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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 금오산
 구미 금오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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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구미'

1961년, 내가 구미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한 고교(중동고)에 진학했을 때다. 당시 구미에서 서울로 고교 진학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특히 나의 심한 경상도 사투리가 학급 친구들에게는 무척 신기했나 보다. 그래서 쉬는 시간이면 학급 친구들이 몰려와 내게 물었다.

"얘, 너 어느 중학교를 나왔니?"
"구미중학교 나왔다 아이가."
"아이가? 그 말 참 재미있다. 구미중학교가 어디 있니?"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에 있다."
"두메산골인가 보다."
"아이다. 구미는 기차 정거장도 있고, 경찰서도 있다. 보통급행 열차도 서는 제법 큰 고장이다."
 

나는 그들이 '구미'를 이름 한 번 들어보지 못한 경상도 깊은 두메산골이라고 무시하는 것 같아서 열심히 설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날 두메 구미 촌놈으로 취급했다. 그러다 5.16 쿠데타 이후엔 '박정희 의장 고향'이라고 했다. 그러면 상대는 곧 알면서 '와!'라는 감탄사를 쏟아내곤 했다. 군대 시절에 부대 상관들은 내 인사카드를 미리 보고 파악한 탓인지 그들이 먼저 알고 어떤 관계인지 묻곤 했다. 

이후 사람들은 내 고향을 'TK의 심장이네, 친일 보수의 고장이네'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나는 불만이 컸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 할아버지께 '선산 구미는 충절과 학문의 고장'이라는 말을 귀에 익도록 들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1999년 중국대륙 항일유적지 답사 길에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서 '허형식' 동북항일연군 군장을 만난 뒤부터는 그런 부정적인 세평에 초연할 수 있었다. 그분은 상모동 이웃마을인 임은동 태생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시대에 구미에서 만주로 가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그래서 작품 소재로 좋을 것 같아 그 이듬해 홀로 현지를 취재했다.
  
 왕산 유허비 앞에서(오른쪽부터 전 강구휘 도의원, 전 허호 구미시의원, 기자).
 왕산 유허비 앞에서(오른쪽부터 전 강구휘 도의원, 전 허호 구미시의원, 기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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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를 간다"

2001년 겨울, 고향의 한 친구(강구휘 전 도의원)와 함께 박정희 상모동 생가에 갔다. 그곳 상모교회에 가서 구미보통학교 친구였던 한상도 장로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도 들었다. 그다음 임은동으로 가서 구미중학교 한 선배(허호 전 시의원)로부터 왕산가의 피어린 항일투쟁사를 들었다. 그와 함께 바로 이웃마을 오태동 장택상 생가에 가서 세 집안에 얽힌 이런저런 얘기도 들었다. 그런 뒤 금오산에 있는 왕산 유허비까지 답사했다.

그날 저녁, 친구와 한 밥집에서 저녁을 먹는데 바로 옆 자리에 늙수그레한 노인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친구는 내게 그 어른이 지난날 선산경찰서 '장 형사'라고 소개하면서 합석케 해 박 대통령의 일화를 들을 수 있었다.

5.16 쿠데타에 고향사람들도, 가족까지도 놀랐다고 한다. 경상도 벽촌 구미 상모동 출신 무명의 한 군인이 그렇게 엄청난 일을 할 줄은 몰랐다고 입을 다물지 못한 모양이다. 당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입법·사법·행정 등 3권을 손아귀에 있었다. 그러자 권력을 쫓는 각지의 '똥파리' 같은 이들이 멀리 구미 상모동까지 날아오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고질적인 적폐는 혈연·지연·학연이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를 간다"든지, "한 마당에 팔촌 난다"라면서 혈연을 유독 강조했다. 어떤 사학의 경우엔 이사장에서부터 교장, 행정실장, 수위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집안 친인척이 차지하기도 했다.

또 "까마귀도 고향 까마귀라면 더 반갑다"든지, "우리가 남이가"라는 지역 연고주의도 있다. 자기네 고장 사람들만 똘똘 뭉쳐진 기업도 흔히 볼 수 있었다. 정계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학벌도 예외는 아니다. 사법부나 국방부 같은 곳조차도 무슨무슨 회라는 둥, 마피아 조직처럼 선후배 조직이 있었다고 한다. 
  
 전 선산경찰서 장영택 형사.
 전 선산경찰서 장영택 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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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리' 쫓는 게 임무

다음은 당시 들었던 장영택 형사의 말이다.
 
"5.16 후 어느 날 경찰서장이 정보과 순경 네 사람을 갑자기 부르더니 즉시 무장을 하고 구미역으로 출동하라고 명령하더군요. 상행열차로 부산에서 올라오는 박 의장 형 박동희씨를 구미역에서 상모동 생가로 호송한 다음, 그날 그 시간부터 한 사람씩 24시간 교대로 생가에 상주케 하면서 출입자들을 일일이 체크하라고 지시합디다.

그렇게 된 사연은 그 며칠 전, 한 예비역 대위가 상모동 박동희씨를 찾아와 향응을 베풀며 온갖 말로 환심을 사게 한 뒤 앞장 세워 당시 부산에 있는 경남 도지사실로 갔답니다. 당시는 군정으로 군인들 세상이니까 예비역 대위가 동희 씨를 앞세워 이권을 노렸던 모양입니다. 현역 군인이었던 경남도지사가 국가최고회의 의장 친형이 구미에서 왔다고 하니까 차마 문전 박대는 못하고 응접실로 모신 뒤 서울 장충동 의장 공관으로 비상 전화를 한 모양입니다.

경남지사의 보고를 받은 박 의장은 지사에게 즉시 동희 형을 열차에 태워 고향집으로 귀가 조치케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날부터 선산경찰서 경찰이  당신 생가를 경비하면서 청탁자들의 접근을 저지하라는 지시를  서장에게 한 모양입니다(당시 선산경찰서는 구미에 소재했음).

처음에는 무장한 순경 네 사람이 돌아가면서 교대로 생가를 지켰는데 피차 불편하여 한 사람이 맡기로 하자 동희씨가 저를 선택하더군요. 그때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18년 동안 상모동 생가가 나의 근무처였습니다.

무장 경찰이 생가를 지킨다는 소문이 나자 이후 똥파리(청탁자)들이 얼씬도 하지 않더군요. 그래도 긴장을 풀지 않고 끝까지 생가에 상주하며 친인척들 관리를 했습니다. 혹 서울에서 박람회나 청와대에 경사가 있을 때는 제가 대통령 고향 일가친척들을 인솔하여 상경했지요.

박 대통령, 그분은 참 용의주도한 사람입니다. 1년에 네 차례 큰댁에 제수비로 금일봉을 저를 통해 전달했는데, 요즘(2001년 무렵) 10만 원 정도였어요. 1960년대 어느 날 청와대에서 저를 호출하더군요. 그날 청와대에 이르자 박 대통령이 현관까지 마중을 나오셨더군요. 내실로 가자 육 여사가 손수 저녁상을 들고 오셨는데 대통령과 겸상케 했어요.

그날 밤 청와대를 떠나오는데 박 대통령이 현관까지 배웅하면서 저에게 금일봉을 주시더군요. 그러면서 "장 형사, 이 돈을 은행에 정기 예금시킨 뒤 그 이자를 생활비에 보태 쓰라"고 하시더군요. 형사들은 눈치 하나는 빠르잖습니까? '너 이 돈 먹고 다른 돈이나 이권에는 절대 혀를 대지 말라'는 경고로 이해했지요.

그 뒤로도 대통령께서 생가에 나들이 하실 때는 언제나 제 몫의 선물이나 금일봉을 빠트리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철저한 친인척 관리로 박동희씨는 돌아가실 때까지 평범한 농사꾼으로 사셨지요.

박동희씨가 이권에 개입했다는 이야기는 그 어디에도 없었지요. 오히려 당시 구자춘 경북지사가 생가 앞길에 자동차가 다니도록 길을 넓혀주려는 것을 동희씨가 그건 동생에게 누가 된다고 말렸고, 한전에서 전기를 놓아주려고 하자 다른 동네 다 놓은 뒤에 당신 집에 놓아달라고 하여 이웃 동네들이 그 혜택을 봤지요.
  
 박정희 부녀가 투표하는 장면
 박정희 부녀가 투표하는 장면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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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와 비슷한 얘기는 고향사람들을 통해 몇 차례 들은 바 있다. 당신 조카 박재석씨가 구미에서 문구상을 하다가 삼촌이 대통령이 되자 서울로 이사를 한 모양이었다. 그 소문을 들은 박정희가 조카를 불렀다.

"당장 구미로 내려가라."
"삼촌,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국가로 거주이전의 자유가 있습니다."


조카의 항변에 박정희는 구미로 쫓지는 못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얼씬하지 못하게 한 모양이다. 당시 구미에 살던 가까운 친척들도 청와대에서 '물 한 잔도 못 얻어먹었다'고 말할 만큼 박정희는 친인척 관리를 철저히 했던 모양이다.  
 
 1977년 1월 19일 열린 새마을 국민운동본부 발족 기자회견에 나선 최태민 총재.
 1977년 1월 19일 열린 새마을 국민운동본부 발족 기자회견에 나선 최태민 총재.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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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body's perfect.

"Nobody's perfect"라는 말처럼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게 친인척 관리에 철저했던 박 대통령이었건만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아내를 잃은 뒤부터는 느슨해졌나 보다.

둘째 딸 박근혜를 퍼스트레이디로 내세운 뒤, 그에게 접근하는 '똥파리 한 마리'는 끝내 쫓지 못하고 이승을 떠났다. 아마도 그 모두가 박 대통령의 업보인 모양이다.

그 똥파리가 누구고, 그가 그 집안에 어떤 패악을 끼쳤으며, 대한민국 국정을 문란케 한 얘기는 이 기사에서 생략한다. 어쩌면 독자들이 나보다 더 잘 알 것 같기 때문이다.

(* 다음 회에 계속)

태그:#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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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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