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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글 "나무를 다 베면 사람이 쉴 그늘도 사라진다"에서 이어집니다.
 
아벌 타스만 해안 트랙의 ‘해안’ 길 중 가장 멋진 길, 오네타후티만(Onetahuti Bay)에서 검은머리물떼새를 만났다. 한국에서는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받고 있다.
 아벌 타스만 해안 트랙의 ‘해안’ 길 중 가장 멋진 길, 오네타후티만(Onetahuti Bay)에서 검은머리물떼새를 만났다. 한국에서는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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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와로아 산장에는 젊은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오클랜드 호익 칼리지 학생들이었다. 스무 명에 가까웠다. 당연히 시끌벅적 할 수밖에 없었다.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즐기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이른 저녁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을 위해서였다. 아벌 타스만 해안 트랙에서 가장 많이 신경이 쓰이는 구간은 아와로아 작은 만(Awaroa Inlet). 몇 해 전 이 트랙에 도전한 지인이 바로 여기에서 길이 막혀 되돌아왔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른 새벽 아와로아 산장을 떠났다. 하늘에서는 해와 달이 임무를 교대하고 있었다.
 이른 새벽 아와로아 산장을 떠났다. 하늘에서는 해와 달이 임무를 교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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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물에서 스민 발끝 정기가 머리끝까지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짐을 꾸렸다. 몇몇 여행자도 산장 문을 나섰다. 이때를 놓치면 반나절을 더 기다려야 한다. 저 멀리 보이는 주황색 화살표를 따라 발걸음을 내디뎠다. 채 빠지지 않은 바닷물이 신 새벽 사이로 찰랑거렸다. 하늘에는 해와 달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떠 있었다. 마치 임무 교대식 같아 보였다.

생각보다 더 바닷물은 차가웠다. 발끝에서 시작한 정기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대오각성은 아니더라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모르는 즐거움도 동시에 전해졌다. 이른 새벽에 바다를 가로지르는 여행자. 그건 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오묘한 삶의 맛이다.

30분 정도를 걸어 피안의 세계에 도착했다. 몇 시간만 있으면 내가 걸어온 길은 다시 바닷물로 잠길 것이다. 작은 만을 지나 본격적인 걷기를 시작하기 전 이른 아침을 먹었다. 여린 달빛과 햇빛을 조명 삼아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봤다. 아쉽게도 족적 하나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내 삶도 그러할 것이다. 저 세계에서 이 세계로 애써 건너왔건만…. '레테(망각)의 바다'는 그렇게 무심했다. 
 
아벌 타스만을 지키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자원봉사 산지기들. 맨 왼쪽이 ‘미스터 러스티’(Mr. Rusty, 구릿빛 아저씨).
 아벌 타스만을 지키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자원봉사 산지기들. 맨 왼쪽이 ‘미스터 러스티’(Mr. Rusty, 구릿빛 아저씨).
ⓒ 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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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타라누이에서 만난 '구릿빛 아저씨'

중간 기착지인 토타라누이까지는 7.2km, 2시간 거리다. 이곳은 아벌 타스만 올레길의 마지막처럼 다가왔다. 캠퍼 밴 마을, 텐트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초호화(?) 별장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도로까지 있어 차가 오가기도 한다. 수상택시(Water Taxi)의 종점도 보였다.

나는 여기서 한 시간 가량 쉬었다. 내 눈을 끈 멋진 남자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은 러셀 하젤딘(Russel Hazeldine). 아벌 타스만 지역에서는 '미스터 러스티'(Mr. Rusty)로 통한다. 굳이 우리말로 옮기면 '구릿빛 아저씨'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예순이 넘어 보이는 그는 정말로 몸 전체가 구릿빛을 하고 있었다. 태양 빛을 수십 년 동안 온몸으로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빚어낼 수 없는 '청동상'의 모습을 띠었다.
토타라누이 DOC(보존부) 안내소에는 그에 관한 신문 기사가 실려 있다. 그는 오래전부터 토타라누이에 '러스티 인'(Rusty Inn, '오래된 여인숙')이라는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 놓고 오가는 여행객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나 홀로 숲길을.’ 사진에 담을 수 없는 숲 냄새가 지금도 느껴진다.
 ‘나 홀로 숲길을.’ 사진에 담을 수 없는 숲 냄새가 지금도 느껴진다.
ⓒ 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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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리와랑이 산장, 100년 넘은 역사적 건물로 유명

마침 자원봉사자들의 브런치 모임이 있었다. 대여섯 명의 봉사자가 커피를 마시며 일정을 논의하는 중이었다. 내가 사진을 찍겠다고 하자 흔쾌히 모델이 되어 주었다. 아벌 타스만을 지키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산지기들이었다.

토타라누이에는 역사적 건물이 한 채 있다. DOC 안내소에서 올레길 구간을 따라 10분 정도 걸으면 독특한 집이 보인다. 나라타 홈스티드(Ngarata Homestead)다. 1914년에 건립된 이 집은 와리와랑이 산장(Whariwharangi Hut)과 함께 아벌 타스만 지역의 초창기 견본집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 캘리포니아 방갈로 모양을 한 이 집을 왕실에서 구입해 학생들의 교육 공간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DOC 안내소에는 작은 매점도 있었다. 그곳에서 꽝꽝 언 얼음과자 두 개를 사서 먹었다. 뜨거운 한낮의 열기를 잠재우는 데는 최고의 주전부리였다.

오늘의 목적지인 와리와랑이까지 계속해 걸었다. 새벽부터 길을 나서서 그랬는지 몰라도 오후 3시가 안 돼 숙소(매트리스 20개)에 도착했다. 100년이 훌쩍 넘은 관록을 몸소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1896년에 세워짐) 산장 곳곳에는 역사의 발자취가 스며 있었다.

두꺼운 쇠로 된 난로와 굵은 원목으로 된 이층 계단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이 공간에서 수많은 여행자가 여독을 풀었을 것으로 생각하니 이상하게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여섯 시간을 넘게 걸어 그런지 금방 피곤이 몰려왔다. 매트리스를 바닥에 깔고 늦은 낮잠에 빠졌다. 말 그대로 '깊고 푸른 잠'.
 
1914년에 건립된 이 집은 와리와랑이 산장(Whariwharangi Hut).
 1914년에 건립된 이 집은 와리와랑이 산장(Whariwharangi H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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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여행자의 책 읽는 소리 정겨워

한두 시간 잔 뒤 잠에서 깨 바닷가로 나갔다. 바다는 흉흉했다. 사람 하나 볼 수 없었다. 아벌 타스만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는데 특별히 기억으로 삼을 일이 바닷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왔다. 그 사이 여러 여행자가 공간을 메꿨다. 그 가운데는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도 있었다. 한 할머니가 예닐곱 살 된 손자에게 책을 읽어주는 모습이 내 눈에 띄었다. 해리 포터 책이었다.

할머니는 옛날이야기를 하듯 조곤조곤 책을 읽어 나갔다. 손자는 마법의 세계가 황홀한지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었다. 누가 그랬던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책 읽는 소리'라고.

이번 올레길을 걸으면서 내심 부러운 게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책 읽는 여행자들의 모습이었다. 나흘 밤을 산장에서 지내는 동안 대략 50~60명은 만난 것 같다. 그 가운데 셋 중 둘이 독서가였다. 그들은 종이책과 전자책으로 또 다른 여행을 하고 있었다.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두 가지 여행을 이들은 모두 즐기고 있는 셈이었다.
  
아벌 타스만 해안 트랙은 하루 걷기 여행도 가능하다. 배를 타고 일일관광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
 아벌 타스만 해안 트랙은 하루 걷기 여행도 가능하다. 배를 타고 일일관광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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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스 힐, 윌리엄 깁스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져

아벌 타스만 해안 트랙은 와이누이만(Wainui Bay)까지 걷는 코스로 짜여 있다. 와리와랑이에서 와이누이만까지는 5.7km, 2시간 거리다. 마라하우에서 시작하면 60km에 이른다. 보통 여기서 끝을 보게 되는데 나는 그날 낮까지 다시 토라라누이까지 돌아가야만 했다. 예약해 놓은 수상택시를 제 시간에 타려면 서두르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숙소를 나왔다. 아무도 없는 새벽 숲길을 나홀로 걸었다. 하늘에서는 산새가 내 마음을 호위했고, 땅에서는 들꽃이 내 걸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위험한 산길을 왜 혼자 걷느냐?"고.

나는 혼자 다니는 게 그냥 좋다. 개체로 왔다가 개체로 가는 게 인생 아니던가. 한 시간 정도를 걷자 갈림길이 나왔다. 눈 아래로는 태즈메이니아 바다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시간에 쫓기지만 않았다면 10여 분은 쉬어줘야 할 비경을 품고 있었다.

깁스 힐(Gibbs Hill)로 들어섰다. 이 길로 쭉 가면 이번 올레길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토타라누이에 이른다. '깁스 힐'은 윌리엄 깁스(William Gibbs)를 기리기 위해 만든 길이다. 
 
산길을 걷다가 만난 새(?). 아벌 타스만 해안 트랙 코스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산길을 걷다가 만난 새(?). 아벌 타스만 해안 트랙 코스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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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눕는다"… 토타라누이 인근 갈색 풀밭 장관

1856년에 뉴질랜드에 온 그는 이곳에 정착해 농장 일을 했다. 우유와 낙농 제품을 넬슨에 공급하기도 했다. 초창기 몇 안 되는 유럽 사람 가운에 한 명이었던 그의 공을 높이 여겨 산길 하나를 통째로 내준 것이다.

깁스 언덕은 생각보다 가팔랐다. 30분을 걷자 언덕 꼭대기에 송전탑 같은 게 보였다. 호기심 많은 여행자가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배낭을 풀어 놓고 맨몸으로 탑까지 기어 올라갔다. 와이파이 신호가 잡혔다. 카톡 친구 몇 사람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다. 그야말로 값비싼 기록물이다.

토타라누이에 도착하기 전 한동안 갈색 풀밭이 이어진다. 마침 바람도 적당히 불었다. 김수영(1921~1968)의 시, '풀'이 떠올랐다. 김수영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쓴 시로 알려져 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중략)/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사실 시간만 있었다면 나는 이곳에서 한동안 누워 있고 싶었다. 김수영이 말한 풀밭이 이곳일 거라는 99%의 확신이 들어서였다. 
 
수상택시는 물 제비처럼 바닷물을 갈랐다. 내가 무려 닷새에 걸쳐 서른 시간도 넘게 걸어온 길을 겨우 한 시간 만에 끝냈다.
 수상택시는 물 제비처럼 바닷물을 갈랐다. 내가 무려 닷새에 걸쳐 서른 시간도 넘게 걸어온 길을 겨우 한 시간 만에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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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택시, 만 중간중간 멋진 모습 구경 시켜 줘

수상택시 출발 10분을 앞두고 토타라누이에 도착했다. 4박 5일 동안 70km 가깝게 걸었다. 산길도 멋졌지만, 물길(바닷길)도 좋았다. 이 세상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산수(山水)가 빼어난 올레길이다.

수상택시는 물 제비처럼 바닷물을 갈랐다. 내가 무려 닷새에 걸쳐 서른 시간도 넘게 걸어온 길을 겨우 한 시간 만에 끝냈다. 그게 마음에 쓰였는지 젊은 운전사는 사람 발이 닿을 수 없는 만(bay) 중간중간을 구경 시켜 주었다.

물개들이 일광욕을 하는 모습, 이름을 모르는 고기들이 수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2019년 12월 중순 어느 날, 아벌 타스만의 햇빛은 찬란했고 금빛 물결은 더할 나위 없이 황홀했다.

- 아벌 타스만 해안 트랙 개요
                 
지역: 아벌 타스만 국립 공원(Abel Tasman National Park)
출발 및 도착: Marahau 또는 Wainui
거리: 60km
기간: 3~5일
시기: 1년 내내
인근 마을: Marahau, Wainui, Totaranui
산장: Anchorage(매트리스 34개),
Bark(매트리스 34개), Awaroa(매트리스 26개),
Whariwharangi(매트리스 20개)

덧붙이는 글 |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발행되는 뉴질랜드타임즈에도 실립니다.


태그:#뉴질랜드 올레길, #아벌 타스만, #NZ GREAT WAL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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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뉴질랜드로 이민 와 책 읽고, 글 쓰고, 걷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책방을 운영했고, 지금은 한솔문화원 원장과 프리랜서 작가로 있습니다. 남은 삶도 읽고 쓰고 걷고, 이렇게 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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