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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과 요리에 관한 책들도, 진화한다. 초기 단계에서 요리책은 단순히 '조리법'에 한정된다. 수많은 레시피가 나열돼 있고, 칼질, 재료보관법 등이 소개된다. 그러다 차츰 다양화된다.

맛집을 찾아나서는 책도 있고, 이탈리아 요리사에게 듣는 파스타 요리법도 있다. <딸에게 주는 요리책>은 어느덧 페미니스트의 관점을 담아 <사위에게 주는 요리책>으로도 변한다. 독자 역시 세분화된다. 싱글을 위한 책, 자취생을 위한 책도 있다. 

<밥상의 말>은, 요리를 위한 책은 아니다. 조리법은 가끔 전달되지만 상세하지는 않다. 이 책은 사랑하는 사람들, 살아가는 사회를 환기한다. 할머니가, 어머니가 늘 저자에게 차려주었던 밥상의 '온전한 세상'을 기억한다.

그녀가 아이에게 혹은 자신의 남편과 함께하는 식탁의 풍경들을 통해 사회와 대화한다. 이 책은 밥의 정신과 정치를 다룬다. 그런 점에서 <밥상의 말>은 숙성한, 성숙한 책이다.

왜 장례식장의 음식은 육개장일까
 
그네들은 (수십년 간) 하루 세 번 밥상을 받아보았고, 하루 세 번 밥상을 차려도 보았다. 목수정의 밥상은 수많은 이들을 소환하고, 사회와 대화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 밥상에 관한한 여성이요, 밥차리는 주부는 전문가다. 그네들은 (수십년 간) 하루 세 번 밥상을 받아보았고, 하루 세 번 밥상을 차려도 보았다. 목수정의 밥상은 수많은 이들을 소환하고, 사회와 대화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 책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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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개장은 저자 목수정이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먹었던 음식이다. 고2 때, 평생을 감기 한 번 앓은 적 없던 아버지는 망가진 신장으로 세상을 급히 떠났다. 그 허망함과 고통의 길에 모인 이들은 육개장을 먹는다. 왜 그때의 음식은 늘 육개장인 걸까? 

허영만의 만화 <식객>에선, 나라 주권을 빼앗긴 순종이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을 때, 대령숙수가 대령한 음식이 육개장이었다. 농자천하지대본을 내세운 나라. 밭일하는 소, 고춧가루와 마늘, 숙주와 고사리 그리고 파. 조선의 마음 같은 음식이 육개장이었기 때문이다.

며칠 후면 나는 형제들과 함께 조상들의 묘 이장 작업을 하게 된다. 5대조부터 2대조 할아버지와 일찍 작고한 막내 숙부까지, 흩어진 묘들을 정리할 참이다. 굴삭기도 써야하고, 다섯 기나 묘도 파야해 인부들도 샀다. 그들 중 책임자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아는 고향 이웃이다.

땅에 묻혔던 이들을 다시 보아야 하니, 또 한번의 장례를 치르려는 참이다. 그 작업 중에 '점심 밥상'을 어찌해야 하나? 작업자 모두들 상관이 없다지만, 나는 그 엄숙한 의례의 시간에 가장 적절한 음식을 내고자 고민했다. 그리고 내 결론 역시 육개장이었다. 

목수정은 그가 사는 프랑스 브르고뉴 시골집 뒤편 숲에서 우연히 고사리를 발견한다. 프랑스인들은 독이 있다며 먹지 않는 식물이다. 오직 그녀만이 4월 말 5월 초가 되면 연례행사로 '고사리 채집'에 들어간다. 그리곤 한 솥 가득 육개장을 끓여, 가족과 이웃과 나눈다.

그때 이방인 여자 목수정은 '재야에서 활약하는 숨은 마녀(마녀는 약초 등으로 사람을 치유하던 여인들)'가 된다. 고사리는 아빠를 보내며, 그러나 아빠와 끝내 나누지 못한 정을 소환하는, 그녀만의 음식이다.

밥상에 새겨진 서구 프랑스 사회의 비극

저자 목수정은 나이 서른에 프랑스 유학을 떠났고, ("언어를 배우려면 연애를 해!"가 원인이기도 해서) 거기서 프랑스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정착하고, 딸을 낳는다. 18시간 산고 끝 출산 후, 산부인과 전문병원 측이 아침식사로 내놓은 것은 '커피 한 장, 비스킷, 과일, 버터와 야구르트'였다.

이 놀라운 밥상을 받아놓고 그녀는 "걸쭉한 미역국은 못 내놓을망정, 산후에 좋은 음식이라도 없다는 거야?" 묻는다. 그랬다. 없었다.

"일본도 장수의 비결로서 식생활을 내놓고, 민간의학에 의존한다. 북미 인디언들도 그랬다. 그런데 왜 유독 이곳 프랑스에선 음식을 통한 '치유'의 지혜가 없는가? 왜 이들은 당연히 있어야할 전통의 지혜와 삶에서 단절돼 있는가?"

저자가 찾은 원인은 중세 말부터 200여 년간 이어온 마녀사냥의 비극이다. 기록된 11만 건의 마녀사냥에서 반은 죽음으로 그녀가 마녀가 아님을 증명했다. 그때 '치유하는 음식을 만드는 나이든 여성' '혼자 사는 여성들' '경험 많은 산파들' '응급처방과 민간요법을 갖고 있던 여인들'이 죽어갔다. 

그러니 밥상에는 그네들의 역사와 사람들이, 그 땅에서 엮어온 문화가 내려앉아 있다. 우리도 그렇다. 설날에 먹는 흰 떡국엔 정갈한 한 해의 시작이 스며있다. 보름에는 말린 한겨울 말린 나물들로 해먹는 오색나물밥과 부럼이 있다.

한 해 중 태양의 기운이 가장 강한 날, 음력 5월 5일 단오엔 수레바퀴 모양 떡을 먹고, 제호탕과 창포주와 앵두화채를 나누며 닥쳐올 더위를 미리 막는다. 추석에 송편을 빚고, 동지에 팥죽을 해먹는 이 '전통'은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들을 통해 고스란히 밥상 위에서 전수받는다. 

밥상 들여다보면 사람과 사회와 역사가 있어

밥상엔 여러 '사람들의 무늬(人文)'가 새겨져있다. 사람 안에는 땅도 그려져있다. 목수정의 남편 희완(Riwan)은 프랑스 북서쪽 브르타뉴 사람이다. 20세기 초까지도 (프랑스어와는 완전히 체계가 다른) 브르타뉴어가 사용됐을 만큼, 독자적 정체성을 가졌으나(5세기 전 프랑스에 편입), 그것은 한편으로 배제와 차별의 구실을 했다.

본류 프랑스어에 약하고, 지역적 약점을 가진 이들은 도시에 와 저임금 노동자로 살게 된다. 이쪽 지역의 대표 음식이 크레프다. 인도의 난과 한국의 전과 비슷하지만, '압도적으로 얇고 대책 없이 넓은 음식.

내 아버지는 농부였다. 새경을 받는 머슴도 하다가, 남의 땅 소작도 하다가, 형님댁에 더부살이도 할 때, 그는 늘 땅에 발딛고 서 있었다. 그러다 당시 해일처럼 일었던 전면적 이동, 이촌향도에 실려 도시 변두리 거여동 그리고 도성 바깥 안산과 인왕산 자락에 표류한 일원이었다.

그는 서울에서도 여전히 '농사'를 지었다. 서울시청이 그를 고용했다. 아버지는 볏단처럼 쓰레기 봉투를 모으고(키가 작고 몸이 왜소했던 그로선 고된 일이었다), 정년까지는 도로를 담당해 낙엽들을 그러모았다. 그의 일은 땅(아스팔트)을 떠나지 못했다.

아버지가 좋아한 음식은 순댓국이었다. 고된 노동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시켜줄 밥이요, 동료들과 나눌 술안주. 소고기는 아니고, 돼지살코기도 아닌 음식. 내장에 잡채와 피를 넣어 만든 그 음식은 아버지처럼 피라미드의 낮은 곳 사람들에게 차례가 된 음식이었을 것이다.

곡식가루와 물 그리고 소금만 있으면 어디서든 구워낼 수 있는 단순한 음식이 크레페다. 그에 대하여 브르타뉴 사람 희완의 애정 역시 대단하다. "심플하고 본질적인 것에 천착하며, 이것저것에 의미 부여하기 좋아하면서 형식에 갇히지 않는" 그네들의 유전적 심성과도 닮아있기에.  

번역가이기도 한 목수정은 <에코 사이드>(마리-모니크 로뱅/시대의 창) 번역을 맡아하다 전율할 구절을 발견한다. 1960~1970년대 자폐를 앓는 아이들 수는 5만명당 1명이었지만, 2014년엔 50명당 1명이 되었다는 것. 그 문제의 주범은 유전자조작 식품과 글리포세이트.

이 제초제에 적셔져 키워진 곡물들로 시리얼을 만들고, 그걸 먹고 자란 아이들은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일에 불같이 화를 내거나, 학교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한다. 단식하는 세월호 유가족 앞에서 피자를 뜯으며 폭식투쟁을 벌인 일베와 글리포세이트는 멀리 있지 않다. 예민한 엄마들, 여성들은 그 작은 밥알에서 사회 비극의 원인을 찾아낸다. 

목수정이 지어올린 밥상 <밥상의 말> 책밥상은 지난 2020년 3월 8일자 서문이 새겨져 있다. '전 지구촌을 휩쓰는 전염병의 주기적 창궐'도 이 밥상엔 올라있다. 어쩌면 밥상은 빙산의 솟아오른 윗부분인지 모르겠다.

그 아래 잠긴 것들이 보이진 않지만, 그 무겁고 큰 실체가 윗부분을 결정짓는다. 그리고 그 밥상에서 다시 우리의 삶이, 개인과 가정의 행복과 불행이 비롯되는 첫 술이 떠진다.

이 밥상은 마법의 양탄자와도 같다. 우릴 여기저기로 안내한다. 뿐인가? 크리스마스 캐롤의 스크루지처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만나게 된다. 음식을 통해, 밥상을 통해 이렇게 환히 나와 우리가 비추인다니. 어쩌면 이 밥상은 마녀의 수정구인지도 모른다. 

밥상의 말 - 파리에서, 밥을 짓다 글을 지었다

목수정 (지은이), 책밥상(2020)


태그:#밥상의말, #목수정, #책밥상, #글리포세이트, #육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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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읽고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사진 찍고, 흙길을 걷는다. 글자 없는 책을 읽고, 모양 없는 형상을 보는 꿈을 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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