 나는 '자위는 숨겨야 하는 건가 보다' 생각했다.

중3이 된 후 여성만 자위를 숨기는 거라고 깨달은 사건이 있었다. 국사 공부를 할 때 동생 책을 빌린 적이 있다. 책을 펼치자마자 온갖 성기의 그림, 여성과 남성이 성관계를 하는 그림, 야한 말들, 자위를 뜻하는 '딸딸이' 등의 은어 등이 가득 적혀 있었다. 동생에게 이거 다 혼자 그린 거냐고 물었다. 동생은 당황해 하며 친구들이랑 장난으로 그린 거라고 했다.

그때 알았다. 남성은 또래 친구들과 자위와 성과 몸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구나. 나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여성은 이런 걸 숨기고 남성은 드러내도 된다고 배워갔다. 여성이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이 사회에선 금기라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어린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여온 억압의 경험이 내게 알려줬다.

성인이 된 후에도 금기를 깨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걸 깨면 어딘가 망가진 여성이 되는 것 같았다. 자위를 해 본 적 있느냐는 남자친구의 질문에 나는 "그게 뭐야?"라든지, "아니, 안 해 봤어"라는 말로 답하곤 했다.

욕망을 억눌러야 하는데, 남성의 성적 도구는 돼야 한다는 역설
 

여성들은 불법촬영물로 인해 오랜 시간 고통을 겪어왔으나, 실제로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은 솜방망이거나 아예 없는 경우가 많았다. ⓒ pixabay

 
그런데 여성의 성적 욕망을 못 드러내게 하는 사회에서 여성이 성적 도구로 이용 당하는 일들이 있었다. 불법촬영물이 인터넷에 퍼지면서 죽음을 택하는 여성에 대한 소식을 들은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성인이 된 후에만 벌어진 일들이 아니다. 약 20년 전부터 동영상이 유출된 여성 연예인은 잘못한 게 없는데 죄송하다고 기자회견을 해야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한 피해 여성 연예인은 동영상을 유포하겠다는 남성 앞에서 무릎을 꿇기도 했다.

여성의 몸은 남성의 도구로써 이용된다. 자신의 성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수많은 남성이 여성의 몸이 등장하는 불법 촬영 영상을 다운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는 돈을 벌기 위해 여성이 등장하는 불법 촬영 영상을 P2P 사이트에 올린다. 양진호가 천 억대 자산가란 걸 생각하면 여성이 나오는 불법 촬영 영상에 대한 남성의 수요가 어느 정도 규모인지 짐작할 수 있다.

남성의 신체를 촬영한 이미지 혹은 영상을 가지고 유포하겠다고 협박해 돈을 뜯어내는 경우도 있다. 이른바 '몸캠 피싱'이다. 여성과 피해 양상이 어떻게 다른가 궁금해서 몸캠 피싱 피해자 모임 카페를 자주 방문한 적이 있다. 온라인을 매개로 한 건 같지만, 여성의 불법촬영 유출과 피해의 양상이 사뭇 다른 듯했다.

여성이 불법촬영 당한 영상은 P2P 사이트, 온갖 포르노 사이트 등에 유포된다면 남성의 영상은 유포 범위가 상대적으로 좁았다. 또한 여성은 영상이 유포된 후 업체를 통해 아무리 삭제를 진행해도 완전한 삭제가 되지 않아 절망을 겪는다. 반면 내가 카페에서 목격한 사례들에서, 남성 피해자의 지인들은 "너 잘못한 거 없어", "남자가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어쩌다 재수 없게 걸린 거야"라며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비난했다.

남성이 피해자인 경우, 가해자가 남성의 몸캠 영상을 지인을 중심으로 유포하는 이유는 남성의 몸을 성적 도구로 활용하기 위함이 아니다. 피해자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해서다. 그래서 온라인을 통해 유포하지 않고 수치심을 빌미로 피해자에게 직접 돈을 입금하라는 협박을 하기도 한다. "입금하지 않으면 네 몸캠 영상을 퍼뜨린다"는 식이다. 이렇듯 피해 양상은 비슷하지만 여성의 몸은 남성의 도구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에 대규모 유포가 진행되고, 남성의 몸은 여성의 도구로 활용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대규모 유포는 진행되지 않는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여성의 성적 욕망은 금기라고 체화해 왔고, 나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을 견디며 살아왔다. 하지만 한편에선 여성은 남성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도구로 이용된다. 비슷한 사례에서조차 남성 피해자는 성적 도구로 이용되지 않았지만, 여성은 철저하게 남성을 위한 도구로 이용됐다.

여성은 성적 욕망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금기와 남성의 성적 욕구를 충족해야 한다는 도구, 그 사이에 늘 존재해 왔던 것이다.

오로지 '여성'만이 도구로 취급됐다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와, 박주민 최고위원, 진선미 의원이 2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텔레그램 N번방 성폭력 처벌 강화 긴급 간담회’에 참석해 아동성착취물이 포함된 불법촬영물 제작, 유포로 국민적 공분을 사고 있는 텔레그램 N번방의 범죄를 규탄하며 재발금지법 통과와 해당자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 유성호


그리고 갓갓, 박사, 와치맨 등의 가해자들이 저지른 n번방 사건이 터졌다. 피해 여성 70여 명 중 청소년이 1/3 정도 된다. SNS에서 자신의 성적 욕망을 표출하다(이런 계정을 '일탈계'라고 부른다) 가해자들이 보낸 피싱 링크에 잘못 접속해 모든 신상 정보가 털린 이들도 꽤 된다고 한다. 이 이후는 많은 이가 아는 대로다. 

피해 청소년들은 나와 비슷한 성장기를 보낸 것으로 짐작된다. 내가 청소년이던 시절,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이 있었으면 나도 n번방의 피해자가 되었을까.

익명의 누리꾼은 네이버 지식인에 "자기 몸 영상 올리는 음란녀들부터 처벌해야 하는 것 아닌지"라고 올리며, 시청료를 냈는데 방이 없어졌으니 되레 자신이 피해자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성적 욕망을 표출하는 건 음란한 게 아니다. 남성 청소년들이 성에 대해 농담을 하고 자유롭게 이야기하듯(여성 혐오적 표현을 쓰는 건 다른 문제겠으나) 여성 청소년도 똑같을 뿐이다. 

일탈계는 여성만 운영하고 있지 않다. 남성들도 운영한다. 그들도 성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성관계를 할 파트너를 찾기도 하고, 자신의 신체 사진을 찍어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남성들은 n번방의 피해자가 되지 않았다. 오직 여성만이, 자신의 성적 욕망을 표출했다는 이유로, 26만 명 남성 가해자의 도구가 돼 끔찍한 피해를 입었다.

또 절망스러운 건, 여러 포르노 사이트에 'telegram korean' 등의 키워드가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오르내리고 있다는 거다. 2차, 3차 피해가 시작되고 있다는 뜻이다.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끔찍한 26만 개의 남근들이 성적 욕망을 표출한 여성을 어떻게 도구로 썼는지, 수많은 피해자들의 존엄을 어떻게 짓밟았는지 봤다.

우린 목격자다. 목격자가 해야 할 일은 여성을 억압하는 금기와 남성을 위한 도구, 양 극단의 사이에만 놓은 채 남성의 입맛대로 여성을 가져다 쓰는 남근 중심 사회에 저항하는 것이다.

"Not all man(모든 남자가 그런 건 아니에요)"이라며 변명부터 하는 이들의 말은 들어주지도 말자. 이 사태에서 피해 여성들에 대한 조금의 비난도, 남성의 성욕에 대한 조금의 인정도 있어서는 안 된다. 어떤 순간에라도 오롯이 피해자 편이어야 한다. 성녀와 창녀, 양 극단을 부수고 해체해서 가해의 수렁에 빠진 자매들을 건져와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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