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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 5. 16. 시청광장에 나타난 선글라스를 낀 박정희 소장(가운데, 왼쪽 박종규 전 경호실장, 오른쪽 후 차지철 경호실장)
 1961. 5. 16. 시청광장에 나타난 선글라스를 낀 박정희 소장(가운데, 왼쪽 박종규 전 경호실장, 오른쪽 후 차지철 경호실장)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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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선글라스를 낀 사연

나는 경북 구미시 원평동 장터마을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태어난 곳은 거기서 50리 떨어진 낙동강 건너 도개면 도개라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또한 박정희 전 대통령과도 연고 있는 곳이다. 첫 번째 부인 김호남씨와 결혼한 처가마을이기 때문이다.

나는 갓난아이 때부터 할머니 품에서 자랐고, 여든이 넘어 돌아가실 때까지 함께 살았다. 내가 서울 구기동에서 살 때 우리 집은 북한산 중턱 산동네였다. 대청마루에서 정면으로 청와대 뒷산과 북악산 팔각정 일대가 보였다. 밤이면 북악스카이웨이 가로등 불빛이 빤히 보였다. 할머니는 이따금 대청에서 "'상모 양반'은 밤에도 저렇게 불을 켜고 주무신다"라고, 그분에 대한 추억을 말씀하셨다. 
  
 옛 대구사범학교(현재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부속 고등학교).
 옛 대구사범학교(현재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부속 고등학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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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첫 인상은 거의 평생을 지배하나 보다. 할머니에게 깊이 새겨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미지는 대구사범학교 5학년 재학 중 도개마을로 장가온 그때 그 모습이었다. 그래서 늘 그분을 '상모 양반'으로 불렀으며, 그 시절의 추억을 자주 말씀하시곤 했다.

"까맣고 쪼고만 사람으로 풍채(風采, 사람의 겉모습)는 참 볼품이 없어 초례청에서 많이 쑥덕거렸다. 그런데 어찌 강단(剛斷, 어떤 일을 야무지게 결정하고 처리하는 힘)은 그리 셌던지..."

내 어린 시절, 도개마을 사람들(특히 부녀자)은 장날 우리 집에 오면 '상모 양반' 장가오던 때 얘기를 들먹거렸다. 부인 김호남씨도 친정마을 사람들을 만나고자 우리 집에 오신 적이 한두 번 있었다. 그래서 나는 상모 양반의 초혼에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를 귀에 익도록 들으며 자랐다. 후일 현지 도개마을에 가서 취재하며 들은 것도 대체로 비슷한 이야기였다.

박정희는 가난한 농사꾼의 7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 무렵 선달댁(박정희 아버지의 별호)은 아홉 식구나 되는 대가족에 처가 위토 논 여덟 마지기를 붙였다. 그러니 많은 식구들이 하루 세 끼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박정희는 어머니가 마흔이 넘어 낳은 막내로 태어났다. 모유가 부족한 탓으로 체구가 작았다. 게다가 어린 시절 상모동에서 원평동 구미보통학교(구미초등학교)까지 20리가 넘는 먼 길을 책보를 들거나 등에 메고 걷거나 뛰어다니느라 몸도 여위었고 얼굴도 뙤약볕에 까맣게 그을렸다.

가난은 줄곧 떠나지 않았다. 성년이 된 뒤에도 체구가 작고 깡말랐다. 그러자 그는 훗날 자신의 왜소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 선글라스를 쓰고 다녔다. 그래서 5.16 아침 서울시청 앞에 첫 모습을 드러낼 때도, 심지어 케네디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할 때도 선글라스를 썼다.
  
 선산읍과 도개면을 잇는 '일선교'. 다리에 새긴 석판 글씨는 박정희의 친필이다(2004년).
 선산읍과 도개면을 잇는 "일선교". 다리에 새긴 석판 글씨는 박정희의 친필이다(2004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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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교

"오래간만에 고향 땅을 찾아서 여러분들을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되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그동안 고향에 계신 여러분들이 나에 대해서 항시 음으로 양으로 여러 가지 도와주시고, 성원해 주신 데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사랑합니다. 자기의 고향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누구도 다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내가 이 고장에서 태어나고, 이 고장에서 잔뼈가 굵었고, 또 우리의 조상들의 뼈가 이 고장에 묻혀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객지에 가서 오래 산다 해도, 또는 나이를 아무리 많이 먹는다 해도 어릴 때 자라난 고향산천은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중략)

이번에 일선교 준공식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이 준공식에는 꼭 내가 참석해서 고향에 계신 여러분들을 한번 뵈어야 되겠다, 이렇게 오래전부터 벼르고 있었습니다." - 경북 선산군 일선교 준공식 때 박정희 대통령 치사(1967. 3. 30.)


일선교는 선산읍 생곡리와 도개면 도개리를 잇는 교량으로, 낙동강 동부지방과 서부지방을 연결시켰다. 이 다리가 없었을 때는 도개나루에서 나룻배로 건너다녔다. 나도 어린 시절 어느 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도개나루를 건너 친척집에 갔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곳에 다리가 세워지는 일은 이 지방 사람들의 숙원사업이었다. 그 꿈같은 일이 5.16 이후에 추진돼 준공됐다. 그날 건설부장관, 경북도지사와 마을 노인과 함께 준공 테이프를 끊은 박정희 대통령의 마음은 어땠을까.

1936년 8월, 대구사범 재학시절, 박정희는 학생의 신분으로 장가를 가고자 이 도개나루를 건너갔다. 그로부터 31년이 지난 1967년 3월 30일에 스스로 다리 준공 테이프를 끊을 줄이야.

일선교 준공식 날. 일선교 이쪽 저쪽인 도개마을과 생곡마을사람은 죄다 일선교 개통식장에 나와 농악대의 신명 속에 동네잔치를 벌이며 한바탕 축제를 벌였다고 한다. 다만 그 잔치마당에 단 한 집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침통하게 하루를 보냈다는 후문이다. 바로 처가 김씨댁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102돌(2019년) 숭모제가 열린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생가 추모관. 참석자들이 영정에 큰절을 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102돌(2019년) 숭모제가 열린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생가 추모관. 참석자들이 영정에 큰절을 하고 있다.
ⓒ 구미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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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가 마을사람들의 냉대

부부 관계란 제3자가 왈가왈부할 수 없는, 그들만의 얘기가 있기 마련이다. 나는 '상모 양반'과 김호남씨의 파경에 얽힌 사연을 숱하게 들어왔다. 하지만 이제 두 분 다 고인이 된 마당에 그 얘기들을 기사로 쓰기는 적절치 않은 것 같아 생략한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다면 한 편의 소설로 그려볼 셈이다.

몇 해 전 봄, 일선교를 지나자 강물은 두 사람의 아픈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제나 이제나 쉬엄쉬엄 흘러갔다. 그야말로 사람은 가고 강물만 흘렀다. 만일 그때 두 사람 부부 금슬이 매우 좋았더라면 문경초등학교 박정희 선생님은 만주군관학교에 굳이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우리나라 현대사도 그리고 당신의 최후도 그리 볼썽사납게 끝나지 않았을 게다.

2018년 10월, 고향의 한 서점(구미 삼일문고)에서 내 신작 사인회가 열렸다. 마침 한 고향 후배가 내게 질문을 했다. 그즈음 구미는 고장의 정체성 문제로 무척 힘들다는 얘기였다.

나도 그 얼마 전부터 구미문화원에서 보내온 책자를 본 적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생일날과 제삿날은 '탄신제' 또는 '숭모제'라 하여, 마치 왕조시대처럼 떠받들어 지내고 있었다. 지역 국회의원, 시장, 도지사 등 정치인들이 생가로 몰려와 조선시대 종묘제례처럼 예복을 갖춰입고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등으로 앞 다퉈 술잔을 올리고 있었다. 

이런 요란한 제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결코 바란 바가 아닐 것이다. 이는 고인에 대한 존경의 마음보다 주최자들이 자기 자리보전과 정치적 야망을 이루고자 벌이는 일일 게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요지로 답했다.
 
 구미 금오산에 있는 채미정. 고려말 충절의 선비 야은 길재가 머물렀다.
 구미 금오산에 있는 채미정. 고려말 충절의 선비 야은 길재가 머물렀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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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오지심

"청년 박정희는 체구도 작고, 양반도 아니라고, 처가마을 사람들이 몹시 냉대하고 모멸감을 주었다. 그러자 박정희는 분기충천해 이후 긴 칼을 차고 그들의 사고를 개혁하고자 교사직도, 처자식도 버리고 만주로 갔다. 또 그분은 대통령 재임 때 가정의례준칙을 만들어 허례허식을 배격했다. 굴건제복도, 심지어 관혼상제 때 음식대접도 못하게 했다.

아마도 죽은 박정희가 살아난다면 요란한 젯상을 군홧발로 
걷어 찼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 고장 출신 국회의원, 시장, 도지사들은 나랏돈으로 이 따위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민생이나 제대로 돌보라'는 불호령을 내렸을 것이다.

이런 추모 일은 가족이나 집안중심으로 조촐히 행사를 치르는 게 선진 민주국가에 걸맞은 일일 것이다. 행여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에 독립투쟁하다가 순국하신 분들이나 그 후손들이 이런 사실을 알면 크게 분개할 것이다."


청년 박정희는 초혼 때 처가마을 사람들에게 얼마나 화가 났으면 처자식마저 버렸을까. 영정 앞에 엎드린 사람들 가운데는 박정희를 냉대, 모멸했던 토호 집안들의 후손도 분명 있을 것이다.

사람이 대의(大義)에 대한 수오지심(羞惡之心, 부끄러워 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짐승과 그 무엇이 다를까.

(*다음 회에 계속.)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전인권 지음 <박정희 평전> / 정영진 지음 <청년 박정희> / 최상천 지음 <알몸 박정희> / 조갑제 지음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등 수십 권의 참고자료와 동시대에 살았던 여러 고향사람들의 증언으로 쓴 기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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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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