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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후배가 오기로 한 날이었다. 내가 속한 방송 프로그램 팀에서 막내작가로 함께 일했던 후배였다. 서울 한 방송국에 취업해 정신없이 일하던 후배는 간만에 귀한 휴가를 얻었다며 전주에 내려오겠다고 했다.

우리는 안다. 프리랜서 방송작가가 긴 휴가를 얻기란 얼마나 희귀한 일인지. 우리는 흔쾌히 저녁 약속을 잡았다. 그동안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고 바쁘게 일했던 후배의 직장생활도 듣고, 객지 생활의 외로움도 달래주고, 상사 흉에도 맞장구쳐가며 그렇게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후배였기에 우리는 마음껏 취하리라 다짐했다. 모든 준비는 다 되었다.

그런데 그날, 2월 20일. 전주에서 첫 코로나19 확진 환자가 나왔다. 퇴근 시간 무렵이었다. 확진자가 나왔다는 속보만 얼핏 듣고 뒤숭숭한 마음으로 우리는 저녁 약속 장소로 향했다.

후배와 우리는 손을 마주 잡고 환하게 웃으며 서로 껴안았다. 그리고 서로의 근황을 간단히 나누었다. 술과 안주를 시킨 뒤 술을 한 순배 돌렸다. 딱 거기까지였다. 우리의 훈훈함은.

확진자 애인의 아버지 직업을 왜 알아야 하나
 
그때부터 갑자기 여기저기서 긴급재난문자 알림이 정신없이 울려댔다. 다들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마치 현장중계를 하듯 확진자의 동선, 이름, 개인정보, 사생활까지 서로 브리핑하듯 읊었다.
 그때부터 갑자기 여기저기서 긴급재난문자 알림이 정신없이 울려댔다. 다들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마치 현장중계를 하듯 확진자의 동선, 이름, 개인정보, 사생활까지 서로 브리핑하듯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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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갑자기 여기저기서 긴급재난문자 알림이 정신없이 울려댔다. 다들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마치 현장중계를 하듯 확진자의 동선, 이름, 개인정보, 사생활까지 서로 브리핑하듯 읊었다. 단톡방(메신저 단체대화방)과 온라인 카페에 쉴새 없이 올라오는 정보를 나르느라 손들이 분주했다.

처음에는 '정말?' '진짜?' '거기도 갔어?'라고 대꾸하며 마치 고급정보를 얻은 듯 통쾌한 기분이었지만 필요 이상의, 별로 알고 싶지 않은 개인의 사적인 내용이나 확진자 애인의 가족 신상까지 모두 탈탈 '털려' 내 앞에 쏟아졌을 때는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인 아버지의 직업까지 공개되자 (그것도 확인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온통 '카더라'라는 식의 정보였다) 나오지 말아야 할 것이 나와 저녁상이 모두 뭉개지고 엎질러진 기분이 들었다.

왜 내가 그런 것까지 다 알아야 하지? 그것이 내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일까? 감염 능동감시를 위해 필요한 건 확진자와 접촉자가 다녀간 장소와 그 시간이지 애인 아버지의 직업은 아니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19보다 '사람들'이 더 무서웠다. 내가 만약 확진자가 되면, 내 지인, 내 일상이 이렇게 순식간에 털릴 수도 있겠구나 싶으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떻게 이런 정보가 이렇게 순식간에 노출되고 전파될 수 있는지, 나는 두려웠다.
   
그날 저녁을 먹었던 식당은 확진자가 다니는 직장과 멀지 않았다. 누군가 그걸 상기시키자 빨리 집으로 가야 한다는 둥, 식구들이 빨리 집으로 오라고 호출한다는 둥, 일단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둥 야단스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후배랑 저녁 식사를 하러 들뜬 마음으로 식당에 온 지 30분 만에 즐겁던 분위기가 파괴됐다. 조용하고 빠르고 은밀하게. 

우리가 호들갑을 떠는 동안, 후배는 혼자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처음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맞장구를 치던 후배는 어느 순간 말없이 혼자 술잔을 채웠다. '왜 제가 오랜만에 전주에 오니 이런 일이 생기나요'라며 농담처럼 웃더니 조금 술이 들어가자 '오늘 지하철을 탔는데 마스크를 안 쓴 사람이 나뿐이었어요. 모든 사람이 나를 힐끔 쳐다봐서 무서웠어요'라며 하소연을 했다.

사실 그때(2월 20일 오후 4시 기준 확진자 수 총 104명)만 해도 사태가 지금(11일 0시 기준 확진자 수 총 7755명)처럼 심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또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거라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배의 그런 하소연이 이해도 됐다. 정말 그때는 몰랐으니까.

후배는 그날 무엇 때문인지 술을 조금 많이 마셨다. 이런저런 하소연도 하고 간만에 옛날이야기도 하면서 회포를 풀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이야기에 좀 집중할라치면 다시 여기저기 울리는 알림 소리 때문에 우리의 화제는 또다시 코로나19로 돌아갔다. 그날 우리의 주제 키워드는 딱 두 가지였다. '코로나19'와 '확진자'.

후배는 혼자 취했다. 우린 취하지 못했다. 그러기엔 너무 바빴다. 확진자 동선을 알고 또 알려야 했으니까. 그렇게 의미 없는 뒤숭숭한 넋두리만 더 늘어놓고서 헤어졌다.

우리는 모두 이어져 있다
 
전주에 확진자가 발생한 뒤 회사 현관에 붙여있던 발열체크 안내 문구. 본격적인 코로나19 일상을 맞게 됐다.
 전주에 확진자가 발생한 뒤 회사 현관에 붙여있던 발열체크 안내 문구. 본격적인 코로나19 일상을 맞게 됐다.
ⓒ 안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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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후, 우리는 본격적인(?) 코로나19의 일상을 맞았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무기력하다는 게 어떤 건지 실감하는 하루하루였다. 그저 텔레비전 뉴스와 인터넷 속보만 끼고 살며 '큰일 났다'만 반복했다. 사람들끼리 만나면 온통 '확진자가 몇 명 발생했네' '확진자가 어딜 다녀갔대'라는 이야기만 고장 난 인형처럼 무한 반복했다. 세상의 온 빛깔이 다 바랜 듯했고 사람들은 마스크 속에 자신의 언어를 다 꼭꼭 숨긴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다 변했다. 행사, 일정도 다 취소됐고, 촬영자, 인터뷰이도 모두 거절했다. 술자리나 모임은 후배가 온 그날이 사실상 마지막이었다. 다들 만나지 않고 접촉하지 않는 게 서로를 위한 최선이 됐다. 전국의 초·중·고 개학이 연기되며 아이들도 집 안에만 머물렀다. 이 모든 현실이 다 비현실 같았다.

다행히 내가 사는 전북 전주는 대구경북에 비해 상황이 그리 심각하진 않다. 요즘 전북 지역은 주춤하는 기세지만, 언제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전주만 잘 막고 노력한다고 될 일도 아니다. 모든 존재가 서로 긴밀하게 이어져 있음을 코로나19로 인해 재확인했다. 우리 모두가 서로 이어져 있다는 것은 전염병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취약점이기도 하고 역설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정신이 좀 들고 어느 정도 주변이 수습되자, 그제서야 후배 생각이 났다. 그날 취해서 집에는 어떻게 들어갔는지... 

후배의 귀한 휴가는 끝났을 테고, 지금쯤은 회사에 복귀해 또다시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는 일상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마스크를 구하러 동동거리고, 어렵게 구한 마스크로 온 얼굴을 가리고 다니겠지. 아이템도 취소되고, 촬영도 거절 당하고 섭외도 안 되고... 그렇게 툴툴거리며 집에 가서 '혼술'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날, 취할 준비는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에겐 뭐가 부족했던 걸까. 무엇이 그렇게 두려워서 취하지 못했던 걸까. 정말 두려움이었을까. 혹시 불안을 위장한 호기심 충족은 아니었는지. 사람이 바이러스보다 무서웠던 날 저녁의 경험은 썩 유쾌하지 않다. 하지만 사람이 희망의 증거임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뉴스들도 많이 들려온다. 쏟아지는 기부, 봉사활동 소식들을 들으며 코로나19를 분명 극복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다.

그나저나 후배와는 언제 다시 취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손을 잡고 세차게 흔들고 서로 힘껏 껴안을 수 있는 그 날이 멀지 않기만을 바란다.
 
절기상 경칩(驚蟄)인 5일 산수유가 핀 서울 청계천 주변을 시민들이 산책하고 있다.
 절기상 경칩(驚蟄)인 5일 산수유가 핀 서울 청계천 주변을 시민들이 산책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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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코로나19, #코로나19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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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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